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베토벤의 사람들

베토벤의 아버지 요한

정준극 2010. 1. 27. 15:24

베토벤의 아버지 요한(Johann)

실패한 테너, 알콜 중독자

루드비히(루드비히 반 베토벤)→요한(요한 반 베토벤)→악성 베토벤(루드비히 반 베토벤)

 

베토벤의 아버지 요한 반 베토벤

 

베토벤의 아버지 요한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못된 아버지이며 못난 남편이었다는 인식이 남아 있다. 술에 취해서 들어오는 날에는 어린 베토벤에게 공연히 매를 들거나 허약한 어머니를 구박하기가 일수였다고 한다.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가? 정말 술주정꾼 겸 아동학대자였는가? 베토벤의 아버지인 요한 반 베토벤(Johann van Beethoven)은 1740년 본에서 태어났다. 1740년이라고 하면 비엔나에서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인 샤를르 6세가 세상을 떠난 그해이다. 요한의 아버지, 즉 베토벤의 할아버지인 루드비히(플란더스어로는 Lodewijk: 1712-1773)는 본궁정의 음악감독 겸 성악가(베이스)였다. 할아버지 루드비히는 플랑드르의 메슈렌(Mechelen)에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따지고 보면 베토벤의 본적지는 독일이 아니라 플랑드르(현재 벨기에 서부, 네덜란드 남서부, 프랑스 북부에 있던 중세국가)라고 할수 있다. 어린 요한은 아버지 루드비히 덕분에 음악적 생활 속에서 자랐다. 요한은 목소리가 좋아서 그만하면 훌륭한 테너였다. 요한은 22세 때에 비로소 본에 있는 쾰른대주교 궁전의 궁정음악가가 되어 테너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궁정음악가라고 해도 벌이가 시원치 않아서 결혼식이든 환갑잔치이든 이곳저곳에서 초청이 들어오면 사례를 받고 노래를 불렀으며 아울러 동네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약간의 수입을 올렸다. 요한은 생긴 것은 우락부락하게 생겼지만 바이올린, 지터, 피아노 등을 잘 연주했다.

 

1767년, 요한은 26세 때에 19세의 젊은 여인인 마리아 막달레나 케베리히(1746-1787)와 결혼하였다. 성경에 나오는 그 막달라 마리아가 아니라 본에서 가까운 라인강변의 에렌브라이트슈타인(Ehrenbreitstein)이라는 마을에 사는 아가씨였다. 마리아의 친정 아버지는 에렌브라이트슈타인에 있는 트리어(Trier)대주교 궁전의 주방장이었다. 마리아의 친척 중에는 본의 궁정오케스트라 멤버로 활동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저런 연줄로 요한은 마리아와 데이트를 하게 되었고 급기야 서로 장래를 약속하게 되었다. 사실 마리아는 16세 때에 결혼했으나 일찍 남편과 사별한 경험이 있다. 더구나 아들까지 낳았으나 불행하게도 태어난지 얼마후 숨을 거두었다. 그런 사실을 파악한 요한의 아버지 루드비히는 그 결혼을 죽어라고 반대했었다. 게다가 루드비히는 사람이 그러면 안되는데 마리아가 천한 집안 출신이라고 하며 업신여겼다. 하여튼 요한이 루드비히에게 ‘아버지, 저는요, 마리아 없이는 절대로 못 삽니다. 그러니 아들이 죽는 꼴을 보시려면 계속 반대하세요!’라고 말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요한은 결국 마리아와 결혼하였다.

 

마리아의 친정아버지는 딸 마리아가 첫 남편과 사별하고 청상의 과수댁이 되자 측은하게 생각하여 마음이 썩 즐겁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마리아가 요한과 재혼하겠다고 나서자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며 기왕에 딸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어줄 요량으로 결혼식만은 성대하게 치러주겠다고 제안했다. 하기야 주방장이었으므로 피로연의 음식은 끝나게 마련할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의 루드비히가 ‘아니, 온 동리 사람들을 데려다가 술 먹이고 밥 먹이면서 결혼식을 올릴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재혼하는 형편에 무슨 광고할 일이 있어요?’라면서 핀잔을 주듯 반대하였다. 그래서 요한과 마리아의 정식 결혼식은 결국 마리아의 집이 있는 에렌브라이트슈타인에서 치루어지지 못하고 본(Bonn)의 성레미기우스(St Remigius)교회에서 아주 조촐하게 거행되었다. 결혼후 이듬해에 첫 아이가 태어났다.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루드비히 마리아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러나 태어난지 엿새 만에 숨을 거두었다. 슬픈 일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후인 1770년 12월 16일에 두 번째 아이가 태어났다. 첫 아이가 일찍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실은 이번에 태어난 아들이 큰아들이나 마찬가지였다. 바로 그가 우리가 존경하여 마지않는 루드비히 반 베토벤(1770-1827)이다. 베토벤이 태어난 이후 요한과 마리아는 토탈 네명인진 다섯명인지의 자녀를 더 두었다. 그 중에서 카스파르 칼(Kaspar Carl: 보통 칼이라고 부름: 1774-1815)과 니콜라우스 요한(Nikolaus Johann: 보통 요한이라고 부름: 1776-1848)의 두 아들만 살아남았다.

 

결혼하여 가정을 가지고 자녀를 두게 된 요한은 일단은 착실한 생활을 하였다. 궁정에서 테너로 활동하며 월급을 받았지만 피아노와 성악 레슨을 열심히 하여 생활에 보탬이 되도록 했다. 그래서 한때는 자녀들을 위해 가정교사를 두고 영어, 프랑스어 레슨도 받도록 했다. 요한은 자기 능력보다도 더 열심히 일을 하여 가족을 돌보았다. 그리고 아버지 루드비히의 뒤를 이어 궁정음악감독(카펠마이스터)로 임명될 것으로 확신했다. 그러나 ‘무슨 일에나 확신은 금물’이라는 옛 속담과 같이 어찌된 영문인지 궁정음악감독에 임명되지 못했다. 당시 요한의 아버지 루드비히는 부수입을 올리기 위해 포도주 장사를 했다. 요한은 과거에 자기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기회가 있을 때마다 포도주 창고에 들어가 포도주를 즐겼다. 처음에는 시음(試飮) 정도로 시작하였으나 날이 갈수록 포도주에 빠지게 되었고 특히 궁정음악감독으로 임명되지 못한 후에는 강한 술을 마시기 시작하여 그로부터 아예 자타가 공인하는 술꾼이 되었다. 날이면 날마다 술에 절어서 살다보니 제대로 궁정음악가로서 직장생활을 하지도 못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요한의 생활은 궁핍해 가기만 했다. 사람이 돈이 없으면 무슨 짓이든지 한다는 얘기와 마찬가지로 요한은 힘 안들이고 돈을 벌 궁리만 했다. 마침내 요한은 당시 궁정제1장관인 발더부슈(Balderbusch)백작이 세상을 떠나자 백작의 서명을 위조하여 백작이 자기에게 이러저러한 귀중한 물건들을 기부했다는 문서를 만들고 그 물건들을 달라고 주장했다. 요한이 위조한 문서는 당장 들통이 났다. 요한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모욕과 조롱을 받았다. 하지만 백작가문은 요한이 오랫동안 궁정음악가로 지낸 점등을 감안하여 법적인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그런 사건이 있은 후에 요한은 정식 월급을 받지 못하고 매달 궁정에서 주는 자선형태의 돈을 받아 겨우 생활했다. 요한은 그나마의 월급도 집에 가져오지 않고 술집에 바치며 지냈다. 요한의 술버릇은 날로 도를 더해가기만 했다. 이웃 사람들은 그러한 요한에 대하여 비참하게는 여겼지만 그렇다고 동정을 베풀지는 않았다. 요한은 술 때문에 경찰서에 자주 체포되어 갔다. 그럴 때마나 어린 베토벤이 경찰서에 가서 사정을 얘기하고 집으로 모셔오기를 시어머니 제삿날 돌아오는 듯 했다. 베토벤은 17세 때에 선제후의 후의로 음악공부를 위해 비엔나로 갔다. 이때 모치르트를 만나서 레슨을 받고자 했다. 그런데 본으로부터 어머니가 위중하다는 연락이 왔다. 베토벤은 급히 본으로 돌아갔다. 얼마후 베토벤의 어머니가 폐렴이 악화되어 약한첩 써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베토벤은 어머니의 장례를 끝내고 이럭저럭 5년을 본에서 지내다가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서 짐을 싸들고 비엔나로 다시 갔다. 그로부터 베토벤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비엔나에 정착해서 지냈다.

 

그건 그렇고 아버지라는 사람은 허구헌날 술이나 퍼마시고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자 베토벤과 동생들은 하루아침에 의지할데가 없는 고아의 신세와 마찬가지가 되었다. 이웃 사람들은 아이들을 위해 무슨 조치를 취해야 했다. 이웃 사람들은 요한의 월급의 반을 아직 18세의 베토벤이 직접 받을수 있도록 선제후에게 청원했다. 청원은 수락되었다. 선제후는 여기에 덧붙여서 술주정꾼인 요한을 본에서 추방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차마 그 지시가 이행되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요한의 경력은 끝났다. 요한은 선제후의 그런 지시가 떨어진지 3년 후인 1792년 12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베토벤이 비엔나로 다시 떠난지 한달 후였다. 비엔나에 있던 베토벤은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아마 일부러 가지 않았던 것 같았다.

 

베토벤의 아버지인 요한은 100% 플랑드르 혈통이 아니다. 요한의 아버지인 루드비히는 100% 플랑드르 혈통이지만 아들 요한은 어머니가 독일인인 마리아 요제파 발이었기 때문에 50% 플랑드르 혈통이다. 그후 베토벤의 아버지인 요한도 독일 여인인 마리아 막달레나와 결혼하였으므로 베토벤은 플랑드르 25%, 독일 75%의 혈통이라고 말할수 있다. 훗날 나치는 위대한 베토벤을 순수 아리아인의 반열에 올려놓고 싶어서 그나마 베토벤의 25% 플랑드르 혈통을 부인하였다. 나치의 선전 및 문화사업 책임자들은 베토벤이 순수 독일 및 아리안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다고 주장했다. 나치도 베토벤이 위대한 인물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본의 포펠스도르프 슐로스. 선제후궁전으로 이곳에서 베토벤의 아버지 요한이 테너로서 봉사했다. 현재는 본대학교에 속한 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