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세기의 모차르트

모차르트의 부인 콘스탄체(Constanze) - 1

정준극 2010. 1. 20. 22:35

모차르트의 부인 콘스탄체(Constanze) - 1

20세에 모차르트와 결혼. 6명의 자녀 출산

 

여기에서 잠시 모차르트의 가족 이름들을 확인해 보자. 모두 모차르트의 생애와 작품에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끼친 사람들이다.

 

- 레오폴드 모차르트: 모차르트의 아버지(바이올리니스트, 작곡도 하였음. 잘츠부르크 대주교궁 오케스트라 단원)

- 안나 마리아 모차르트: 모차르트의 어머니(결혼전 이름은 안나 마리아 페르틀)

- 마리아 안나 모차르트(난네를): 모차르트의 누이(피아니스트)

- 콘스탄체 모차르트: 모차르트의 부인(결혼전 이름은 콘스탄체 베버)

- 칼 토마스 모차르트: 모차르트의 아들(차남. 공무원으로 이탈리아에서 근무함)

-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 모차르트의 아들(4남)(작곡가, 피아니스트, 음악교사)

- 플리도른 베버: 모차르트의 장인(셋째 딸 콘스탄체가 모차르트와 결혼하기 전에 사망)(성악가)

- 세실리아 베버: 모차르트의 장모(만하임에서 살다가 비엔나에 와서 하숙집을 경영함)

- 알로이지아 베버: 모차르트의 처형(모차르트가 처음에 청혼했던 여인) (소프라노)

- 게오르그 니쎈: 모차르트의 사후 콘스탄체가 재혼한 사람. 덴마크인(외교관, 음악사학자)

- 요셉 랑게: 모차르트의 큰 동서(알로이지아의 남편) (배우 겸 아마추어 화가)

- 요제파 베버: 모차르트의 처형(소프라노)

- 조피 베버: 모차르트의 처제(소프라노)

- 야콥 하이벨: 조피 베버의 남편(작곡가, 테너, 배우)

- 제노베바 베버: 콘스탄체의 숙모. 칼 마리아 폰 베버의 어머니(성악가)

 

모차르트의 부인인 콘스탄체는 어찌된 일인지 소크라테스의 부인 크산티페(Xanthippe), 톨스토이의 부인 소피아(Sophia)와 함께 세계3대 악처(Xanthippe)로 손꼽히고 있다. 아마 모차르트가 돈을 벌어오지 못한다고 심하게 바가지를 긁으며 못살게 구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며 더구나 모차르트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서 그야말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판에 못살겠다고 하면서 가출했기 때문인듯 싶다. 그래서 결국 모차르트는 사치와 허영에 물든 콘스탄체 때문에 단명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다. 정말 그럴까? 정말 콘스탄체는 악처였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후세 음악사학자들의 주장은 콘스탄체가 악처로 오해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콘스탄체가 어떤 사람인지 조사해보자. 원래 모차르트의 아버지인 레오폴드는 아들 모차르트가 콘스탄체와 결혼하겠다고 연락하자 심하게 반대했다. 지금이 결혼할 때냐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그렇게 말을 잘 듣던 모차르트였지만 결혼 문제에 있어서만은 아버지의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고 마음에 작정한 대로 비엔나에서 아버지의 축복을 받지 못한채 콘스탄체와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모차르트는 나중에 그런 아버지 레오폴드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의 충고를 듣지 않았던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했다고 한다. 콘스탄체에 대한 얘기는 해도 해도 끝이 없을 정도로 많지만 그럴수는 없으므로 여기서는 모차르트 연구자들에게 참고가 될 일반적인 사항들만 정리코자 한다. 다만, 한기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콘스탄체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쁜 여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평범한 여자였다. 평범하지 않은 것은 오히려 모차르트였다. 그 때문에 콘스탄체로서도 모차르트와 9년동안 살면서 속깨나 썩으며 지냈을 것이다. 두루두루 설명할 형편이 아니므로 생략한다.

 

모차르트의 부인 콘스탄체

 

콘스탄체는 1762년 1월 5일 독일의 첼 임 뷔젠탈(Zell im Wiesental)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1842년 잘츠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콘스탄체는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후 무려 51년을 더 살았다. 모차르트는 35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콘스탄체는 꼭 80살까지 살다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콘스탄체는 20세 때에 모차르트와 비엔나에서 결혼했다. 모차르트와는 여섯 살 차이였으므로 당시 신랑 모차르트는 26세였다. 두 사람은 결혼생활 9년 동안에 슬하에 4남2녀를 두었으나 4자녀가 어릴 때 일찍 세상을 떠났고 아들 둘만 오래 살았다. 우리는 ‘아니, 모차르트에게 아들들이 남아 있었다고? 그럼 도대체 그 사람들의 후손들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라며 의아해 할 것이다. 하지만 모차르트의 후손들은 아무도 없다. 두 아들은 모두 상팔자여서 무자식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콘스탄체는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정말로 자주 임신했다. 그러다보니 거동도 불편하여 방에만 박혀 있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잦은 출산으로 인하여 몸이 무척 허약해 있었다. 병치레가 많았지만 모차르트는 별로 살뜰하게 관심을 기울여 주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넉넉치 못한 살림이었기 때문에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제대로 먹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 모차르트는 아내 콘스탄체가 임신으로 몸이 무거운 것을 기화로 친구들과 함께 밤이면 밤마다 술이나 마시며 놀러 다녔다는 얘기도 있다.

 

- 장남 라이문트 레오폴드(Raimund Leopold): 1783년 6월에 태어나 두달 후인 8월에 세상을 떠남

- 차남 칼 토마스 모차르트(Karl Thomas Mozart): 1784년에 태어나 1858년 향년 74세로 세상을 떠남. 공무원이 되어 나폴리총독궁에서 근무하였음. 사실상 모차르트의 장남임.

- 3남 요한 토마스 레오폴드(Johann Thomas Leopold): 1786년 10월에 태어나서 11월에 사망함

- 장녀 테레지아 콘스탄치아 아델하이트 프리데리케 마리아 안나(Thersia Constanzia Adelheid Maria Anna): 1787년 12월에 태어나 이듬해인 1788년 6월에 사망함

- 차녀 안나 마리아(Anna Maria): 1789년 12월 25일에 사산함

- 4남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Franz Xaver Wolfgang Mozart): 1791년 아버지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비엔나에서 태어났음. 음악적 재능이 있어서 작곡도 하였음. 아버지의 고향인 잘츠부르크로 가서 음악교사를 지내다가 1844년에 53세로 세상을 떠남. 유일하게 생존한 형 칼 토마스와는 7살 차이임.

 

모차르트와 콘스탄체 사이에서 태어난 여섯 자녀중 유일하게 생존한 칼과 프란츠의 어린 시절

 

짐작하는대로 모차르트는 1791년에 죽으면서 빚을 많이 남겨 놓았다. 결국 콘스탄체만 곤란하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콘스탄체의 사업능력이 빛을 발휘하지 않을수 없었다. 콘스탄체는 비엔나에 와서 어머니와 함께 하숙집을 운영하였으므로 세상물정에 대하여 어느정도 숙달해 있었다. 콘스탄체는 정부로부터 남편 모차르트의 연금을 받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평소에 모차르트를 후원해 주었으며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자 장례식까지 도맡아 치루어준 고트프리트 반 슈비텐 남작을 통하여 레오폴드 황제를 알현하여 황제로부터 연금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모차르트는 한 때 궁정악단에서 일했기 때문에 공무원으로 간주하여 연금을 받아낼수 있었다. 반 슈비텐 남작은 모차르트의 추모음악회를 주선하여 주었다. 콘스탄체는 추모음악회를 통하여 상당액의 수입을 보았다. 쉬카네더도 뷔덴극장에서의 하루치 공연을 콘스탄체를 위해 마련하여 입장료 전액을 전달한 일이 있다. 콘스탄체는 남편 모차르트의 유고들을 출판하는 사업을 펼쳤다. 그리하여 빚도 갚고 생활도 여유있게 되었다. 콘스탄체는 어린 아들 칼과 프란츠를 프라하로 보내 공부하게 했다. 프라하대학교의 철학교수를 지낸 사람으로서 모차르트와 친분이 두터운 프란츠 사버 니메체크(Franz Xaver Niemetschek: 1766-1849)의 집에 보내 교육을 받도록 했던 것이다. 칼 토마스는 1794년에 니메체크의 집에 가서 3년 동안 살았으며 동생 프란츠 사버는 1795년에 가서 6개월 동안 살다가 돌아왔다. 니메체크는 아버지 없는 두 아이의 대부 역할을 하였다. 콘스탄체는 니메체크와 협동하여 처음으로 모차르트의 자서전을 작성하기도 했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지 6년후인 1797년, 35세의 젊은 미망인인 콘스탄체는 게오르그 니콜라우스 폰 니쎈(Georg Nikolaus von Nissen)이라는 덴마크 외교관 겸 작가를 만났다. 니쎈은 콘스탄체의 집에 세를 들고 살았었다. 그러다가 서로 뜻이 맞아서 1798년 9월부터 아예 동거하기 시작했고 결혼식은 한참후인 1809년에 올렸다. 니쎈은 비엔나에서의 근무가 끝나 코펜하겐으로 돌아가게 되자 콘스탄체도 함께 데리고 갔다. 콘스탄체는 1810년부터 1820년까지 10년동안 코펜하겐에서 살았다. 그러면서 새남편인 니쎈과 함께 여행을 자주 다녔다. 주로 독일과 이탈리아를 방문하였다. 그런후 뜻한바 있어서 1824년부터 잘츠부르크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 다행하게도 니쎈은 사람이 착실하였고 무슨 일을 하던지 열심이었다. 니쎈은 콘스탄체에게 모차르트의 자서전을 함께 쓰자고 제안하였다. 콘스탄체로서는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었다. 그리하여 1828년 콘스탄체는 니쎈과 공동으로 ‘모차르트 자서전’을 집필하고 발간하였다. 불행하게도 니쎈은 1826년에 모차르트의 자서전이 출판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콘스탄체는 두 번째 남편인 니쎈이 세상을 떠난후 언니 알로이지아(Aloysia)와 동생 조피(Sophie)를 잘츠부르크로 불러 함께 살면서 말년을 보냈다. 두 여자도 모두 남편을 여의고 혼자 몸이었기 때문에 콘스탄체가 잘츠부르크에 와서 함께 살자고 하자 두말하지 않고 왔던 것이다. 콘스탄체는 잘츠부르크에서 1842년에 세상을 떠났다. 첫번째 남편인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지 51년 후였으며 두번째 남편인 니쎈이 세상을 떠난지 16년 후였다. 이렇듯 콘스탄체의 생애를 소개하였지만 너무 간단한 것 같아서 아쉬움이 있다. 그리하여 기왕에 조금 더 덧붙이는 바이니 당부컨대 [모차르트의 부인 콘스탄체 - 2]를 기대하시라.

 

잘츠부르크에 있는 콘스탄체의 묘비(가운데). 옆의 묘비는 난네를의 딸 자네트, 콘스탄체의 숙모인 제노베바 베버(칼 마리아 폰 베버의 어머니),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드 모차르트, 레오폴드의 장모인 유프로시나 페르틀의 묘비이다. 이상하게 모인 묘지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