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비엔나 오페라극장

[참고자료] 에마누엘 쉬카네더(Emanuel Schikaneder)

정준극 2010. 1. 7. 17:11

[참고자료]

에마누엘 쉬카네더(Emanuel Schikaneder)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 초연 주관

테아터 안 데어 빈(빈강변극장) 설립

 

에마누엘 쉬카네더

 

흥행주, 극작가, 배우, 성악가였던 쉬카네더는 1751년 독일의 슈트라우빙(Straubing)에서 태어났으며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 전선에서 패배하던 해에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쉬카네더는 ‘마술피리’의 대본을 썼고 ‘테아터 안 데어 빈’을 설립했으며 수많은 징슈필과 오페라에 직접 출연하여 바리톤 배우로서 이름을 떨쳤다. 그는 ‘마술피리’의 초연에서 파파게노 역을 맡은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쉬카네더가 무대 활동을 시작한 것은 22세 때인 1773년(미국이 독립하기 1년전)으로 독일지역에서 순회공연을 하는 모저극단(Theatrical troupe F.J. Moser)의 단원으로 들어가고부터이다. 모저극단은 오페라 이외에도 징슈필이나 익살극도 공연했다. 쉬카네더는 모저극단의 단원으로 활동하던 1777년 같은 단원이던 엘레오노레 아르트(Eleonore Arth)와 사랑하게 되어 결혼하였다. 그 해에 쉬카네더는 뮌헨에서 햄릿을 맡아 대단한 찬사를 받았다. 이듬해에 그는 모저극단의 단장이 되었다. 그리고 2년후인 1780년에는 순회공연을 위해 잘츠부르크를 방문 중에 모차르트를 처음 만났다. 그로부터 쉬카네더는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친분을 맺으며 지냈다.

 

쉬카네더는 제국의 수도인 비엔나에서 활동키로 작정했다. 그는 자체극단을 마련하여 1785년부터 비엔나의 케른트너토르극장에서 공연할수 있었다. 쉬카네더는 자체 극장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래서 요셉2세 황제에게 새로운 민간극장 건설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거절당했다. 극장이나 공연등은 당국에서 관장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실망한 쉬카네더는 비엔나를 떠나 레겐스부르크(Regensburg)로 갔다. 레겐스부르크는 비엔나 다음으로 중요한 신성로마제국의 도시였다. 쉬카네더는 레겐스부르크에서 몇 년 동안 활동하다가 비엔나를 잊지 못하여 1789년 다시 비엔나로 돌아왔다. ‘뷔덴극장’에 소속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쉬카네더는 ‘뷔덴극장’에서 모차르트의 ‘후궁에서의 도주’를 공연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로부터 비엔나 사회에서는 쉬카네더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쉬카네더는 동화 스타일의 마술오페라를 새로운 기계장치를 도입하여 공연함으로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쉬카네더는 배우로서도 인기가 높았다. 사람들은 제2의 한스부르스트(Hanswurst)가 등장했다고 하면서 좋아했다. 한스부르스트는 비엔나 전래의 코믹 배우였다.

 

쉬카네더가 시리즈로 공연한 동화 스타일 마술오페라는 1791년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로서 절정을 이루었다. ‘마술피리’의 대본은 쉬카네더 자신이 썼다. 프리메이슨적인 요소와 전래의 동화 마술 스타일의 요소를 혼합한 내용의 대본이었다. 쉬카네더는 ‘마술피리’에서 오스트리아 전래의 어릿광대인 한스부르스트 스타일인 파파게노를 맡았다. 쉬카네더는 ‘마술피리’의 음악과 관련하여 모차르트에게 여러 의견을 제시하여 반영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파파게노와 파파게나가 처음 만나서 부르는 듀엣이다. 모차르트는 두 사람이 서로 ‘파파게노--’ ‘파파게나--’라고 처음부터 풀 네임을 부르며 감격해 하는 내용으로 작곡했다. 쉬카네더는 리허설 때에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있는 모차르트에게 ‘여보게, 이 부분은 좀 어색하네! 파파게노와 파파게나가 좀 덜 떨어진 인물들이 아닌가? 말을 하더라도 좀 더듬어야지 않겠나? 그러면 파-파-파파파파파 게노....이런 식으로 하다가 나중에 가서야 완전하게 이름을 부르도록 하는 것이 좋겠네!’라고 충고하였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쉬카네더의 충고를 받아 들여서 듀엣 장면의 음악을 ‘파-파-파-파...’라는 식으로 고쳤다고 한다. 또 한가지는 쉬카네더가 제2막에 나오는 승려들의 행진곡을 오페라의 마지막 장면에도 다시 사용토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여 그렇게 했다고 한다.

 

쉬카네더는 ‘마술 피리’와 다른 오페라의 성공으로 이제는 정말 자기 소유의 극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크게 인식하고 새로운 극장의 건설을 착수했다. 1801년 오픈되었다. 프란츠 타이버의 오페라 Alexander(알렉산더)가 개관기념으로 공연되었다. 쉬카네더가 대본을 썼다. 당시 신문들은 ‘테아터 안 데어 빈’이 비엔나에서 가장 화려하고 첨단 장치를 구비한 가장 규모가 큰 극장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경비가 많이 들었다. 쉬카네더는 1년도 못되어서 다른 사람에게 극장을 넘겨주어야 했다. 쉬카네더는 극장주가 아니지만 이 극장의 예술감독으로서 몇 년을 더 활동했다. 쉬카네더가 예술감독으로 있는 기간 중에 그는 베토벤과 친분을 갖게 되었다. 베토벤은 쉬카네더가 대본을 쓴 Vestas Feuer(베스타 신전의 불)를 오페라로 만들 생각도 했었다. 만일 그렇다면 베토벤은 휘델리오 이외에 또 한편의 오페라를 남기게 되었을 것이다. 베토벤은 마땅한 하숙방을 구하기 어려워 쉬카네더의 호의로 ‘테아터 안 데어 빈’의 방 하나를 제공받아 지낸 일이 있다. 베토벤은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살면서 오페라 휘델리오를 비롯하여 교향곡 제3번 영웅과 기타 몇 개의 작품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베토벤을 연구하는 학생들에게는 ‘테아터 안 데어 빈’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804년 ‘테아터 안 데어 빈’은 페터 폰 브라운(Peter von Braun) 남작에게 팔렸다. 폰 브라운은 즉각적으로 평소 라이벌이었던 쉬카네더를 해고하였다. 비엔나를 떠난 쉬카네더는 브르노(Brno)와 슈타이르(Steyr)에서 이럭저럭 일하면서 지냈다. 그러다가 1811년에 이르러 파산의 지경에 이르렀다. 우선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사회전체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여기에 1811년의 화폐개혁으로 그나마 가지고 있던 돈이 휴지조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듬해인 저 유명한 1812년, 그는 부다페스트로 가서 새로 일자리를 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부다페스트로 여행하는 중에 무슨 충격을 받았던지 뜻하지 아니하게 정신질환에 걸렸다. 즉, 미쳤던 것이다. 그는 그해 9월 21일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1세였다. 쉬카네더는 약 55편의 작품을 썼다. 그 중에서 44편은 오페라 또는 징슈필의 대본이었다.

 

쉬카네더는 훌륭한 바리톤이었다. 그런 그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가족 중에 두 사람이 오페라 성악가로서 활동했다. 쉬카네더의 형인 우르반(Urban: 1746-1818)은 베이스였다. 우르반은 쉬카네더 수년 동안 극단에서 동생과 함께 일했다. 우르반은 ‘마술 피리’의 초연에서 제1 고승의 역할을 맡았었다. 우르반의 딸인 안나(Anna: 1767-1862)는 소프라노였다. 24세 때에 ‘마술 피리’에서 제1소년 역을 맡았었다. 얼마후 안나는 레오폴드슈타트극장으로 옮겨 그곳에서 ‘마술 피리’의 ‘밤의 여왕’을 맡아 이름을 날렸다. 쉬카네더의 사생아인 프란츠 쉬카네더(1802-1877)는 페르디난트 1세 황제에게 봉사하는 대장장이였다. 오페라 공연으로 돈을 번 쉬카네더는 한동안 그린칭 구역에 저택을 사서 살았다. 쉬카네더 슐뢰쓸(작은 궁전)이라고 하는 저택이었다. 훗날 프란츠 레하르가 이 저택을 사서 살았다. 그래서 현재 이 저택은 비엔나의 역사기념물로서 ‘쉬카네더-레하르 슐뢰쓸’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