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비엔나 오페라극장

슈타츠오퍼(Staatsoper) - 국립오페라극장

정준극 2010. 1. 7. 19:48

슈타츠오퍼(Staatsoper) - 국립오페라극장

세계3대 오페라극장의 하나

www.wiener-staatsoper.at

1구 괴테가쎄(Goethegasse) 1

 

 알베르티나 미술관 발코니에서 바라본 슈타츠오퍼 

 

비엔나국립오페라(Wiener Staatsoper)는 비엔나국립오페라극장을 말하기도 하고 비엔나국립오페라단을 말하기도 한다. 비엔나국립오페라의 전신은 비엔나궁정오페라(Wiener Hofoper)로서 비엔나국립오페라(슈타츠오퍼)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1920년부터이다. 세계적인 비엔나 필하모닉의 단원들은 비엔나국립오페라 오케스트라의 단원들로 구성된다. 슈타츠오퍼는 1년에 50-60편의 레퍼토리로서 약 200회의 공연을 갖는다. 시즌에는 프로그램이 매일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준비하는 직원들도 많다. 현재 약 1천명이 된다. 2009년 현재 1년 예산은 1억 유로가 조금 넘는다. 그중에서 절반 정도는 정부 지원금이다. 2009년 현재의 음악감독은 일본 출신의 오자와 세이지(Ozawa Seiji)이다.

 

비엔나의 심장인 슈타츠오퍼

 

슈타츠오퍼는 1861년에 건설키로 결정되어 1863년 5월 20일에 정초석을 놓았으며 8년 후인 1869년에 완성되었다. 아우구스트 지카르트 폰 지카르드스부르크(August Sicard von Sicardsburg)와 에두아르드 반 데어 뉠(Eduard van der Nüll)이 공동으로 설계했다. 슈타츠오퍼는 19세기 초에 비엔나 중심가를 재정비하여 링(Ring)거리를 조성할 때에 가장 먼저 세워진 건물이다. 슈타츠오퍼는 네오 르네상스 양식이다. 슈타츠오퍼가 처음 모습을 보였을 때 사람들은 별로 호감을 보여주지 않았다. 바로 길 건너편에 있는 개인저택인 하인리히스호프(Heinrichshof)보다 웅장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인리히스호프는 2차대전 중에 폭격을 받아 파괴되었으며 1955년 그 자리에는 현재의 오페른링호프(Opernringhof)가 들어섰다. 비엔나국립오페라를 지을 당시, 앞길인 링슈트라쎄가 슈타츠오퍼보다 거의 1m나 높게 조성되었기 때문에 슈타츠오퍼는 마치 ‘침몰한 상자’와 같이 보였다. 마침 1866년에는 오스트리아가 쾨니히그래츠(Königgrätz)전투에서 크게 패전하여 제국의 체면이 손상되는 일이 있었다. 비엔나 시민들은 슈타츠오퍼를 ‘건축의 쾨니히그래츠’라고 부르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이러한 핀잔에 충격을 받은 건축가 반 데어 뉠은 자살을 했으며 폰 지카르드스부르크는 그로부터 10년도 안되어 심장마비를 일으켜 세상을 떠났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건축가는 슈타츠오퍼가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일설에 의하면 반 데어 뉠은 프란츠 요셉 황제가 슈타츠오퍼에 대하여 ‘무슨 오페라극장이 이렇게 멋대가리가 없는가?’라고 한마디 했기 때문에 그로부터 충격을 받아 자살했다고 한다. 슈타츠오퍼는 1869년 5월 25일 정식으로 오픈되었다. 개관기념 공연은 모차르트의 Don Giovanni(돈 조반니)이었다.

 

슈타츠오퍼의 정면 Facade

 

2차 대전도 막바지에 오른 1945년 3월 12일, 슈타츠오퍼는 미군의 포격을 받아 불에 휩싸이게 되었다. 미군은 플로리드스도르프(Floridsdorf)에 있는 제철공장을 목표로 포격을 하였으나 포병의 계산 착오로 슈타츠오퍼에 포탄이 떨어지게 되었다. 오디토리엄(객석)과 무대는 모두 불길에 싸였다. 이와 함께 무대 쪽의 창고에 있던 무대장식품과 무대배경 및 15만벌의 무대의상들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무대배경은 120편의 오페라를 제작할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는 짐작코도 남음이 있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건물의 앞부분과 모리츠 폰 슈빈트(Moritz von Schwind)의 프레스코가 있는 회랑(Foyer), 대리석으로 장식한 주계단은 피해를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쟁이 끝난후 슈타츠오퍼는 임시로 테아터 안 데어 빈(비엔나강변극장)에 본부를 두고 명목을 유지했다.

 

슈타츠오퍼의 대리석 층계

 

슈타츠오퍼의 복구에 대하여 기나긴 논란이 있었다. 일각에서는 아예 다른 장소에 새로운 현대식 오페라극장을 짓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1년에 걸친 논란은 그 자리에 그 모습대로 복원하는 것으로 결정을 보았다. 1946년 당시 연방수상이던 레오폴드 휘글(Leopold Figl)은 1949년까지 슈타츠오퍼를 복원하는 것으로 재가하였다. 건축공모 결과 에리히 볼텐슈테른(Erich Boltenstern)이 선정되었다. 오리지널 설계를 충분히 살리는 원칙이었지만 몇가지 새로운 시도도 도입되었다. 훌륭한 음향을 얻기 위해 건축자재는 주로 목재를 사용토록 했다.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자문에 따른 조치였다. 파르테르(Parterre: 칸막이 관람석)의 좌석수는 축소했다. 갤러리(4층)에 원래 있었던 기둥은 시야확보를 위해 없앴다. 한편, 현관과 회랑과 주계단은 복구하여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도록 했다.

 

슈타츠오퍼 회랑

 

전쟁이 끝나고 오스트리아가 나치로부터 풀려나자 슈타츠오퍼의 단원들도 재빨리 다시 모였다. 단원들은 어서 공연을 추진하여 슈타츠오퍼의 존재를 보여주자고 재촉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정신이 없던 1945년 4월에 폭스오퍼를 빌려 전후의 첫 공연을 가졌다. 정식 오페라 공연이라기보다는 오페라 갈라 콘서트였다. 폭스오퍼는 소규모여서 좀 더 규모가 큰 무대가 필요했다. 슈타츠오퍼는 테아터 안 데어 빈을 빌려 리허설을 하고 1945년 5월 1일에 그곳에서 첫 공연을 가졌다. 슈타츠오퍼는 1947년에 런던 공연을 가졌다. 단원들은 슈타츠오퍼가 하루 속히 복구되어 예전처럼 오페라를 공연할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슈타츠오퍼는 기금조성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시민들의 성금이 답지했다. 소련은 건축자재를 기증하였다. 당초 복구목표는 1949년이었으나 여러 사정으로 지연되었다. 1949년에는 임시로 지붕을 덮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1955년 11월 5일에야 겨우 재개관할수 있었다. 오스트리아가 영세중립국으로서 독립한 해였다. 개관기념 공연은 베토벤의 Fidelio(휘델리오)였다. 칼 뵘이 지휘했다. 미국의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이 개관기념 공연에 참석했다. 새로운 오디토리엄은 2천1백석으로 전보다 줄어들었다. 대신에 입석은 567석으로 확대되었다. 오스트리아 공영TV인 ORF는 처음으로 공연을 생중계하였다. 당시 오스트리아 전국에는 약 8백대의 TV밖에 없었다.

 

슈타츠오퍼의 오디토리엄  

 

슈타츠오퍼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Der Neue Merker(새 감시자)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을수 없다. Der Neue Merker는 슈타츠오퍼와는 관련이 없는 별도의 단체가 발간하는 오페라 전문지이다. 일반적인 오페라 잡지들은 새로운 오페라의 공연 등을 소개하는 기사를 게재하지만 Der Neue Merker는 오로지 슈타츠오퍼에서 공연했던 오페라에 대한 평론만을 싣고 있다. 오페라 출연자들에 대한 실적평가 및 인사고과와 같은 성격이어서 신경들을 많이 쓰고 있다. 한번 발간에 약 2천부를 인쇄하는데 슈타츠오퍼 사무실이나 기념품 상점에서 구할수 있다. 한편, Der Neue Merker는 온라인 버전도 있다. 2007년 3월부터 인터넷을 통해 운영되고 있다. 현재 1주일에 약 1만명의 히트(방문)가 있다고 한다. 독일어로 되어 있지만 오페라에 대한 포탈로서 귀중한 역할을 하고 있다.

 

Der Neue Merker 2009. 12월호  독일어의 Merker는 감시자라는 뜻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