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베토벤의 사람들

동생 카스파르 칼의 부인 요한나

정준극 2010. 1. 27. 15:31

동생 카스파르 칼의 부인 요한나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이었나?

 

요한나(Johanna)라고 하는 여인은 베토벤의 바로 아래 동생인 카스파르(Kaspar)의 부인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제수(弟嫂)씨이다. 대저 미장가의 형으로서 동생의 부인을 대하는 것은 사실상 서먹서먹하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베토벤과 요한나의 관계는 서먹서먹한 것을 떠나 원수와 같은 괴로운 것이었다. 베토벤은 제수인 요한나를 법원에 고소하며 비난했다. 요한나도 베토벤을 증오하여서 입에 거품을 물면서 비난을 했다. 4년에 걸친 베토벤과 요한나의 법정 싸움은 비엔나 장안의 화제꺼리였다. 무엇 때문에 고소까지 하며 싸웠는가? 칼(Karl) 때문이었다. 칼은 카스파르와 요한나의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유일한 아들이다. '태어났다고'라는 표현을 한 것은 실상 칼이 과연 카스파르의 아들인지 아닌지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사연인즉, 칼은 카스파르와 요한나가 결혼한 후 4개월만에 태어났다. 그러므로 요한나에게 결혼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것이 카스파르와의 관계였는지 또는 어떤 놈팡이와의 관계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로지 요한나만은 알고 있을 터인데 묵묵이었다. 

 

칼은 베토벤 가문의 유일한 큰상주이며 족보를 지키고 제사를 모시는 책임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결혼을 하지 않아 아무런 후사가 없던 베토벤은 조카 칼을 무척 사랑했다. 마치 자기 아들처럼 여겼다. 베토벤은 동생 카스파르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자 어린 칼을 형편없이 못된 여자인 요한나의 손에 맡겨 양육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며 양육권 청구소송을 냈다. 요한나는 처녀시절부터 바람깨나 피며 지낸 여자였다. 요한나는 미망인이 된 후에도 그런 재능을 썩힐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아비없는 칼만 구박받는 신세가 될것이다. 그래서 삼촌인 베토벤이 칼 보호 작전에 들어간 것이다. 베토벤이 칼에 대한 양육권 소송을 낸 것은 칼의 아버지인 카스파르의 분명치 않은 유언장 때문이었다. 카스파르가 처음 만든 유언장에는 형 베토벤을 칼의 유일한 후견인으로 지정하였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을 했던지 얼마 후에 '아내 요한나와 형 베토벤이 공동 후견인이 된다'고 수정했다. 베토벤은 죽으면 죽었지 칼을 요한나와 함께 살도록 놓아 둘수는 없다고 펄펄 뛰었다. 요한나는 요한나대로 '내 자식인데 에미가 길러야지 성격도 괴상망칙한 노총각 삼촌이 기르게 하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냐?'면서 악을 바락바락 질러댔다. 아무튼 베토벤이 그런 일로 요한나와 소송을 하며 다툰 것은 위대한 베토벤의 생애에 있어서 씻을수 없는 커다란 큰 상처였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랬을까? 베토벤에 있어서 칼은 말도 않듣고 속만 썩이는 녀석이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칼에게 집착을 했을까? 단 하나밖에 없는 조카였기 때문이었을까?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베토벤의 영결미사가 거행된 알저키르헤(안토니우스 채플) 

 

영화 ‘불멸의 연인’(Immortal Beloved)은 요한나가 결혼하기 전에 베토벤의 애인이었으며 요한나가 낳은 칼이 다름 아닌 베토벤의 아들이라는 내용을 넌즈시 말해주는 것이다. 물론 칼이 베토벤의 아들이라는 어떠한 근거는 없다. 하지만 베토벤이 칼을 그렇게도 애지중지했던 것을 보면 무언가 있기는 있는 것 같다. 만에 하나라도 요한나가 베토벤이 미치도록 사랑했던 '불멸의 연인'(Unsterbliche Geliebte)이었다고 한다면 왜 저렇게 서로 못 잡아 먹어서 싸워야 했을까? 혹자는 베토벤이 요한나를 무척 갈망했으나 요한나가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서 자꾸 딴 길로 가기 때문에 성질이 나서 그랬다고 설명했다. 믿거나 말거나, 성질로 말하자면 베토벤도 한 성질 하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사랑과 증오는 종이 한장 차이라고 하지 않던가? 이제 요한나가 어떤 여자인지 좀 더 알아보자. 요한나의 아버지인 안톤 반 라이스(Anton Van Reiss)는 비엔나에서 가구상으로 성공한 사람이었다. 요한나의 어머니는 포도주 장사를 해서 돈을 벌어 비엔나 교외의 어떤 마을에서 촌장까지 지낸 일이 있는 사람의 딸이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일단 이 자리를 빌어서 요한나라는 여인이 점잖은 집안 출신은 아니라는 것을 언급코자 한다. 요한나의 집안은 오히려 콩가루집안이었다. 요한나가 18세 때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합심하여 요한나를 경찰에 고발한 일이 있다. 오죽하면 부모가 합심하여 딸을 경찰에 고발했을까? 집안의 패물들을 훔쳐서 어떤 곰팡이같은 놈팡이와 달아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만하면 요한나가 어떤 여자인지 짐작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훗날 베토벤이 오죽했으면 요한나를 상대로 칼에 대한 양육권 소송을 냈을까라고 사정을 이해할수 있다.

 

(진주목걸이 사건)

요한나는 20세가 되던 1806년 5월 25일에 베토벤의 바로 아래 동생인 카스파르 안톤 칼 반 베토벤(Kaspar Anton Karl van Beethoven)과 결혼식을 올렸다. 앞에서도 지적했듯, 이들의 유일한 자녀인 칼은 카스파르와 요한나가 결혼한지 넉달 후인 그해 9월 4일에 태어났다. 당연히 속도위반이었다. 누구와? 그건 요한나만이 아는 비밀이다. 요한나의 아버지는 딸이 베토벤 뭐라는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하니까 두말하지 않고 찬성하였다. 그도 그럴것이 요한나는 이미 임신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요한나의 결혼지참금으로 현금 2,000플로린스를 주었으며 더구나 알저포아슈타트(현재의 알저그룬트)에 있는 그럴듯한 저택까지 넘겨주었다. 그래서 요한나 부부가 잘 사는줄 알았는데 사건이 생겼다.

 

결혼한지 5년이 지난 1811년 7월의 어느날, 요한나는 누구의 부탁을 받고 무려 2만 플로린스에 해당하는 진주목걸이를 팔아주기로 했다. 일반 봉급생활자의 1년 평균 연봉이 1,000 플로린스를 넘지 못하는 것을 감안하면 대단히 비싼 물건이 아닐수 없다. 진주목걸이는 세 사람의 공동소유였다. 코요비츠(Kojowitz)부인, 엘리자베트 뒤샤토(Elisabeth Duchateau), 요셉 게쓰바르트(Josef Gessward)이다. 아마 세 여자가 서로 시간을 정해 놓고 진주목걸이를 소장하고 있다가 그 다음 선수에게 넘겨주곤 했던 모양이다. 세 여인 중에서 요한나에게 진주목걸이를 팔아달라고 맡긴 사람은 다코요비츠라는 부인이었다. 그런데 다음날, 요한나는 전날밤에 집에 도둑이 들어서 안방에 있던 보관상자를 부수고  진주목걸이 를 훔쳐갔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거짓인지 아닌지는 당장은 알수가 없었지만 나중에는 거짓말인 것으로 밝혀졌다. 아무튼 도난신고를 하고 경찰이 오자 요한나는 하녀인 안나 아이젠바흐(Anna Eisenbach)가 의심스럽다며 아무것도 모르는 하녀를 궁지로 몰아세웠다. 안나는 경찰서에 끌려가서 며칠씩이나 취조를 당했다. 그러나 증거가 없어서 석방되었다.

 

다음달 쯤해서 공동소유자 중의 한 사람이 길에서 우연히 요한나가 문제의 세줄짜리 진주목걸이 중에서 한 줄을 목에 감고 다니는 것을 목격하고 즉시 경찰에 고발하였다. 경찰에 끌려간 요한나는 결국 범행을 실토하였다. 진주목걸이 세줄 중에서 두 줄은 유태인인 아론 아비네리(Aaron Abineri)라는 사람에게 헐값인 4천 플로린스에 판 사실이 들어났다. 요한나는 당연히 감옥소에 가야 했지만 남편인 카스파르가 경찰간부에게 ‘우리 형이 황제와도 잘 알고 지내는 베토벤인데 좀 잘 봐주셔! 잉?’이라고 부탁하여 나중에 재판을 받기로 하고 1주일만에 임시로 풀려났다. 마침 그 경찰간부는 베토벤을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나중에 진주목걸이는 모두 되찾았다. 당시 카스파르는 세관공무원이었다.

 

정식 재판은 그해 12월 27일에 있었다. 재판과정에서 요한나가 여러 사람으로부터 수천 플로린스의 거금을 빌리고는 갚지 않고 있음이 추가로 밝혀졌다. 요한나는 남편이라는 작자가 하급공무원으로서(당시 공무원은 오늘날의 우리나라 공무원과는 달리 부수입도 없고 뇌물에 침을 흘리지 않았던것 같다) 벌이가 신통치 않아서 돈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12월 30일, 요한나는 사기, 횡령, 무고(하녀 안나를 도둑으로 몰았음)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요한나는 1년간의 중형자 수감을 선고받았다. 중형자 수감으로 판결을 받으면 발에 착고를 차고 있어야 하며 하다못해 소시지와 같은 육류가 들어간 음식은 배급받지도 못하고 침대가 아닌 나무판자 위에서 자야하며 간수 이외에는 어느 누구와도 얘기하지 못하였다. 남편 카스파르는 미우니 고우니해도 여편네이기 때문에 요한나의 감형을 위해서 열심히 뛰었다. 결과, 처음에는 2개월로 감형을 받았고 이어 1개월로 감형되었으며 나중에는 황제에게 청원한 것이 효력을 발휘하여 단 며칠동안 어물어물하다가 풀려났다. 요한나의 진주목걸이 사기사건과 1804년 결혼전에 부모의 패물을 훔쳐서 달아나다가 잡힌 사건 등은 나중에 베토벤과의 양육권소송에서 증거자료로 제출되었다. 남편 카스파르는 진주목걸이 사건이 있은지 4년후에 폐렴으로(실은 속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몇 년후 요한나는 자꾸 빚만 늘어나자 일부라도 갚기 위해 알저포아슈타트(Alservorstadt)에 집 한채 있던 것을 팔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빚은 계속 남았다.

 

(베토벤과의 양육권 분쟁)

아내 요한나가 진주목걸이 사기사건으로 경찰서에 끌려가기를 밥먹는 하는 통에 남편 카스파르는 살림이고 뭐고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어린 칼은 ‘아빠! 엄마 어디 갔어?’라면서 엄마를 찾았지만 차마 도둑질을 해서 경찰서에 끌려갔다고 얘기할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미 다섯 살로서 그런 분야에는 특히 영리한 칼은 대강 눈치를 채고 있었다. 카스파르는 창피하기도 하고 속이 상하기도 해서 어쩔수 없이 요한나와 칼을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무리하게 몸을 혹사하는 바람에 폐렴에 걸렸다. 1813년에 들어서서 카스파르의 병세는 더 심각해 졌다. 언제 요단강을 건너가게 될지 모르는 형편이었다. 더구나 폐렴은 전염된다는 생각 때문에 아들 칼의 양육이 큰 문제가 되었다. 카스파르는 법원에 통보하여 자기가 죽은 후 칼의 후견인으로서 삼촌인 베토벤을 지명하였다. 아내 요한나는 전과자였기도 했지만 사치를 즐겨하고 외상이라면 소도 잡아 먹는 성질 때문에 도저히 칼의 장래를 맡길수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815년, 카스파르는 죽기 2일 전에 유언장을 만들어 베토벤을 칼의 후견인으로 지명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분명히 했다. 그런데 같은 날,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으로 유언장에 보족서(補足書)가 붙었다. 추가사항이 붙은 것이다. 내용인즉, 요한나를 베토벤과 함께 칼의 공동 후견인으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서류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었다.

 

 

알저키르헤에 부착되어 있는 베토벤 기념 명판

 

당시 베토벤과 요한나는 그야말로 견원지간이나 마찬가지의 대단한 사이였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고집이라면 한 고집하는 베토벤인지라 제수인지 재수인지 뭔지가 하여튼 맘에 들지 않았고 요한나로서도 노총각협회 회장 격인 베토벤의 여러 가지가 못마땅하여 기회만 있으면 인신공격과 비방을 식은 죽 먹듯 하고 있었다. 베토벤과 요한나의 관계가 어느정도로 불편한가 하면 카스파르의 유언장을 보면 잘 알수 있다. 카스파르는 유언장에서 ‘나로 말하자면 형님인 베토벤과 아내 요한나가 서로 잘 지내지 못한다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아, 하나님이시여, 우리 아들 칼을 생각해서라도 두 사람을 화해시켜 주옵소서. 이것이 죽어가는 남편, 죽어가는 아버지의 마지막 소망이올시다’라고 썼다. 사람이 죽음을 앞두면 착해 진다고 하는데 카스파르도 그동안 형인 베토벤과 아내 요한나에게 잘못한 것을 뉘우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두 사람의 화해를 간절히 소망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카스파르의 이같은 간절한 소망은 헛수고였다. 카스파르가 세상을 떠난지 며칠도 되지 않아서 베토벤과 요한나 사이의 법적 분쟁이 드디어 대단원의 막을 올렸다. 다분히 감정적인 두 사람의 법정 싸움은 이후 4년 이상이나 지속되는 소모적인 것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변호인을 사서 법정에 수시로 출두하여서 어느 때는 승소를 하고 또 어느 때는 패소를 하는 것을 다람쥐 체바퀴 돌리듯 하였다. 결과적으로 베토벤이 칼의 양육권을 차지하게 되었지만 그건 베토벤 자신에게도 커다란 부담이었으며 아울러 칼에게도 큰 고통을 준 것이었다. 칼의 후견인으로 확정된 베토벤은 재판이 끝나자마자 칼을 기숙학교에 등록시켰다. 칼의 생모인 요한나는 아들을 잠시 방문할수 있다는 판결을 받았다. 이에 불복한 요한나는 1818년부터 또 다시 법적 대응을 시작하였다. 고등법원(Landrecht)은 이번에는 베토벤 가족의 이름에 붙은 van 이라는 것이 귀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사건을 지방법원으로 넘겼다. 지방법원은 요한나에 대하여 동정적이었다. 더구나 칼이 잠시 베토벤과 함께 살면서 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핑계로 며칠동안 빠져 나온 것을 참조하였다. 그런데 실은 칼은 불량끼가 다대하여서 일찍이 기숙학교에서도 퇴학을 당한 일이 있는데 그런 점은 고려되지 않았다.

 

마지막 법적 판결은 1820년에 있었다. 베토벤 측의 대리인인 친구 요한 밥티스트 바흐(Johann Baptist Bach)가 대단히 훌륭하게 사무를 처리하였고 더구나 베토벤은 귀족들과 잘 알고 지냈기 때문에 그 덕을 보아 유리한 판결을 받았다. 칼의 양육권은 영원히 베토벤에게 귀속한다는 판결이었다. 요한나는 다시 황제에게 청원하였지만 황제는 '이 여편네는 어찌하여 이다지도 나를 귀찮게 하시는가?'라면서 요한나의 청원을 거절했다. 한편, 1826년에 칼이 요한나의 집에서 자살을 기도한 사건이 발생했다. 베토벤이 바덴에서 요양하는 중에 칼이 권총 자살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칼은 겨우 목숨만은 건졌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말년의 베토벤도 생각을 고쳐잡고 요한나에 대한 마음을 누그러트렸다고 한다.

 

(말년의 요한나)

요한나는 카스파르가 세상을 떠난지 한 달 후에 아들 하나를 낳았다. 정말 대책 없이 대단한 여자였다. 남편 카스파르의 아이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라는 확증이 없었다. 카스파르는 몇 년째 폐렴에 걸려 골골 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런 무골충같은 사람이 무슨 재주로 요한나를 임신시켰겠느냐는 생각 때문이었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요한나는 1820년에 또 아이를 낳았다. 요한나가 아들 칼에 대한 양육권을 상실한 바로 그해였다. 이번에는 딸이었다. 루도비카 요한나(Ludovica Johanna)라고 불렀다. 나중에 아이 아버지는 돈많은 종(鐘)제작자인 요한 호프바우어(Johann Hofbauer: 1771-1839)로 밝혀졌다. 그는 결국 요한나에게 어느 정도의 돈을 떼어 주고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 것으로 합의하여 가정파탄만은 막았다. 그렇게 받은 돈도 아침 안개와 같은 것일뿐, 1824년 요한나는 생활비가 없어서 체면이고 뭐고 팽개치고 베토벤에게 돈 좀 달라고 떼를 썼다. 하숙방을 전전하던 베토벤에게 돈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대신 베토벤은 요한나가 미망인 연금을 받아 칼을 교육하는데 쓰도록 도와 주었다. 그런 것을 보면 베토벤도 인정미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일까? 베토벤은 1827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쯤해서 칼은 이미 20세가 넘는 성년이었다. 칼은 법적으로 베토벤의 유일한 상속인이었다. 요한나는 베토벤보다 무려 42년을 더 살다가 1869년에 세상을 떠났다.

 

베토벤은 세상을 떠나기 한해 전인 1826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요한나를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이라고 비난하였으며 심지어 ‘악마와 같은 여인, 심술궂은 여인, 믿을수 없는 여인’이라고 단언했다. 또한 기회만 있으면 요한나를 모차르트의 유명한 오페라 ‘마술피리’에 등장하는 ‘밤의 여왕’처럼 사악하다고 말했다. 베토벤의 이같은 견해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예를 들면 요한나의 친척이 되는 야콥 호체바르(Jakob Hotschevar)이다. 그는 베토벤과 요한나 사이의 양육권 소송에서 요한나의 법정 대리인이었다. 그러나 소송을 진행하는 중에 요한나의 못된 성질 때문에 질려서 앞으로는 죽으면 죽었지 더 이상 요한나의 문제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과연, 그는 요한나가 다시 찾아와서 딸인 루도비카의 법적 문제를 맡아 달라고 했을 때 한마디로 거절하였다. 그는 나중에 법정에서 요한나를 ‘도덕적으로 찬양을 받을 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는 여자’라고 증언했다. 이후 그는 요한나와 연락을 끊고 살았다. 이런 저런 사정을 보면 영화 ‘불멸의 연인’에서 요한나를 베토벤의 연인처럼 그려 놓았으며 요한나가 낳은 칼을 마치 베토벤의 아들인 것처럼 그린 것은 문제가 많다는 얘기이다. 이밖에도 별별 얘기가 많지만 지면상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