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세기의 모차르트

모차르트의 부인 콘스탄체 - 2

정준극 2010. 1. 20. 22:36

모차르트의 부인 콘스탄체 - 2

칼 마리아 폰 베버와 사촌간. 모차르트 사후 덴마크 사람과 재혼

 

모차르트의 부인 콘스탄체

 

콘스탄체의 아버지, 즉 모차르트의 장인인 프리돌린 베버(Fridolin Weber)는 성악가로서 베이스였으나 오페라 성악가로서 활동은 제대로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대신에 독일의 이곳저곳 극장에서 공연이 있으면 무대 아래에 숨어서 출연배우에게 대사를 일러주는 프롬프터를 했고 또한 악보를 베끼는 사보가로 일했다. 프리돌린 베버에게는 이복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그 이복동생의 아들이 오페라 ‘마탄의 사수’로 유명한 작곡가 칼 마리아 폰 베버(Carl Maria von Weber)이다. 그러므로 콘스탄체와 칼 마리아 폰 베버는 4촌간이 되며 베버는 모차르트의 사촌처남이 된다. 프리돌린 베버는 딸만 넷을 두었다. 요제파(1758-1819), 알로이지아(1760-1839),  콘스탄체(1762-1842), 조피(1763-1846)이다. 그런데 모두 음악적인 재능이 있어서 소프라노들이었다. 모차르트와 결혼한 콘스탄체도 사실은 목소리가 좋고 음악적 센스가 풍부한 아가씨였다. 하지만 다른 자매들 처럼 적극적으로 성악활동을 하지는 않아서 무대에 등장하지는 않았다. 반면에 큰 언니 요제파(Josepha)는 나중에 요세파 호퍼(Josepha Hofer)라는 예명으로 '마술피리'의 역사적인 초연에서 '밤의 여왕'을 맡는 등 대단한 활동을 했다. 그런가하면 바로 위의 언니인 알로이지아는 ‘여자는 다 그래’에서 휘오르딜리지를 맡는 등 모차르트의 오페라에 출연하여 이름을 떨쳤다. 콘스탄체의 어머니, 즉 모차르트의 장모는 독일 만하임이 고향이었다. 그래서 콘스탄체는 어린 시절을 주로 만하임에서 보냈다. 당시 만하임은 독일뿐 아니라 유럽에서 음악의 중심지였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와 콘스탄체

 

모차르트는 1777년 21세의 청년일 때인 어머니와 함께 취직을 겸한 연주차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만하임에도 들른 일이 있다. 당시에 프리돌린 베버는 가족과 함께 만하임에서 살고 있었다. 모차르트는 어떤 아는 사람의 소개로 프리돌린 베버의 가족들을 자주 만나며 지냈다. 그러다가 모차르트는 프리돌린 베버의 둘째 딸인 알로이지아를 사랑하게 되었다. 당시 콘스탄체는 15세의 소녀였으므로 모차르트로서 크게 관심 둘 형편이 아니었다. 모차르트는 나중에 좋은 직장을 구하게 되면 그때 알로이지아에게 청혼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서로 변치 말자는 다짐만을 한 후에 파리로 떠났다. 그러다가 알로이지아는 뮌헨에서 일자리를 구했기 때문에 가족들과 함께 뮌헨에 가서 지내게 되었다. 모차르트는 파리를 떠나 잘츠부르크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정 뮌헨에 들려 알로이지아에게 큰 마음 먹고서 청혼하였다. 그러나 알로이지아는 그동안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는지 또는 모차르트를 별볼일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하여튼 모차르트의 청혼을 거절하였다. 만일 그때 알로이지아가 모차르트의 청혼을 받아 들였다면 아마 모차르트의 삶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며 더 많은 오페라를 남겼을지도 모르고 알로이지아라는 이름도 만고에 길이 기억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운명의 신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알로이지아와의 결혼을 유보시키고(실은 모차르트의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가 있어서) 나중에 비엔나에서 알로이지아의 동생인 콘스탄체와 부부로 엮어 주었고 이어 결혼 10년만에 콘스탄체를 과부로 만들어 주었다.

 

모차르트가 비엔나에서 콘스탄체를 만나게 된 것은 1779년 뮌헨에서 오페라에 출연하고 있던 알로이지아가 하필이면 비엔나에서 일자리가 생겨 가족들과 함께 비엔나로 와서 살았기 때문이었다. 콘스탄체의 아버지인 프리돌린 베버는 비엔나에 온 해에 뜻밖에 세상을 떠났다. 콘스탄체의 가족들이 비엔나에 와서 살기 시작한 때로부터 2년 후인 1781년에 모차르트도 아예 잘츠부르크를 떠나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해, 즉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비엔나로 왔다. 그때 알로이지아는 이미 요셉 랑게(Joseph Lange)라는 사람과 결혼한 후였다. 요셉 랑게는 미망인이 된 장모 세실리아 베버(Cäcilia Weber)에게 해마다 일정액의 생활비를 주기로 약속했다. 세실리아는 먹고 살기 위해 그동안 조금 모아 놓았던 재산을 정리하여 지금의 비엔나 제1구 페터스키르헤(성베드로교회) 뒤편 암 페터(Am Peter) 11번지(현재의 밀르흐가쎄 1번지)의 2층에서 하숙을 치기 시작했다. 당시 베버부인이 딸들과 함께 살면서 경영하던 하숙집의 이름은 Zum Augen Gottes(신의 눈의 집)이었다.

 

비엔나 1구의 밀르흐가쎄. 오른편 건물이 밀르흐가쎄 1번지로서 모차르트가 잠시 하숙을 하던 집이며  원안의 명판은 모차르트가 '후궁에서의 도주'를 작곡한 집이라는 기념 명판이다. 가운데의 비교적 허연 건물이 페터스키르헤의 뒤편이다.

 

1781년 3월 16일 비엔나에 도착한 모차르트는 마땅한 숙소가 없어서 잘츠부르크 콜로레도(Colloredo)대주교의 비엔나 저택에서 하인들이 머무는 방에 잠시 거처했다. 그 저택은 콜로레도 대주교의 비엔나 저택이기도 했지만 그의 마사(馬舍)로 사용하던 건물이 붙어었다고 한다. 지금의 슈테판성당 뒤편 독일기사단 박물관이 있는 건물이다. 그곳에 가면 모차르트가 잠시 거처했다는 기념명판이 붙어 있다. 콜로레도 대주교는 말하자면 모차르트의 주인이었다. 음악을 좋아했지만 고집에 세고 남들을 얕잡아 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그에게 종속되는 것이 싫어서 잘츠부르크의 직분에 사표를 내던지고 비엔나로 온 것이다. 그러므로 콜로레도 대주교와는 껄끄러운 사이이다. 모차르트는 그런 사람의 집에 머물고 있는 것이 싫었다. 더구나 하인들과 함께 방을 써야 했으므로 자존심이 상하였다. 당시에 모차르트는 귀족사회에서 상당히 이름이 알려져 있는 형편이었다. 하기야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앞에서도 연주를 하고 칭찬을 받은 모차르트가 아니던가! 모차르트는 하숙집을 구하기로 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콜로레도 대주교가 모차르트가 자기 집에서 기숙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내쫓으라고 지시했을지도 모른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묘하여서 모차르트는 어찌어찌 수소문하여 전에 만하임에서 한때 사랑을 약속했던 알로이지아의 가족들을 만나게 되었고 더구나 알로이지아의 어머니인 세실리아 여사가 하숙집을 경영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모차르트가 하숙생의 신분으로 당장 그 집으로 옮긴 것은 당연한 결정이었다. 모차르트는 전에 청혼했다가 미역국을 먹은 알로이지아의 집에 하숙을 정하는 것이 쑥스러워서 단 1주일동안만 있다가 새로 집을 구해서 나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알로이지아의 여동생들이 하도 곰살궂게 대하는 바람에 워낙 여자를 좋아하는 모차르트로서는 한집에서 말같은 처녀들 두사람과 함께 지내게 되니 미상불 기분이 좋아서 계속 눌러 있게 되었다.

 

비엔나 중심지역 페터스키르헤(베드로교회) 뒤편에 있는 밀르흐가쎄 1번지의 모차르트 기념명판. 이 집에서 '후궁에서의 도주'를 작곡했다고 되어 있다. 모차르트가 하숙을 하던 세실리아 베버의 집이다.

 

모차르트는 베버씨의 미망인 집에 하숙하면서 요셉2세 황제의 부탁을 받아 저 유명한 오페라 ‘후궁에서의 도주’를 작곡했다. 현재 페터스키르헤 뒤편의 밀르흐가쎄 1번지 집에는 모차르트가 이곳에 머물면서 ‘후궁에서의 도주’를 작곡했다는 내용의 기념명판이 붙어 있다. 모차르트는 그 집에 하숙하고 있으면서 셋째딸 콘스탄체와 특별히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콘스탄체는 어느덧 방년 열아홉의 사랑스러운 처녀가 되어 있었다. 모차르트는 1781년 9월, 콘스탄체에게 청혼하였다. 콘스탄체의 어머니인 세실리아 베버 여사는 하숙생인 모차르트와 셋째 딸 콘스탄체가 상당히 가깝게 지내는 것을 알고는 한 집에서 지내게 하면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모차르트에게 나가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모차르트는 인근 암 그라벤(Am Graben)에 있는 어떤 집의 3층에 방을 얻어 옮겼다. 지금의 콜마르크트 1번지 율리우스 마이늘(Julius Meinl)이 들어와 있는 건물이라고 한다. 하숙을 하던 집에서 걸어가면 1분밖에 안 걸리는 곳의 건물이었다. 얼마후 모차르트가 콘스탄체에게 정식으로 청혼하자 콘스탄체의 어머니는 장차 사위가 될 모차르트가 황제와 잘 알고 지내며 돈을 많이 벌것 같아서 눈물을 글썽이며 청혼을 수락하였다.

 

결혼식은 1782년 8월 4일 슈테판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슈테판성당의 캐서린채플 입구 벽면에는 이곳이 모차르트와 콘스탄체가 모년모월모일에 혼배성사를 가진 곳이라는 기념명판이 부착되어 있다. 청혼한지 거의 1년후에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지만 그동안 두 사람 사이에 우여곡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782년 4월에는 완전히 파혼단계에까지 들어간 일이 있다. 이유는 단순한 질투심 때문이었다. 어떤 파티에서 재미난 게임을 하는 중에 콘스탄체가 져서 어떤 젊은이에게 자기의 히프의 사이즈를 재도록 하는 벌을 받았는데 이 모습을 본 모차르트가 질투의 화신이 되어 파혼하자고 나서는 바람에 콘스탄체도 ‘좋다! 허이구! 누가 겁나는 줄 알고!’라고 하여 법적인 파혼직전까지 간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늘이 낸 천재 작곡가인 모차르트도 한 질투 하는 것을 보면 우습기도 하다.

 

슈테판성당의 성캐서린채플. 모차르트와 콘스탄체가 결혼미사를 올린 장소로서 기억되고 있다.

                                 

모차르트는 콘스탄체와의 결혼에 대하여 아버지 레오폴드의 허락을 받지 못해서 애를 먹었다. 아버지 레오폴드는 ‘청운의 뜻을 품고 비엔나에 갔으면 훌륭한 작곡가로서 입신양명하는 일에나 전력투구할 것이지 그런 일은 하지 않고 여자 꽁무니나 졸졸 쫓아다니다가 급기야 기껏 하숙집 딸과 결혼하겠다고 야단이니 정말로 내가 자식 하나는 잘못 가르쳤다. 아이고!’라며 모차르트를 꾸짖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는 끝내 콘스탄체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계약서에는 콘스탄체가 신랑 모차르트에게 500굴덴의 지참금을 준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모차르트가 너무 적다고 불만을 터트리는 바람에 나중에 1000굴덴을 주기로 약속했다. 또한 결혼계약서에는 어느 한쪽이 먼저 죽으면 생존한 사람이 모든 재산을 차지한다는 조항도 있었다. 아무튼 그리하여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리고 꼭 9년을 함께 살면서 여섯 자녀를 생산했으나 살아남은 자녀는 칼 토마스와 프란츠 사버의 두명 뿐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콘스탄체는 원래 집안 내력이 그래서인지 역시 음악적 재능이 많았다. 아버지는 베이스였으며 큰언니, 둘째 언니, 그리고 동생까지 모두 소프라노로서 활동했다. 특히 둘째 언니인 알로이지아는 국제적으로 알려진 오페라 소프라노였으므로 콘스탄체도 그 영향을 받아 성악가가 되려고 마음 먹었던 일이 있었다. 모차르트도 콘스탄체가 노래를 잘 부를 것으로 생각하고 특별히 콘스탄체를 위한 음악도 작곡했다. 예를 들면, 유명한 C단조 미사(Mass in C Minor)의 소프라노 아리아(라우다 무스테)는 콘스탄체를 위해 작곡한 것이다. 실제로 콘스탄체는 결혼 후인 1783년 잘츠부르크에서 C단조 미사가 초연될 때에 소프라노 솔로를 맡았다. 모차르트는 키리에(Kyrie) 파트의 Christe eleison과 아리아인 Et incarnatus est를 콘스탄체와 협의하여 작곡했다고 한다. 콘스탄체는 모차르트로 인하여 음악사에 길이 남는 여인이 되었다.

 

콘스탄체는 바로크 음악, 특히 대위법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콘스탄체와 아직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비엔나의 유명한 음악애호가인 고트프리트 반 슈비텐(Gottfried van Swieten)남작을 매주 일요일 방문했다. 슈비텐남작은 바흐와 헨델의 오리지널 악보를 상당히 많이 소장하고 있었다. 슈비텐남작은 모차르트에게 바흐와 헨델의 악보들을 보여주고 어떤 곡들인지 정리하여 달라고 부탁했다. 모차르트는 그 악보들을 보고 놀람과 함께 감격스러워했다. 바흐와 헨델은 모차르트가 대단히 존경하는 인물들이기 때문이었다. 모차르트는 처음 보는 악보들을 한번씩 피아노로 연주하여 어떤 곡인지 선을 보이고 이어 악보들을 집으로 가져와 참고했다. 콘스탄체도 바흐와 헨델의 대위법 작품들을 보고 크게 감동했다. 그리하여 콘스탄체는 모차르트에게 ‘자기 말야, 자기도 바흐나 헨델처럼 바로크 음악을 한번 작곡해 봐! 응?’이라고 격려하였다. 모차르트의 ‘환타지와 후가’(K384)는 이렇게 하여 나오게 되었다. 바로크음악은 훗날 모차르트의 종교음악, 특히 C단조 미사와 진혼곡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교향곡 41번의 제1악장, 오페라 ‘마술피리’의 내용 중에도 바로크의 대위법이 사용되었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와 콘스탄체가 결혼전에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콘스탄체에 대한 잘못된 평가]

그로우브 음악 및 음악가사전(Grove Dictionary of Music and Musicians)이라는 것이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전이다. 이 사전에 의하면 20세기 초의 음악학자들은 콘스탄체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불공평하게 비난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콘스탄체가 무식하며 천재 작곡가의 부인으로서 아무런 음악적 소양이 없고 심지어 성실하지도 않아 남편을 두고 바람을 피우기까지 했으므로 세계가 존경하는 위대한 작곡가의 부인으로서 가치가 없는 여자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콘스탄체를 소크라테스의 부인과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악처의 반열에 올려 놓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러한 평가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들이다. 아마도 무조건적인 여성비하 사상 때문에 생겨난 평가가 아닌가 싶다. 아무튼 근자의 일부 학자들은 콘스탄체에 대한 평가가 불공정하다는 데에 입을 모으고 있다. 브라운베렌스(Braunbehrens: 1990), 솔로몬(1995), 할리웰(Halliwell: 1998)과 같은 음악학자들이 그러한 의견을 내세웠다.

 

[말년의 콘스탄체 사진소동]

콘스탄체가 세상을 떠나기 2년전인 1840년에 찍었다는 사진이 나타나 논란이 된 일이 있다. 당시로서 그런 사진을 찍을수 있는 기술이 있을수 없는데 그런 사진이 남아 있다니 과연 진짜 콘스탄체를 찍은 것인지 아닌지 알수 없다는 논란이었다. 사진은 콘스탄체가 바바리아의 작곡가인 막스 켈러(Max Keller)의 가족들과 함께 찍은 것으로 앞줄 맨 왼쪽에 앉아 있는 사람이 콘스탄체라는 것이다. 콘스탄체의 바로 옆은 막스 켈러이며 오른쪽에 앉아 있는 여자가 막스 켈러의 부인인 요제파(Josefa)라고 한다. 그리고 뒷줄의 사람들은 하인들과 막스 켈러의 딸인 루이제와 요제파라는 것이다. 1840년에 찍었다는 이 사진은 2004년 바바리아의 국립알퇴팅(Altötting)문서보관서에서 발견되었다. 세계의 음악계, 특히 모차르트를 연구하는 수많은 단체에서는 콘스탄체의 사진이 발견되었다고 하자 놀라움으로 흥분하였다. 비록 막스 켈러의 가족들과 찍은 것이며 콘스탄체가 노년이었지만 모차르트의 부인이었지 않은가? 그런데 그로우브사전의 편집자들은 사진에 있는 여인이 당시 78세인 콘스탄체라고 주장했지만 일부 학자들은 당시 그만한 사진기술이 없었으며 더구나 당시 콘스탄체는 퇴행성관절염 때문에 잘츠부르크에서 바바리아까지 여행가는 것이 대단히 어려웠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의아해 했다. 결국 사진에 대한 신빙성이 없다는 주장이었다.

 

막스 켈러와 그의 부인, 두 딸, 하녀 및 하인과 찍은 사진. 맨 왼쪽이 콘스탄체라는 것이다.

 

콘스탄체가 40세 때인 1802년과 78세 때인 1840년의 사진 비교. 왼쪽 그림은 잘츠부르크의 국제모차르테움재단이 제공한 것이고 오른쪽 사진은 바바리아의 국립서고에서 발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