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세기의 모차르트

모차르트의 처형 알로이지아(Aloysia)

정준극 2010. 1. 20. 22:47

모차르트가 처음에 청혼했던 알로이지아 베버

모차르트의 작품세계에서 중요한 역할

 

안드레-에르네스트-모데스트 그레트리(1750-1819)가 작곡한 오페라 '제미레와 아조르'(Zemire et Azor)에서 제미레역을 맡았던 알로이지아

                      

모차르트가 처음에 결혼하려고 청혼했던 여자가 알로이지아이다. 오페라 성악가로서 소프라노였다. 그때 알로이지아는 불과 17세의 아가씨였다. 알로이지아의 풀 네임은 마리아 알로이지아 루이제 안토니아 베버(Maria Aloysia Louise Antonia Weber)이다. 대략 1760년에 태어나 1839년 6월 8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장장 79세까지 살았던 여인이다. 아버지는 프리돌린 베버이며 어머니는 세실리아 베버이다. 알로이지아는 콘스탄체의 언니이다. 모차르트가 한때 결혼하려고 했던 여자였으며 아내 콘스탄체의 언니이기 때문에 모차르트의 생애에서 기억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모차르트가 알로이지아를 사모하여서 여러 작품을 썼으므로 그런 의미에서 알로이지아는 모차르트의 음악세계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다. 지면도 한정되어 있으므로 모차르트와 알로이지아의 사연은 뒤로 미루고 우선 모차르트가 알로이지아를 위해 어떤 곡들을 썼는지 살펴보자. 모차르트가 알로이지아를 처음 만난 곳은 만하임에서였다. 만하임에서 알로이지아를 만난후 불현듯 사랑하는 감정이 생겨서 다음의 두 곡을 알로이지아를 위해 작곡했다.

 

- 소프라노를 위한 레시타티브와 아리아 Alcandro, lo confesso(K294)

- 소프라노를 위한 레시타티브와 아리아 Popoli Di Tessaglia(K316). 이 아리아에서는 최고음을 G6까지 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기네스북에 고전음악에서 가장 고음을 내야하는 아리아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고보면 알로이지아는 대단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였던것 같다.

 

그후 모차르트가 비엔나에서 알로이지아를 만났을 때에는 알로이지아가 이미 요셉 랑게라는 사람과 결혼한 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는 알로이지아를 생각하여서 여러 곡을 작곡했다.

 

- 소프라노를 위한 아리아 Nehmt meinen Dank, ihr holden Gönner!(K383: 감사를 받으소서, 거룩한 후원자시여)

- 세나(극적 독창곡: Scena)와 론도 Mia speranza adorata - Ah, non sai, qual pena(K416). 이곡은 1783년 1월 8일 작곡되었고 1월 11일 멜그루베(Mehgrube)의 연주회에서 알로이지아가 처음으로 노래를 불렀다. 이후 멜그루베에서는 모차르트의 피아노협주곡이 자주 초연되었다.

- 아리아 Vorrei spiegarvi, oh Dio!(K418: 하나님이시여 당신에게 말할수 있다면) 및 No, no, che non sei capace(K419). 이 두곡의 아리아는 부르크테아터(궁정극장)에서 공연된 파스쿠알레 안포씨(Pasquale Anfossi)의 오페라 Il curioso indiscreto에 나오는 두곡의 아리아를 대체한 것이다. 모차르트는 안포씨의 오페라에 출연하는 알로이지아를 위해 새로운 아리아를 작곡하여 대체하여 부르도록 했다.

- 소프라노를 위한 아리아 Ah se in ciel(K538)

 

요셉 랑게와 마담 랑게(알로이지아)

 

모차르트는 오페라 ‘돈 조반니’의 돈나 안나(Donna Anna)를 알로이지아를 염두에 두고 작곡했다. 과연! 1788년 5월 7일 비엔나에서의 ‘돈 조반니’ 초연에는 알로이지아가 돈나 안나의 역할을 맡았다. 모차르트가 알로이지아를 생각하여 작곡한 또 하나의 오페라는 ‘후궁에서의 도주’이다. 모차르트는 ‘후궁에서의 도주’의 주인공인 콘스탄체(Constanze)를 알로이지아를 위해 작곡했다.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알로이지아의 언니인 요제파에 대한 것이다. 요제파도 훌륭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였다. 비엔나에서는 요제파와 알로이지아 자매가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의 대명사처럼 알려져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요제파가 알로이지아보다 더 훌륭했다. 요제파는 1791년 ‘마술피리’의 초연에서 ‘밤의 여왕’의 이미지를 창조할 정도로 뛰어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였다. 그런 요제파가 알로이지아에 비하여 덜 알려졌던 것은 알로이지아가 모차르트와 결혼하려던 여자였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또 한가지 간과할수 없는 사항은 요제파, 알로이지아, 콘스탄체, 조피가 유명한 독일 낭만주의 작곡가인 칼 마리아 폰 베버의 사촌이라는 것이다. 즉, 알로이지아 등의 아버지와 칼 마리아 폰 베버의 아버지가 비록 이복이지만 형제간이었다.

 

'돈 조반니'의 한 장면. 돈나 안나, 돈나 엘비라, 돈 오타비오가 가면을 쓰고 돈 조반니의 파티에 참석하여 복수를 다짐하고 있다. 돈 조반니는 그것도 모르고 축배나 들자고 한다. 알로이지아는 '돈 조반니'의 역사적인 초연에서 돈나 안나의 이미지를 창조하여 역사에 길이 남았으니 그것은 모두 모차르트의 덕분이다. 스코티쉬 오페라.

                                 

알로이지아의 성악가로서의 재능에 대하여 현재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당시 덴마크의 배우 겸 음악가인 요아킴 프라이슬러(Joachim Preisler)의 일기이다. 요아킴은 비엔나의 오페라 제작에 대한 정보자료를 입수하기 위해 비엔나를 방문했을 때 알로이지아의 남편인 요셉 랑게의 초청으로 그의 집에 가서 식사를 한 일이 있다. 그때 프라이슬러는 알로이지아가 비록 임신 중이었지만 노래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음성이 참으로 무언가 달랐다. 그렇다고 썩 훌륭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음에서는 정말로 뛰어났으며 아주 섬세했다. 알로이지아의 노래를 들으면 그가 얼마나 음악적인 취향이 높으며 이론적으로도 완벽함을 알수 있다. 동생의 남편이 된 유명한 모차르트가 알로이지아의 음악을 더 윤택하게 만들기 위해 많은 사항들을 가르쳐준다고 한다. 그래서 이탈리아의 소프라노들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알로이지아처럼 폭넓은 음악적 지식을 바탕으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프라이슬러의 기록에 의하면 알로이지아는 단순한 소프라노가 아니라 마치 음악감독이나 합창지휘자처럼 음악의 전체를 이해하는 성악가였다는 것이다. 모차르트와 알로이지아의 운이 맞지 않은 로맨스에 대하여는 여러 소설에서 다루었지만 그중에서도 줄리엣 월드론(Juliet Waldron)이 쓴 Mozart's Wife(모차르트의 와이프: 2000)와 스테파니 코웰(Stephanie Cowell)이 쓴 Marrying Mozart(모차르트 결혼작전: 2004)가 비교적 상세하다.

 

1789년 '후궁에서의 도주'는 베를린에서는 처음으로 공연되었다. 모차르트가 지휘했다. 그림의 가운데에 있는 사람이 모차르트이다. 알로이지아가 콘스탄체로서 참석했는지 여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후궁에서의 도주'의 콘스탄체 역할을 알로이지아를 위해 작곡했다고 한다.

  

이제 알로이지아의 이력을 간단히 살펴보자. 알로이지아는 1778년 뮌헨에서 처음으로 오페라에 데뷔하였다. 어떤 작품이었는지는 유감스럽게도 기록이 없어서 모른다. 알로이지아는 뮌헨궁정극장에서 연봉 1,000플로린을 받았다. 베이스인 아버지 프리돌린이 600 플로린을 받은 것에 비하면 대단한 대우를 받은 것이었다. 나중에 비엔나에서 살 때에 요셉 랑게가 알로이지아와 결혼하겠다고 하자 알로이지아의 어머니인 세실리아 베버 여사는 그동안 알로이지아가 돈을 벌어서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는데 결혼하게 되면 가정경제가 어려워질 것으로 생각하여 신랑이 될 랑게에게 남아 있는 가족들의 생활비를 위해 1년에 700플로린을 내도록 했다. 그것만 보아도 알로이지아의 수입이 상당히 관찮은 편이었다는 것을 짐작할수 있다. 1년여 동안 뮌헨에 있었던 알로이지아는 비엔나의 국립징슈필(National Singspiel)의 초청을 받아 비엔나로 갔다. 국립징슈필은 요셉2세 황제가 독일의 징슈필(음악극)을 비엔나에서도 부흥발전시키자는 취지로 추진한 프로젝트였다. 한편, 아버지 플리도린 베버는 비엔나에서 베이스 역할을 맡지 못하여 국립징슈필의 공연이 있을 때 표받는 일이나 했다. 그러다가 아버지는 심신이 고단해서 그랬는지 비엔나에 온지 한달 후에 부인과 아이들을 남겨두고 불현듯 세상을 떠났다.

 

체를리나를 유혹하고 있는 돈 조반니. 뒤에서 마제토가 분노하고 있지만 상대가 영주여서 어쩌지를 못한다. 물색모르는 체를리나만이 돈 조반니에게 홀딱 넘어가려고 하고 있다.

 

알로이지아는 비엔나에 온 후 무려 20년 남짓의 기간동안 비교적 성공한 성악가로서 활동하였다. 결혼은 1780년 10월 31일에 했다. 신랑 요셉 랑게(Joseph Lange)는 부르크테아터(궁정극장)의 배우 겸 아마추어 화가였다. 그는 나중에 동서(同壻)인 모차르트의 초상화를 그려주겠다고 해서 시작을 했지만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콘스탄체는 랑게가 그린 초상화가 비록 미완성이지만 모차르트를 그린 여러 초상화 중에서도 모차르트의 모습과 가장 흡사한 초상화라고 인정했다. 랑게는 콘스탄체의 초상화도 그렸다. 오늘날 남아 있는 콘스탄체의 유일한 모습이다. 알로이지아는 아버지가 돌아가신후 어머니와 동생들의 생활을 책임져야 했다. 알로이지아의 수입이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그래서 요셉 랑게와 결혼할 때에 계약서에 1년에 700플로린의 생활비를 제공한다는 조항을 넣었던 것이다.

 

요셉 랑게가 미완성으로 남긴 모차르트 초상화. 원래는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모차르트를 그리려고 했다. 그러나 모차르트가 1791년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완성하지 못했다. 훗날 콘스탄체는 이 초상화가 모차르트를 가장 닮은 그림이라고 말했다.

 

알로이지아는 1782년부터 부르크테아터에 소속되었다. 당시 부르크테아터(궁정극장)에 소속된다는 것은 배우나 성악가로서 큰 영광이었다. 알로이지아는 주로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역할을 맡았다. 그러다가 다른 극장에서도 초청하자 부르크테아터의 전속을 그만두고 프리랜서가 되었다. 주로 캐른트너토르극장(Kärntnertortheater)에 출연하였으며 간혹 부르크테아터의 무대에도 섰다. 캐른트너토르극장은 오늘날 슈타츠오퍼 뒤에 있는 자허 호텔의 자리에 있었다. 1795년에는 동생 콘스탄체와 함께 순회연주회를 떠나기도 했다. 사실 콘스탄체도 한 노래 부르는 소프라노였다. 그해에 알로이지아는 남편 랑게와 별거에 들어갔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노년에 접어든 알로이지아는 동생 콘스탄체가 함께 살자고 하는 바람에 또 다른 동생인 조피와 함께 잘츠부르크로 가서 여생을 보냈다. 알로이지아는 잘츠부르크에서 1839년 세상을 떠났다. 향년 79세였다.

 

알로이지아가 비엔나에서 전속으로 있었던 부르크테아터의 현재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