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세기의 모차르트

모차르트의 장모 세실리아 베버

정준극 2010. 1. 20. 22:50

모차르트의 장모 세실리아 베버

 

콘스탄체의 친정어머니, 즉 모차르트의 장모인 세실리아 베버(Cäcilia Weber: 1727-1793)는 오페라극장 베이스 겸 프롬프터 겸 사보가인 프리돌린 베버(Fridolin Weber: 1733-1779)와 결혼하였다. 세실리아는 남편 프리돌린보다 6세 연상이었다. 두 사람은 금술이 좋아서 슬하에 딸만 넷을 두었다. 순서대로 보면 요세파(Josepha), 알로이지아(Aloysia), 콘스탄체(Constanze), 조피(Sophie)이다. 프리돌린 베버의 이복동생은 칼 마리아 폰 베버(Carl Maria von Weber)의 아버지이다. 그러므로 콘스탄체를 비롯한 딸들은 역사에 길이 남을 독일의 유명한 낭만주의 작곡가 칼 마리아 폰 베버와 사촌간이 된다. 딸 넷 중에서 콘스탄체만 제외하고 모두 성악가가 되었다. 하지만 모차르트에 의하면 콘스탄체도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더구나 음악을 이해하는 재능이 뛰어났다고 한다. 네 딸들은 모두 독일 만하임 부근의 첼 임 뷔젠탈(Zell im Wiesental)에서 태어났다. 그러다가 막내 조피가 태어난 직후 대도시인 만하임으로 거처를 옮겼다. 만하임은 세실리아가 태어난 도시였다. 세실리아의 결혼전 이름은 세실리아 코르둘라 슈탐(Cacilia Cordula Stamm)이다. 그의 아버지 요한 오토 슈탐은 독일정부의 공무원이었다.

 

모차르트의 장모 세실리아의 고향인 만하임. 사진은 만하임의 랜드마크인 워터타워(바써투름)

 

세실리아가 모차르트를 처음 만난 것은 1777년으로 모차르트가 어머니와 함께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려고 유럽의 이곳저곳을 다니는 중에 만하임에 왔을 때였다. 모차르트는 만하임에 머무는 동안 알로이지아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만하임에서 일자리가 없어서 파리로 떠나야 했다. 모차르트는 혼자서 속마음으로 후일을 기약했을 뿐이다. 한편, 세실리아의 가족들은 뮌헨으로 가게 되었다. 남편 프리돌린과 딸 알로이지아가 모두 뮌헨에서 일자리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우연하게도 모차르트는 고향 잘츠부르크로 돌아가는 중 뮌헨에 들렸다가 알로이지아를 다시 만났다. 모차르트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회를 놓치면 안된다고 생각하여 알로이지아에게 청혼했다. 하지만 알로이지아는 모차르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만일 알로이지아가 청혼을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다. 모차르트가 70세까지 오래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더 기가 막히게 훌륭한 작품들을 더 많이 내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차르트를 일찍 데려가시려고 그랬는지 알로이지아와의 결혼을 후원하지 않으셨다.

 

베버 가족들은 뮌헨에서 2년동안 지내다가 이번에는 비엔나에서 일자리를 찾아 1779년 9월 비엔나로 모두 옮겨왔다. 소프라노인 알로이지아가 비엔나의 독일극장(부르크테아터의 전신)에서 뮌헨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역할을 맡을수 있게 될지도 몰라서 비엔나로 왔다. 세실리아의 가족들이 비엔나로 온지 한달 후에 이게 웬 날벼락인지 남편 프리돌린이 세상을 떠났다. 세실리아는 딸 넷을 거느리고 먹고 살아야 했다. 마침 요셉 랑게(Joseph Lange)라는 사람이 알로이지아를 좋아해서 청혼을 하였다. 세실리아는 사위 후보생에게 ‘우리 식구들은 알로이지아가 벌어오는 돈으로 겨우 생활해 왔는데 만일 알로이지아와 결혼하면 우리는 누구를 의지하고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만일 그대가 우리 가족의 생활비로 매년 700 플로린스를 지급할 용의가 있다면 알로이지아와 결혼해도 무방하오’라고 말하여 결국 그렇게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알로이지아와 랑게는 아버지의 상중(喪中)임에도 불구하고 1779년 10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한편, 세셀리아는 알로이지아가 결혼해서 나가자 알로이지아가 쓰던 방을 하숙방으로 내놓아 약간의 수입을 올렸다.

 

그로부터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알로아지아는 그런대로 이름을 날려서 오페라에 자주 출연하며 지냈고 세실리아는 사위가 꼬박꼬박 월사금처럼 내는 지원금을 받아 곤궁하게는 지내지 않았다. 게다가 하숙생이 내는 하숙비도 살림에 보탬이 되었다. 그러한 지경에 모차르트가 세실리아의 가족들과 다시 인연을 시작하게 되었다. 모차르트는 1781년 고향 잘츠부르크를 아예 떠나 비엔나로 와서 정착했다. 3월에 비엔나에 온 모차르트는 두어달 동안 콜로레도 대주교 저택에서 하인들과 함께 지내다가 콜로레도 대주교가 나가라고 하는 바람에 하숙집을 구해야 했는데 그때 우연찮게 세실리아의 하숙집을 찾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운명의 장난이라고나 할까? 모차르트가 세실리아의 집에 들어가서 살기 시작한 것은 1781년 5월 1일이나 2일이었다. 세실리아가 세 딸과 함께 살고 있던 건물의 이름은 Zum Augen Gottes(신의 눈)이었다. 지금의 1구 페터스키르헤 뒤편 밀르흐가쎄 1번지에 있는 집이었다. 모차르트는 세실리아의 셋째 딸인 콘스탄체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모차르트로서는 꿩 아니면 닭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당시 19세이던 콘스탄체에 눈독을 들여 사랑을 속삭이게 되었던 것이다. 세실리아는 이번에는 하숙생으로 들어온 모차르트가 콘스탄체와 이미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것을 보고 모차르트에게 ‘남들의 이목도 있으니 나가달라’고 말했다. 모차르트는 그라벤에 있는 다른 집에 하숙을 구해서 나갔고 우여곡절 끝에 이듬해인 1782년 8월 4일 더운 날 슈테판성당에서 콘스탄체와 결혼식을 올렸다.

 

세실리아는 처음에 모차르트를 무척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몇 년전에는 둘째 딸 알로이지아와 결혼하겠다고 난리를 치던 녀석이 이번에는 셋째 딸과 결혼하겠다고 나서자 기가 막혔기 때문이었다. 실상 더 밉살스러운 것은 셋째 딸 콘스탄체였다. 모차르트와 결혼하겠다고 천방지축으로 나섰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초반에는 세실리아와 콘스탄체의 사이가 아슬아슬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콘스탄체가 첫 아이를 낳자 상황이 달라졌다. 이어 장모의 사위 사랑이 시작되었다. 모차르트와 세실리아의 사이는 그야말로 누가 보더라도 ‘야, 거 참 대단하다’고 말할 정도가 되었다. 콘스탄체의 여동생인 조피가 1825년에 쓴 서한에 따르면 장모와 사위 사이가 얼마나 돈독했는지 잘 알수 있다. “엄마와 나는 그 때 뷔덴(Wieden: 오늘날 비엔나의 4구)에서 살고 있었지요. 그런데 형부(모차르트)가 며칠마다 어김없이 그라벤(Graben)에서 뷔덴까지 뛰어오다시피 해서 찾아온답니다. 손에 작은 가방을 들고 오는데요 가방 안에는 커피와 설탕이 들어있지요. 우리 엄마에게 주기 위해서 그렇게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저, 장모님, 자 이제 오늘 오후에 마실 커피를 마련할수 있네요’라고 말했지요. 그러면 엄마는 마치 어린애처럼 좋아했어요.” 세실리아는 모차르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지 2년후인 1793년에 뷔덴에서 세상을 떠났다. 당시 뷔덴은 비엔나 성밖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