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비엔나 오페라극장

[참고자료] 영원한 마에스트로 요셉 크립스

정준극 2010. 1. 8. 10:07

[참고자료 2]

영원한 마에스트로 요셉 크립스

전후 최초의 빈필 지휘자, 비엔나 모차르트 앙상블 창설

 

요셉 크립스

 

슈타츠오퍼는 2009년으로 설립 140주년을 기념하였다. 그 오랜 기간동안 수많은 지휘자들이 슈타츠오퍼를 이끌어 갔지만 그 중에서도 1950년대에 활동한 요셉 크립스는 잊지 못할 인물이다. 요셉 크립스는 비엔나 모차르트-앙상블을 설립하여 슈타츠오퍼의 명성을 더욱 드높인 사람이다. 그의 음악은 진정한 비엔나 스타일이었다. 그가 남긴 레코드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요셉 크립스가 지휘한 베토벤의 교향곡집


크립스는 1902년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바이올린을 공부한 그는 지휘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당시 폭스오퍼의 지휘자인 펠릭스 봐인가르트너(Felix Weingartner)의 문하에 들어갔다. 그는 폭스오퍼에서 봐인가르트너의 조수 겸 연습지휘자(Repetiteur)로서 경험을 쌓았다. 지휘자로서의 자질을 갖춘 그는 폭스오퍼를 떠나 독일의 몇 곳에서 지휘자로 활동하였다. 칼스루에에서 1926-33년간 지휘자로 지낸 그는 1933년 비엔나로 돌아와 폭스오퍼의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그는 1935-38년 기간에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정규 지휘자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피아노 앞의 요셉 크립스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자 크립스는 유태계라는 이유로 오스트리아를 떠나야 했다. 크립스는 로마 가톨릭이었지만 그의 아버지가 유태인이어서 모든 음악 활동에서 배제되었다. 크립스는 유고슬라비아의 베오그라드로 자리를 옮겨 1년 쯤을 베오그라드오페라의 지휘자로 활동했다. 하지만 유고슬라비아가 2차 대전에 참여하게 되자 나치의 눈초리 때문에 지휘자의 자리에서 떠나야 했다. 크립스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어떤 식품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그 자리도 크립스의 재능을 아끼는 친구들이 겨우 주선해서 마련한 자리였다. 그렇지 않으면 나치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갈 운명이었다. 크립스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비엔나로 돌아왔다. 그는 나치정권에서 활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지휘할수 있었다. 크립스는 전후(戰後) 처음으로 슈타츠오퍼와 빈필과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이끈 지휘자였다. 그는 이때에 모차르트 앙상블을 창설하였다.

 

요셉 크립스


1950년부터 54년까지는 런던교향악단의 수석지휘자로 활약했다. 그 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버팔로교향악단(1955-62), 샌프란시스코교향악단(1963-70)이 상임지휘자가 되었으며 1970년에는 베를린의 도이치오퍼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그리고 1973년에는 비엔나교향악단(빈필)의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크립스는 1974년 향년 72세로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동생인 헨리 크립스는 일찍이 호주로 이주하여 1949년부터 1972년까지 무려 23년이라는 기록적인 기간을 아델레이드교향악단 수석지휘자로 활동했다. 크립스는 수많은 음반을 취입했지만 그 중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1957년 Symphony of the Air라는 교향악단과 함께 아르투로 루빈슈타인이 연주하는 베토벤의 피아노협주곡 전5곡을 취입한 것이다. 또 하나 음악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1960년에 에베레스트 레코드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전 9편을 취입한 것이다. 특히 교향곡 9번은 런던교향악단이 연주한 것으로 솔리스트들은 소프라노에 제니퍼 바비바이언(Jenifer Vyvyan), 메조소프라노에 셜리 베레트(Shirley Verrett), 테너에 루돌프 페트락(Rudolf Petrak), 바리톤에 도날드 벨(Donald Bell)이었다.

 

슈타츠오퍼의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