비엔나와 음악/비엔나 오페라극장

부르크테아터(Burgtheater) - 궁정극장

정준극 2010. 1. 7. 16:28

부르크테아터(Burgtheater) - 궁정극장

모차르트의 오페라 초연

www.burgtheater.at

1구 우니페어지태트 링(Universitat Ring) 2

 

우니페어지태트 링에 있는 부르크테아터의 위용

 

비엔나 시청(라트하우스)은 비엔나 관광 1번지이다. 무릇 관광객들은 전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보던지 또는 직접 시청앞 광장에 들려서 두리번거리며 보던지 아무튼 시청의 위용을 인식하고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좀 더 관심 있는 사람들은 시청 건물 내부를 가이드를 받아서 관람하며 ‘대단하다’는 말과 함께 ‘도대체 여기가 시청인가 궁전인가?’라는 생각을 갖는다. 하지만 시청의 바로 길 건너에 자리 잡고 있는 부르크테아터에 대하여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그저 ‘만남의 장소’ 정도로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건 곤란하다. 부르크테아터는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국립극장이며 독일어 연극을 하는 극장으로서는 세계 최고의 무대이다. 현재 독토르 칼 뤼거 링(Dr Karl Lueger Ring)에 있는 부르크테아터는 1888년에 비엔나의 링이 조성될 때에 함께 완성되었다. 그 전에는 호프부르크 궁전 앞의 미하엘러플라츠에 있었다. 일찍이 1741년 유명한 마리아 테레자 여제가 설립하였다. 말하자면 호프부르크를 중심으로 살고 있는 왕족, 귀족들을 위한 극장이었다. 당시에 비엔나 시민들은 부르크테아터를 간단히 ‘디 부르크’(Die Burg)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그러다가 현재의 위치로 극장을 신축하여 이사 오게 되었다.

 

호프부르크의 정문 앞 미하엘러플라츠에 있었던 부르크테아터(오른쪽 작은 집). 모차르트의 '후궁에서의 도주' '피가로의 결혼' '여자는 다 그래'는 바로 이 극장에서 역사적인 초연을 가졌다.

 

지금은 옛 부르크테아터(디 부르크)의 모습을 찾아 볼수 없지만 부르크테아터는 오픈 이래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기록을 남긴 장소였다. 세편의 모차르트 오페라가 초연된 곳이기 때문이다. 1782년에는 ‘후궁에서의 도주’(Die Entführung aus dem Serail), 1786년에는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790년에는 ‘여자는 다 그래’(Cosi fan tutte)가 초연되었다. 이런 오페라를 공연할 때에는 부르크테아터가 바로 호프부르크에 붙어 있기 때문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만조백관을 대동하고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 주기도 했다. 부르크테아터의 명칭은 역사의 흐름과 함께 여러번 바뀌었다. 마리아 테레자 여제가 처음 설립하였을 때는 K.K. Theater an der Burg(K.K. 궁정극장)이라고 불렀다가 그의 아들 요셉 2세 때에는 Deutsches National Theater(독일국립극장)이라고 불렀다. 1794년부터는 K.K. Hoftheater nächst der Burg(궁전 옆 K.K. 궁정극장)이라고 불렀다가 1920년부터는 K.K. Hofburgtheater(K.K. 호프부르크극장)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이제는 간단히 Burgtheater(궁정극장)가 되었다. 명칭이 어떻게 변천했는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이 극장이 독일어 연극을 공연하는 극장으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극뿐만 아니라 음악회, 발레도 공연하고 있어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화려한 부르크테아터의 대계단

 

시청의 길 건너편, 독토르 칼 뤼거 링에 위치한 새로운 부르크테아터는 1888년 독일의 유명한 건축가인 고트트리트 젬페르(Gottfried Semper)와 비엔나의 위대한 건축가 칼 프라이헤르 폰 하제나우어(Karl Freiherr von Hasenauer)가 공동으로 완성했다. 웅장하고 화려함은 가히 당대 최고였다. 당시 비엔나의 가장 중심 되는 위치에는 슈타츠오퍼(국립오페라극장)가 건설되었기 때문에 신축 부르크테아터는 오페라보다는 연극이 중심이 되었다. 독일어로 된 연극만 무대에 올렸다. 외국 극작가의 작품은 독일어로 번역되어 공연되었다. 몰리에르의 작품이 가장 많이 공연되었다. 비엔나의 극작가로서는 그릴파르저, 또는 네스트로이의 작품이 단골 메뉴였다. 수많은 연극이 공연되었지만 그 중에서 나쁜 쪽으로 기억에 남는 공연 하나를 소개하자면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한지 한참 후인 1943년, 아직도 전쟁의 포성이 들리는 중에 공연된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이다. 당대 최고의 배우인 베르너 크라우스(Werner Krauss)가 유태인 고리대금업자인 샤일록을 맡았다. 어찌나 실감 있게, 그리고 밉살스럽게 연기를 했던지 그로부터 비엔나에서는 반유태인 정서가 더욱 드높아져서 유태인에 대한 박해가 노골적으로 추진되었다.

 

1900년대 초의 부르크테아터 모습

 

전쟁이 막바지에 오른 1945년 3월 12일, 부르크테아터는 연합군의 폭격을 받아 일부분이 파손되었다. 그로부터 꼭 한 달 후인 4월 12일, 원인모를 화재가 발생하여 거의 전소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비엔나 시당국과 시민들은 다른 것은 몰라도 슈타츠오퍼(국립오페라극장)과 부르크테아터만은 우선적으로 복구해야 한다는 단단한 각오로 어려운 중에도 예산을 마련하여 복구작업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1955년 오스트리아가 4강의 통치로부터 벗어남과 함께 완전히 복구하여 재개관하게 되었다. 부르크테아터는 최고의 독일어 연극 극장이니만치 무릇 배우로서 출세코자 하는 사람들은 부르크테아터에 입문해야 했다. 그래서 부르크테아터 인근의 카페(예를 들면 란트만 카페)에는 배우지망생들이 항상 죽치고 앉아서 단역이라고 하나 맡으려고 정성을 들였다. 일단 부르크테아터에서 출연한 경력이 있으면 그로부터 중견배우로서 인정을 받는 것이 전통이었다. 부르크테아터는 약 120명의 소속 배우들을 거느리고 있다. 그동안 부르크테아터를 거친 유명 배우들의 이름을 열거하자면 책 한권이 될 것이므로 지면상 생략코자 한다. 하여튼 내노라하는 명배우들은 거의 모두 부르크테아터를 거쳤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현재의 부르크테아터 정면

 

부르크테아터 출신의 공훈배우들은 특별히 자체 명예의 전당에 등재하여 대대로 기념토록 하고 있다. 현재는 5명 뿐이다. 안네마리 뒤링거(Annamarie Düringer), 볼프강 가써(Wolfgang Gasser), 하인리히 슈봐이거(Heinrich Schweiger), 구스티 볼프(Gusti Wolf), 미하엘 헬타우(Michael Heltau)이다. 우연한 기회에 연극을 좋아하는 비엔나 사람을 만나 얘기할 때에 이들의 이름을 대충 거론하면 ‘아니, 어찌 그리 잘 아시는가? 참 대단하시네!’라는 찬사를 받을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이름을 기재한 명판은 폭스가르텐 방향의 대층계에 설치되어 있다. 부르크테아터는 연극배우들의 등용문이기도 했지만 극작가로서도 대성할수 있는 관문이었다. 토마스 베른하르트, 노벨문학상을 받은 엘프리데 옐리네크, 페터 한드케(Peter Handke), 페터 투리니(Peter Turrini), 게오르게 타보리(George Tabori), 클라우스 파이만(Claus Peymann) 등이 부르크테아터를 거쳐서 위대한 극작가로서 거듭 태어났다. 2010년 현재의 극장장은 마티아스 하르트만(Matthias Hartmann)이라는 양반이다.

 

폭스가르텐 방향의 부르크테아터 옆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