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세기의 모차르트

모차르트의 처형 요제파(Josepha)

정준극 2012. 1. 11. 10:03

모차르트의 처형 요제파(Josepha)

'마술피리'의 초연에서 ''밤의 여왕'의 이미지 창조

 

모차르트의 부인 콘스탄체에게는 두명의 언니와 한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그러므로 모차르트의 처가집은 딸만 넷인 딸부자집이었다. 큰 딸은 요제파(Josepha: 1758-1819)이며 둘째 딸은 알로이지아(Aloysia: 1768-1839)이고 셋째 딸이 콘스탄체(Constance: Constanze: 1762-1842)이며 막내 딸이 조피(Sophie: 1763-1846)였다. 어떤 자료에 의하면 큰 딸이 알로이지아이고 둘째 딸인 요제파라고 되어 있기도 하다. 아무튼 요제파는 모차르트의 처형이었다. 요제파는 나중에 프란츠 드 파울라 호퍼(Franz de Paula Hofer)라는 성악가와 결혼했기 때문에 요제파 호퍼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남편 호퍼가 세상을 떠나자 제바스티안 마이어(Sebastian Mayer)라는 사람과 재혼했기 때문에 요제파 마이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라고 하면 대표적으로 생각나는 장면인 '밤의 여왕'의 도착 장면이다. 모차르트의 처형인 요제파는 1791년 9월 비엔나의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초연된 '마술피리'에서 '밤의 여왕'의 이미지를 처음으로 창조하였다. 그러므로 모차르트의 처형인 요제파는 그 이름이 오페라역사에 길이 남는 인물이다.

 

요제파는 1791년 9월 30일 '마술 피리'의 역사적인 초연에서 '밤의 여왕'의 이미지를 창조한 소프라노로서 음악사에 길이 기억되고 있다. 이어 1798년에는 '마술 피리'의 후속 편인 Das Labyrinth(미로)에도 '밤의 여왕'으로 출연하였다. 오페라 '미로'는 나중에 모차르트의 처제인 조피와 결혼한 사람인 페터 빈터(Peter Winter)가 음악을 붙이고 에마누엘 쉬카네더가 대본을 쓴 작품이다. 요제파는 1789년 파울 브라니츠키(Paul Wranitzky)의 오페라 '오베론' 초연에서 타이틀 롤을 맡기도 했다. 파울 브라니츠키의 '오베론'(요정 여왕)은 에마누엘 쉬카네더가 '마술피리'의 대본을 쓸수 있도록 영감을 준 작품이다.

 

쉬카네더극장에 있을 때 뷔덴극장에서 '두명의 안톤'(Die zween Anton)에 출연한 요제파(왼쪽). 요제파가 손을 잡고 있는 사람은 베네딕트 샤크(Benedikt Schak)이다. 요제파는 O Anton du bist mein 이라는 아리아를 불렀다.

                     

요제파의 결혼전 이름은 마리아 요제파 베버였다. 독일 바덴-뷔르템버그의 첼 임 뷔젠탈(Zell im Wiensental)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누구냐는 것은 설명을 생략키로 한다. 다만,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위대한 작곡가 칼 마리아 폰 베버는 요제파의 아버지의 이복동생이 된다는 것이다. 즉, 요제파를 비롯해서 알로이지아, 콘스탄체, 조피 자매들의 삼촌이 된다. 요제파는 주로 만하임에서 성장했다. 이후 가족을 따라 뮌헨으로 가서 살다가 비엔나에 정착했다. 요제파도 알로이지아와 마찬가지로 성악에 전념하여 소프라노로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요제파는 당시 비엔나 교외의 뷔덴(오늘날의 4구)에 있던 뷔덴극장(Theater auf der Wieden)에서 요한 프리델 극단의 프리마 돈나로서 활동했다. 요한 프리델이 세상을 떠나자 에마누엘 쉬카네더가 극단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간의 사정은 대본가 에마누엘 쉬카네더 편을 참고하기 바란다. 쉬카네더는 새로 극단을 개편하면서 모차르트의 처제인 요제파를 계속 단원으로 남도록 배려했다. 요제파는 쉬카네더 극단의 중요한 멤버였다.

 

요제파가 태어난 독일의 첼 임 뷔덴탈 마을

                 

요제파는 두번 결혼했다. 첫 남편은 작곡가 겸 바이올리니스트인 프란츠 드 파울라 호퍼(1755-1796)였다. 1788년 여름에 성슈테판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남편 호퍼는 궁정극장(오늘날의 슈타츠오퍼)에서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했다. 두번째 남편은 베이스 바리톤 제바스티안 마이어(1773-1835)였다. 마이어는 1805년 11월 20일 빈강변극장(Theater an der Wien)에서 초연된 베토벤의 '휘델리오'에서 돈 피짜로의 이미지를 창조한 성악가였다. 요제파는 '마술피리'의 전편이나 마찬가지인 Der Stein der Weisen(철학자의 돌)에서 주역을 맡을 예정이었으나 출산휴가를 갔기 때문에 출연하지 못했다. '철학자의 돌'은 쉬카네더, 호퍼, 모차르트 등 5명의 작곡가들이 연합하여 완성한 파스티셰 오페라이다. 그중에서도 요제파의 남편이 된 호퍼의 역할이 컸다. 호퍼는 '철학자의 돌'에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의 아리아를 만들어 넣지 않았다. 요제파가 출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제파는 1791년 9월 30일의 '마술 피리' 초연에서 '밤의 여왕'을 맡아 대단한 기염을 토했다. 당시 웬만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도 맡기 힘든 역할이었지만 요제파는 그 역할을 훌륭하 소화하였다. 요제파는 '밤의 여왕'을 1801년까지 계속 맡아서 노래하다가 더 이상은 힘들어서 은퇴하였다. 그때 요제파의 나이는 43세였다. 요제파는 1804년에 무대에서 완전히 은퇴하였으며 1819년 12월 29일 비엔나에서 61세로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