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세기의 모차르트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드(Leopold)

정준극 2010. 1. 20. 22:43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드 모차르트

 

장난감교향곡, 트럼펫협주곡으로 유명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드 모차르트. 피에트로 안토니오 로렌조니 작품.

 

모차르트의 생애를 설명함에 있어서 아버지인 레오폴드를 언급하지 않을수 없다. 모차르트의 생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요한 게오르그 레오폴드 모차르트(Johann Georg Leopold Mozart)는 1719년 11월 14일 독일의 아우그스부르크에서 태어나 1787년 5월 28일 잘츠부르크에서 향년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레오폴드는 기본적으로 작곡가, 지휘자, 음악교사, 바이올리니스였다. 레오폴드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아버지로서 어린 시절부터 그에게 음악을 가르친 인물로 기억되지만 또한 바이올린 교본인 Versuch einer gründlichen Violinschule(기초바이올린학습교본)으로도 유명하다.

 

 

2010년 프랑스 영화 '모차르트의 누이'의 한 장면. 아버지 레오폴드, 어머니 안나 마리아, 누이 난네를, 어린 볼프강 모차르트

 

레오폴드의 아버지, 즉 모차르트의 할아버지인 요한 게오르그 모차르트(1679-1736)는 아우그스부르크에서 책 제본업을 하던 사람이었다. 레오폴드는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안나 마리아 줄처(Anna Maria Sulzer: 1696-1766)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레오폴드는 어린 시절부터 교회 합창단원으로 활동했다. 레오폴드는 아우그스부르크의 예수회고등학교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학창시절에는 학교연극반에서 배우로 또한 성악가로 활동하였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그는 학생시절에 이미 바이올린과 오르간을 공부하여 훌륭한 연주자가 되었다. 한편 레오폴드는 과학에도 조예가 깊어서 현미경와 망원경을 직접 만들어 실험하기도 했다. 레오폴드의 부모들은 그런 그를 가톨릭 신부로 만들 생각이었다. 당시에나 지금이나 성직자는 힘들게 일하지 않고서도 먹고 사는데 걱정이 없었다. 하지만 신부가 되는 것은 결단코 레오폴드의 희망이 아니었다. 레오폴드는 잘츠부르크에 와서 베네딕트대학교에 들어가 철학과 법률을 공부했다. 당시 잘츠부르크는 신성로마제국에 속하여 있었지만 오스트리아와는 별도로 독립된 대주교 공국이었다. 레오폴드는 결국 평생을 잘츠부르크에서 보냈다.

 

 

레오폴드, 볼프강, 난네를의 연주장면. 1763년. 난네를은 노래부르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 난네를은 노래보다는 피아노를 연주했다.

 

 레오폴드는 1740년, 21세의 청년시절부터 전문 음악인으로서의 활동을 했다. 잘츠부르크에 있는 어떤 대학교의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일자리를 구했던 것이다. 레오폴드는 바로 그 해에 첫 작품인 여섯 개의 트리오 소나타(Ope 1)를 출판했다. Sonata sei da chiesa e da camera라는 타이틀의 곡이었다. 레오폴드는 이 악보집의 표지를 동판으로 만들고 직접 조각을 해서 넣었다. 이제는 작곡가가 되었다는 자부심 때문이었다. 이후로 그는 독일수난곡 칸타타 등 여러 편의 작품을 작곡했다. 레오폴드는 1743년에 잘츠부르크 대주교인 레오폴드 안톤 프라이헤르 폰 휘르미안(Leopold Anton Freiherr von Firmian)이 구성한 오케스트라의 제4 바이올리니스트로 임명되었다. 이와 함께 그는 잘츠부르크대성당 소년합창단원들에게 작곡과 바이올린, 피아노를 가르치는 역할도 맡았다. 레오폴드는 생활이 안정되자 결혼을 생각하였다. 레오폴드는 1747년 28세 때에 안나 마리아 페르틀과 결혼하였다. 두 사람은 슬하에 입곱 자녀를 생산하였지만 그 중에서 두 사람, 즉 마리아 안나(난네를)와 볼피(볼프강 아마데우스) 만이 생존하였다.

 

 

모차르트 가족의 저녁식사 기도. 영화 '모차르트의 누이'에서.

 

결혼 후 레오폴드는 오케스트라에서 지위가 높아져 제2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고 다시 몇 년 후에는 부음악감독이 되었다. 그 후로는 이상하게도 승진이 되지 않았다. 다른 동료들은 계속 승진하였고 어떤 사람은 음악감독까지 되었으나 레오폴드는 부음악감독으로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훗날 사람들은 혹시 레오폴드의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가졌다. 어떤 사람은 아들 모차르트의 음악이 유럽 전역에서 알아 줄 정도로 뛰어났기 때문에 자연히 아버지인 레오폴드는 모차르트의 그늘에 가려서 빛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주장도 했다. 하지만 레오폴드가 난네를과 볼프강을 어린 시절부터 음악공부를 단단히 시켰던 것만은 사실이다. 난네를은 레오폴드로부터 일곱 살 때부터 키보드를 배웠고 이제 걸음마를 뗀 볼프강도 아버지로부터 레슨을 받았다. 그리하여 ‘모차르트 가족 그랜드 투어’가 시작되었다.

 

 

레오폴드 모차르트가 작성한 바이올린교본의 표지. 동판장식은 레오폴드가 직접 제작한 것.

 

볼프강은 1781년에 잘츠부르크의 집을 떠나 비엔나로 갔다. 그로부터 레오폴드는 딸 난네를만 데리고 1783년까지 살았다. 난네를은 33세 때인 1783년 존넨부르크라는 사람과 결혼하였다. 난네를이 결혼을 늦게 한 이유 중의 하나는 레오폴드가 아내 안나 마리아도 없이, 아들 볼프강도 없이 혼자 지내기가 어려워서였다. 그 전에 난네를은 프란츠 디폴드라는 청년의 청혼을 받았으나 무슨 사연인지 결혼이 성사되지 않았다. 아마도 레오폴드가 딸마저 집을 나가면 하인과 둘이서 살아야 하는데 그것이 싫어서 딸의 결혼을 늦추었다는 얘기가 있다. 난네를은 결국 33세에 두 번이나 결혼했던 사람과 결혼했다. 존넨부르크라는 그 사람은 부유한 사람이었지만 전처들로부터 다섯 자녀를 두고 있었다. 난네를은 결혼하여서 전처들의 자녀들을 돌보아야 했다. 난네를은 결혼후 산크트 길겐(St Gilgen)이라는 마을로 가서 살게 되었다. 잘츠부르크로부터 마차로 6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트 생가(기념관)의 내부

 

레오폴드는 1787년 세상을 떠났다. 그 전에 1785년, 난네를은 첫 아이를 출산하기 위해 잘츠부르크의 아버지 집으로 왔다. 난네를은 아들을 낳았다. 기쁨에 넘친 레오폴드는 난네를의 아이를 레오폴드라고 부르도록 했다. 난네를은 장크트 길겐의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난네를은 아기와 함께 떠나면 아버지 레오폴드가 너무 외로워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들인 레오폴드를 아버지의 손에 맡기고 장크트 길겐으로 돌아갔다. 아버지 레오폴드는 2년 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어린 레오폴드를 정성으로 키웠다. 심지어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가르쳐서 훌륭한 음악가로 만들 계획까지 세웠다. 레오폴드는 어린 손자에게 밥을 먹는 법부터 화장실 가는 법까지 가르치며 아이가 ‘하비, 하비’(할아버지)하며 말하는 것을 보고 기뻐했다. 레오폴드는 외손자를 레오폴디(Leopoldi: Little Leopold)라고 불렀다. 그러나 레오폴드는 첫 외손자가 크는 것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트 생가 앞의 광장

 

모차르트와 관련하여 레오폴드는 모차르트가 비엔나로 가서 살겠다고 한것을 대단히 반대했다. 잘츠부르크에서도 할 일이 있는데 무엇하러 아비를 떠나 비엔나까지 가느냐는 얘기였다. 그래서 비엔나에 있는 모차르트에게 자주 편지를 보내어 어서 잘츠부르크로 돌아오라고 독촉했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로 돌아갈 뜻이 도무지 없었다. 이듬해인 1782년 모차르트가 콘스탄체와 결혼하겠다고 하자 레오폴드는 다시 한번 아버지로서 결혼을 극력 반대했다. 이제 겨우 명성을 얻으려고 하는 판에 결혼에 속박되면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차르트가 레오폴드의 허락이 없어도 결혼하겠다고 나섰으며 실제로 결혼식을 올려버리자 레오폴드도 어쩔수 없이 마지못해 나중에 승낙하였다. 모차르트는 콘스탄체와 함께 결혼 이듬해인 1783년 잘츠부르크를 인사차 찾아갔었다. 아마 모르면 몰라도 레오폴드와 콘스탄체의 만남은 서로 응어리가 져서 어색했을 것이다. 1785년에 이번에는 레오폴드가 모차르트를 만나기 위해 비엔나를 찾아갔다. 당시에 모차르트의 명성은 바엔나에서 가히 정상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레오폴드는 하이든이 모차르트의 현악4중주곡을 듣고 대단한 찬사를 보냈다는 얘기를 듣고 기분이 좋았다. 하이든은 레오폴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인간으로서 말하노니 당신의 아드님은 내가 알고 있는 작곡가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올시다.(이하 생략)”이라고 말했다. 레오폴드는 하이든의 찬사로 인하여 ‘그러면 그렇지 누구 아들인데!’라고 생각하며 우쭐하던 차에 콘스탄체를 보고 나서는 기분이 잡쳐서 화를 내고 그대로 잘츠부르크로 돌아갔다. 얘기에 의하면 콘스탄체는 시아버지인 레오폴드를 아주 무시하고 경멸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며칠 함께 지내게 되자 시아버지인 레오폴드에게 '밥만 축내는 사람'이라면서 구박했다고 한다. 레오폴드는 그때 비엔나에서 모차르트를 만나고 나서는 다시 얼굴을 보지 못했다.

 

 

잘츠부르크 구시가지 게트라이데가쎄에 있는 모차르트 생가

 

레오폴드는 난네를이 첫 아이를 낳자 맡아서 기르게 되었다. 이 때문에 하녀도 한사람 더 고용했다고 한다. 얼마후 비엔나의 모차르트가 아는 사람을 통하여 그 소식을 듣게 되었다. 모차르트는 당장 레오폴드에게 편지를 보내어 ‘저도 집사람인 콘스탄체와 함께 연주여행을 다니는 경우가 많아서 아이들이 걱정입니다마는 듣자오니 난네를 누이의 아들을 맡아서 길러 주신다고 하는군요. 그래서 부탁입니다마는 우리 아이 두명도 잘츠부르크로 보내겠사오니 맡아서 길러 주시면 참으로 감사하겠습니다’라고 부탁했다. 레오폴드는 그같은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한다. 몇 년후 레오폴드가 중병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었다. 비엔나에 있는 모차르트도 그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중병에 걸렸다고 하는데도 찾아가지 않았다.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트 생가의 방

 

레오폴드는 잘츠부르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부음악감독이라고 적혀 있다. 옆에 있는 묘비들은 난네를의 딸인 자네트 베르흐톨드 폰 존넨부르크, 콘스탄체의 숙모인 제노벨라 베버(Genovela Weber), 콘스탄체 모차르트 니쎈(며느리 콘스탄제), 레오폴드의 장모인 유프로시나 페르틀(Euphrosina Pertl)의 묘비가 있다. 레오폴드는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장난감 교향곡’이라고 하는 Cassation in G for Orchestra and Toys이다. 이 교향곡은 한때 하이든이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었다. 다른 작품은 유명한 트럼펫협주곡이다. 이 협주곡도 하이든이 작곡한 것으로 잘못 알려졌었다. 레오폴드가 하이든을 진정으로 존경했기 때문에 하이든에게 헌정한 것이 잘못 알려진 것이 아닌가라는 궁금증을 갖게 한다. 레오폴드는 자연적인 음향을 작품에 반영하기를 좋아했다. 사냥교향곡(Jagdsinfonie)에서는 사냥개를 부르는 소리, 사냥총을 쏘는 소리들을 넣었다. 농부의 결혼(Bauernhochzeit)에서는 민속악기인 백파이프(Bagpipes), 허디-거디(Hurdy-gurdy), 둘시머(Dulcimer), 휘파람소리, 피스톨 쏘는 소리 등이 등장한다.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트 생가에서 필자. 2001년 5월 31일. 현재는 모차르트 기념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