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베토벤의 사람들

베토벤의 동생 카스파르 칼

정준극 2010. 1. 27. 15:29

베토벤의 동생 카스파르 칼(Kaspar Karl)

베토벤이 양육권을 가진 칼의 아버지

                 

카스파르 안톤 칼 반 베토벤(Kaspar Anton Karl van Beethoven: 1774-1815)은 위대한 악성 베토벤의 바로 아래 동생이다. 베토벤은 1792년(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다음해)에 본을 떠나서 비엔나로 다시 왔다. 베토벤은 이곳저곳의 초청을 받아 피아노 연주를 하며 지냈다. 그러면서 틈틈이 작곡을 하였다. 베토벤에게는 남동생이 둘이 있었다. 카스파르 칼과 니콜라우스 요한이었다. 카스파르도 음악가였지만 별로 재능은 없었다. 카스파르는 형인 베토벤이 비엔나에 가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다는 얘기를 듣고 동생 니콜라우스와 함께 무조건 형을 찾아 비엔나로 갔다. 카스파르는 비엔나에서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면서 그럭저럭 입에 풀칠은 하지 않고 지냈다. 카스파르는 베토벤의 동생이라는 유명세를 이용하여 피아노를 배울 아이들을 모집하였다. 카스파르는 작곡에도 손을 댔다는 증거가 있다. 1800년 1월 11일자 비엔나 차이퉁(Wiener Zeitung)을 보면 카스파르가 6곡의 미뉴엣, 6곡의 독일무곡 등의 악보를, 한가지는 피아노를 위한 것으로, 다른 하나는 두 개의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것으로 출판해서 판매한다고 되어 있다.

                  

카스파르는 형인 루드비히와 상당히 가깝게 지냈다. 한동안은 베토벤(루드비히를 말함)의 대리인 겸 연주회 매니저로 일했다. 그러다가 카스파르는 자기가 작곡한 것을 베토벤의 이름으로 출판코자 한 사건이 있었다. 그후부터 베토벤은 동생 카스파르와 관계를 끊었다. 사실 두 형제간의 사이는 대단히 위태로웠다. 베토벤은 한때 테어타 안 데어 빈(빈강변극장)에서 지낸 일이 있다. 이때 카스파르도 함께 지냈다. 주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두 형제는 거의 날마다 말다툼을 하며 지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사이가 나빴다. 그러한 두 사람의 사이가 극도로 악화된 것은 1806년 카스파르가 요한나 라이스(Johanna Reiss: 1786-1868)와 결혼하겠다고 나선 때부터였다. 베토벤은 카스파르와 요한나의 결혼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요한나가 속된 표현으로 헤픈 여자라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요한나는 그때 이미 임신중이었다. 과연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두 동생들을 거느리는 가장 역할을 하고 있는 베토벤으로서 동생 카스파르와 요한나의 결혼이 걱정스럽지 않을수 없었다. 카스파르와 요한나는 베토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5월에 결혼하였으며 9월에 아이를 낳았으니 그가 베토벤의 유일한 조카인 칼이었다. 그후 두 사람 사이에서는 토털 다섯 자녀가 생산되었지만 큰 아들 칼 이외에는 굳이 소개할 필요가 없어서 생략한다.

 

베토벤이 동생 카스파르 칼과 함께 잠시 살았던 비엔나강변극장. (사진은 파파게노문)

 

카스파르와 요한나의 결혼은 시작부터 행복하지 못했다. 1811년 남편 카스파르는 부인 요한나가 자기의 돈지갑에서 돈을 훔쳤다고 하여 경찰에 고발하였다. 요한나는 돈을 훔친 것이 인정되어 한달간 집에 연금되는 처벌을 받았다. 그러니 부부 사이가 원만할 리가 없었다. 어느때는 두 사람이 심하게 부부싸움을 하는 중에 카스파르가 칼로 요한나를 찌른 일도 있었다. 요한나의 얼굴에는 그때의 상처가 죽을 때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카스파르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음악가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비엔나에서 제국 재무성의 말단공무원으로 들어갔다. 몇 년후 그는 약간 진급했고 월급도 좀 더 받게 되어 겨우겨우 먹고 살게는 되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카스파르를 그대로 놓아두지 않았다. 1813년 카스파르는 폐렴에 걸렸다. 어머니인 마리아도 폐렴에 걸려 세상을 떠났는데 이번에는 둘째 아들 카스파르가 폐렴에 걸린 것이다. 카스파르는 유언장에 만일 자기가 죽으면 칼의 생모인 요한나가 아니라 형인 베토벤이 칼의 후견인이 되도록 한다고 적었다. 그때 칼은 여섯 살이었다. 베토벤은 동생 카스파르의 이같은 주장에 감동하여 카스파르와 칼을 위해 정성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카스파르는 죽음에 임박하여 가만히 지난 일을 생각해보니 자기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형인 베토벤 때문에 뻗어나가지 못했다고 믿었다. 형인 베토벤 때문에 음악가로서도 발전하지 못했고 요한나와의 결혼도 그렇게 반대를 받았고 결혼 후에도 자기를 도와주지 않았으며 더구나 요한나를 무척 미워하고 있는 사실들을 상기하였다. 카스파르는 갑자기 칼의 장래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급히 유언장의 내용을 ‘나의 부인인 요한나와 함께 형인 루드비히 반 베토벤을 칼의 후견인으로 삼는다’고 고쳤다. 베토벤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유언장 수정내용을 전해 들은 베토벤은 당장 동생 카스파르를 찾아가서 ‘요한나와 함께’라는 표현을 삭제하라고 요청하였다. 베토벤은 어린 칼을 남들이 모두 인정하는 대로 그렇게도 사악하고 바람이나 피는 여편네의 손에 양육할수 없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카스파르는 베토벤의 요청대로 유언장의 내용을 다시 수정하였다. 이 사실을 안 요한나는 그날 밤에 카스파르를 집요하게 설득하여서 유언장에 첨부문서를 만들도록 했다. 내용인즉 ‘나는 나의 아들 칼이 그의 어머니로부터 떨어져서 사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칼은 어머니와 언제나 함께 있어야 한다. 어머니(요한나)는 베토벤과 함께 칼의 후견인 역할을 맡아야 한다’이며 여기에 덧 붙여서 마치 하나님의 사자라도 된 듯이 ‘나의 아들의 장래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두 사람이 화해하기를 바란다’고 적었다. 카스파르는 1815년 11월 15일, 향년 41세로 운명하였다. 카스파르 칼 반 베토벤의 초상화는 전해 내려오지 않고 있다. 다만, 베토벤의 제자였던 칼 체르니의 말에 의하면 ‘카스파르 칼 반 베토벤은 작은 키, 붉은 머리에 별로 잘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 칼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 이야기는 칼의 어머니라고 하는 요한나 편에 설명토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