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세기의 모차르트

모차르트의 누이 마리아 안나(난네를)

정준극 2010. 1. 20. 22:46

모차르트의 누이 마리아 안나(난네를)

 

마리아 안나 모차르트(난네를). 1785년경.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형제자매로는 누이인 마리아 안나가 유일하다. 기왕에 얘기가 나온 김에 부연하자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형제자매는 모두 7명이었다. 아버지 요한 게오르크 레오폴드 모차르트와 어머니 안나 마리아 페르틀()은 결혼후 3남 4녀의 자녀를 두었지만 그중 5명이 일찍 세상을 떠났고 남은 형제자매는 두 사람으로서 우리의 모차르트와 그의 누이 마리아 안나이다. 모차르트에게 형제자매가 그렇게 많은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사실이 그랬다. 형제자매의 이름은 남자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요한 레오폴드 요아힘, 요한 칼 아마데우스이고 여자는 어머니인 안나 마리아의 이름이 그렇게도 좋아보였는지 모두 마리아 안나라는 이름을 가졌다. 그래서 큰 딸 마리아 안나(페르틀)을 비롯해서 마리아 크레세니시아 프란치스카 데 파울, 마리안 안나 코르둘라, 마리아 안나 네포무세나 봘푸르기스라는 이름들을 가졌다. 옛날에는 유아 사망율이 높아서 그저 가문을 이으려면 많이 낳고 그 중에서 요행히 장성한 자녀가 있으면 대를 잇게 했던 것이다. 큰 딸인 마리아 안나도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서 어린 시절에 모차르트와 함께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으며 아버지 레오폴드, 동생 볼프강과 함께 여러 나라에 연주여행을 다녔다. 마리아 안나의 풀 네임은 마리아 안나 봘부르가 이그나티아 모차르트(Maria Anna Walburga Ignatia Mozart)로서 1751년에 태어나 1829년 세상을 떠났으니 모차르트보다 5년 먼저 태어났고 모차르트보다 38년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마리아 안나라고 이름을 지은 것은 아마 어머니인 안나 마리아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한편, 어린 모차르트를 볼피(볼프강의 애칭)라고 불렀던 것과 마찬가지로 마리아 안나도 어린 시절엔 난네를(Nannerl)이라고 불렀다가 나중에 마리안네(Marianne)라고 불렀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난네를이라는 이름이 귀여워서 그런지 난네를이라는 이름을 붙인 상품들이 더러 있다. 예를 들면 과실주이다.]

 

어린 볼프강 모차르트(볼피)와 누이 마리아 안나 모차르트(난네를)

 

난네를은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레오폴드는 난네를에게 일곱살 때부터 하프시코드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난네를은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었다. 레오폴드는 '자, 신동이요, 신동!'이라면서 난네를과 모차르트를 데리고 비엔나, 파리 등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순방하며 연주회를 가졌다.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어린 난네를은 하프시코드와 피아노포르테(피아노)를 연주하여 바이올린을 연주한 모차르트보다 많은 연주료를 받았다. 그러나 당시 사회상에 비추어 여자의 신분으로서 전문적인 연주가로 생활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1769년, 18세가 되던 해부터는 더 이상 모차르트와 함께 연주여행을 다니지 못했다. 결혼적령기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그때 쯤해서 마리아 안나는 난네를이란 애칭보다는 마리안네라고 부르며 잘츠부르크에서 어머니와 함께 집안 살림을 했다. 특히 모차르트가 어머니와 함께 독일 만하임, 아우그스부르크, 파리를 여행할 때에는 아버지 레오폴드를 보살피기 위해 집에 남아 있어야 했다.

 

어린 시절의 난네를. 로렌조니 그림.

 

동생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말에 전적으로 복종하지 않았다.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 속박되어 있기가 싫어서 잘츠부르크의 콜로레도 대주교에게 사표를 내 던지고 더 넓은 세계인 비엔나로 갔다. 하지만 누이 마리안네는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여 잘츠부르크에 남아 있었다. 마리안네는 육군 대위이며 가정교사였던 프란츠 디폴드(Franz d'Ippold)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너무 성급하게 결정하지 말라'는 일종의 강요에 의해 그의 청혼을 거절하였다. 동생 모차르트는 누이에게 '누나야, 아버지의 강압적인 주장에 과감히 맞서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요'라고 응원을 보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마리안네는 지방 치안판사로서 부유한 요한 밥티스트 프란츠 폰 베르흐톨트 추 존넨부르크(Johann Baptist Franz von Berchtold zu Sonnenburg)라는 사람과 1783년 8월 23일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마리안네가 혼기를 훨씬 넘긴 33세 때였다. 존넨부르크라는 사람은 두 번이나 결혼한 일이 있으며 전처들에게서 다섯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마리안네는 그런 사람에게 시집을 갔던 것이다. 결혼후 마리안네는 잘츠부르크에서 동쪽으로 25km 떨어진 작은 마을인 장크트 길겐(St Gilgen)에 정착했다. 오늘날 보면 옆동네이지만 당시에는 마차를 타고 한참 가야하는 먼 거리였다. 마리안네는 존넨부르크와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다. 레오폴드 알로이스 판탈레온(1785-1840), 자네트(1789-1805), 마리아 바베트(Maria Babette: 1790-1791)였다. 그러나 딸 마리아 바베트는 태어난지 1년후에 세상을 떠났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해였다. 그래서 마리안네는 나중에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도 비엔나를 찾아가지 못했다.

 

난네를이 결혼해서 살았던 장크트 길겐. 그림같이 아름다운 곳이다.

 

마리안네의 첫 아들인 레오폴드는 할아버지인 레오폴드 모차르트가 기르다시피 했다. 마리안네는 1785년 첫 아이를 출산하기 위해 친정인 잘츠부르크 집으로 왔다. 아기가 태어났다. 레오폴드 모차르트는 할아버지가 되었다고 하면서 너무 기뻐서 손자의 이름을 자기 이름과 같은 레오폴드라고 지었다. 그리고 작은 레오폴드라는 의미에서 레오폴디(Leopoldi)라고 부르며 귀여워했다. 마리안네가 다시 시집인 장크트 길겐으로 돌아 갈때 마리안네는 어린 레오폴드를 할아버지 손에 맡기고 왔다. 마리안네의 건강이 여의치 않아 이미 집에 있는 다섯 아이들을 보살피는 것만 해도 벅차기 때문에 갓 태어난 아기를 할아버지 손에 맡기고 왔던 것이다. 게다가 할아버지 레오폴드가 손자 레오폴드를 너무 귀여워해서 차마 그냥 데리고 올수가 없어서 몇 달만 함께 데리고 있으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자 할아버지 레오폴드는 손자와 떨어지기 싫어서 아예 계속 기르겠다고 나섰다. 할아버지 레오폴드는 손자 레오폴드에게 아주 어릴 때부터 음악을 가르칠 생각이었다. 어린 레오폴드는 할아버지의 손에서 2년이나 보냈다. 그러다가 할아버지 레오폴드가 1785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엄마 품으로 다시 돌아왔다.

 

또 다른 모습의 마리아 안나 모차르트

 

모차르트는 어릴 때부터 누이 난네를(마리안네)과 무척 가깝게 지냈다. 어린 모차르트에게 있어서 난네를은 우상이나 마찬가지였다. 훗날 모차르트는 누이 마리안네를 위해 여러 편의 음악을 작곡했다. 예를 들면 전주곡과 푸가 C장조(K1782)이다. 또한 모차르트는 피아노협주곡을 작곡할 때마다 사본을 장크트 길겐에 사는 누이 마리안네에게 보내 품평을 받았다. 모차르트는 피아노협주곡 21번의 사본까지 보냈지만 그 이후에는 여러 가지로 정신이 없어서 보내지 않았다.

 

영화 '모차르트의 누이'의 한 장면. 난네를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볼프강이 바이올린을 연주한다.

 

마리안네는 1801년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잘츠부르크로 돌아왔다. 남편의 전처들에게서 태어난 다섯 아이 중에서 네 아이와 자기가 낳은 두 아이를 데리고 왔다. 일개 소대였다. 그때에는 잘츠부르크에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던 때였다. 마리안네는 죽은 남편으로부터 유산을 넉넉하게 받아 생활에는 어려움이 없었으나 음악생활을 계속하고 싶어서 학교의 음악교사로 일했다. 그러나 음악교사의 일도 나이가 들자 더 이상 하지 못했다. 노년에 접어든 마리안네는 잘츠부르크에서 동생 볼프강의 부인이었던 콘스탄체를 만났다. 콘스탄체는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이후 덴마크의 외교관 겸 음악사학자인 니쎈이라는 사람과 재혼하여 코펜하겐에 가서 살다가 남편이 은퇴하자 재혼한 남편과 함께 잘츠부르크에 와서 정착하였다. 마리안네가 콘스탄체를 처음 만난 것은 1783년이었다. 결혼한 모차르트가 콘스탄체와 함께 잘츠부르크를 찾아왔을때 잠시 만났을 뿐이며 그 이후에는 단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1820년에 콘스탄체가 남편 니쎈과 함께 잘츠부르크에 오는 바람에 우연히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마리안네는 그 이전까지만 해도 콘스탄체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모르고 지냈다. 실상 마리안네는 사랑하는 동생 모차르트가 죽은 이래 콘스탄체에 대하여 유감이 많았던 터였다. 그러므로 수십년만의 두 사람의 만남은 다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얼마후 마리안네는 콘스탄체의 남편 니쎈이 모차르트의 자서전을 만들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며 애쓰자 자기가 가지고 있던 서한등 모든 자료를 제공하고 자서전을 잘 만들어 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마리안네가 니쎈에세 제공한 자료 중에는 모차르트가 아버지 레오폴드와 1781년까지 주고 받았던 편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귀중한 자료였다.

 

잘츠캄머구트의 어떤 집 벽면에 설치된 모차르트의 어머니가 태어난 집을 기념하는 명판. 이 집에서 모차르트의 누이인 난네를도 살았다.

 

1821년 모차르트의 아들인 프란츠가 마리안네를 찾아왔다. 처음 만나보는 조카였다. 마리안네는 울컥 감격스러워서 프란츠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프란츠는 렘버그(Lemberg)에 살고 있었지만 서로 연락이 안되어 모르고 지냈었다. 프란츠가 잘츠부르크에 온 것은 얼마전에 세상을 떠난 계부 니쎈의 추모식에서 모차르트가 작곡한 진혼곡을 지휘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비로소 고모인 마리안네를 처음 만났던 것이다. 노년에 접어든 마리안네는 건강이 악화되어 운신하기도 힘들 정도가 되었다. 그러다가 세상을 떠나기 4년전부터는 눈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마리안네는 1829년 향년 78세로 숨을 거두었다. 마리안네가 세상을 떠나기 한두달 전에 메리 노벨로(Mary Novello)라는 학자가 마리안네를 마지막으로 방문하였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마리안네는 눈이 보이지 않아서인지 무척 기운이 없어 보였으며 아주 허약하여 말도 거의 없었다고 한다. 메리 노벨로는 마리안네가 생활이 곤궁하여서 삶에 지쳐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리안네는 무려 7,837굴덴이라는 거액을 유산으로 남겨 놓았다. 1829년 10월 29일 숨을 거둔 마리안네는 잘츠부르크의 장크트 페터(St Peter) 수도원교회의 묘역에 안장되었다.

 

소녀시절의 마리아 안나 모차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