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베토벤의 사람들

베토벤의 어머니 마리아 막달레나(Maria Magdalena)

정준극 2010. 1. 27. 15:27

베토벤의 어머니 마리아 막달레나(Maria Magdalena)

슬픔의 쇠사슬에 얽매인 삶

 

베토벤의 어머니 마리아 막달레나 

 

온 인류가 존경하는 악성(樂聖) 베토벤의 어머니는 어떤 분이었을까? 베토벤은 아버지는 싫어했지만 어머니에게는 순종하였다. 베토벤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어린 시절에 마음을 의지할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예를 들면 어머니는 술에 취해서 들어온 아버지가 어린 베토벤을 구박할 때에 앞장서서 보호해 주었다. 그러므로 베토벤은 17세 때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침식을 잃을 정도로 무척 애통해 하였다. 어머니는 병으로 몸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이 비엔나로 가서 장래를 개척하겠다고 하자 장한 일이라고 하면서 오히려 격려하였다. 그리하여 베토벤은 비엔나에 와서 바야흐로 모차르트의 제자가 되어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하려는 순간에 아버지로부터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았다. 베토벤이 비엔나에 온지 두 달 후였다. 베토벤은 짐작은 했지만 이렇듯 빨리 어머니의 병환이 악화될줄은 몰랐다. 베토벤은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다시 본으로 갔다. 베토벤은 가까스로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볼수 있었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마친 청년 베토벤은 인생에 대하여 갈등을 가지게 되었다. ‘아, 인생이란 무엇인가? 왜 살아야 하나?’라는 의문이었다. 베토벤은 음악을 포기하고 평범하게 살아갈 생각을 수없이 했다. 그럴 때마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베토벤에게 ‘너, 그게 무슨 생각이냐? 너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가가 될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는 자에게 하늘의 보답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마음을 고쳐먹었다. 다시 비엔나로 돌아온 베토벤은 온갖 역경을 헤치고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가 되었다. 악성 베토벤의 뒤에는 그를 격려하고 지켜보며 후원한 어머니의 기도가 있었다.

 

베토벤의 어머니의 결혼 전 이름은 마리아 막달레나 케베리히(Maria Magdalena Keverich: 1746-1787)였다. 마리아의 아버지 하인리히 케베리히는 에렌브라이트슈타인(Ehrenbreitstein)의 트레브스(Treves)선제후 궁전의 주방장이었다. 그런 배경 때문인지 마리아의 장래 시아버지가 될 루드비히(베토벤의 할아버지)는 며느리가 되기 전의 마리아를 마치 하녀출신처럼 간주하였으나 일단 며느리가 된 후에는 상당히 점잖게 대하여 주었다. 실상 마리아의 집안은 하인처럼 대우받을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마리아의 친척 중에는 영주의 자문관도 있었고 상원의원도 있었으며 더구나 대부분 상당히 부유하였기 때문이었다.

 

마리아는 베토벤의 아버지와 결혼하기 전에 한번 결혼한 일이 있었다. 트레브스 선제후의 개인 발레(Valet: 시종, 특히 마부)였던 요한 라임(Johann Laym)이라는 사람과 16세의 비교적 어린 나이에 결혼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있었지만 어릴 때 세상을 떠났다. 남편 요한 라임은 마리아와 결혼한지 2년후에 세상을 떠났다. 마리아는 18세의 젊은 나이에 하루 아침에 미망인 겸 아이까지 있었던 여자가 되었다. 그래서 요한 반 베토벤(베토벤의 아버지)이 그의 아버지인 루드비히에게 마리아와 결혼하겠다고 하자 루드비히는 '하필이면 그런 여자냐?'면서 정말 내키지 않아했었다고 한다. 당시 루드비히는 궁정음악감독으로서 신임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한번 결혼했던 미천한 집안의 여자를 며느리로 맞아 들으면 체면에 약간 손상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한편, 마리아의 친정 아버지는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과부가 된 딸이 측은해서 못견딜 지경에 있었는데 딸이 요한 반 베토벤이라는 청년과 결혼하겠다고 하자 ‘참 잘 생각했다. 언제까지 혼자 살수는 없는 문제 아니냐!’면서 환영하며 에렌브라이크슈타인에서 결혼식을 아주 성대하게 올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사돈이 될 루드비히(베토벤의 할아버지)가 반대하였다. 루드비히는 그냥 본(Bonn)에서 조촐하게 냉수나 한 그릇 떠놓고 식을 올리는 것이 좋다고 주장했다. 마리아는 섭섭했지만 시아버지가 되는 루드비히의 말을 존중하여서 본에서 몇몇 친지들만 모인 가운데 간단한 결혼식을 올렸다.

 

   

베토벤 당시의 본에 있는 베토벤 생가와 현재의 베토벤 생가 기념관(오른쪽) 

 

결혼 후 마리아에게는 불행한 일들만 닥치는 것 같았다. 요한과 결혼하고 나서 첫 아들을 낳았지만 생후 6일만에 숨을 거두었다. 마리아는 요한과 열심히 노력하여 모두 여섯 자녀를 낳았는데 그중에서 아들 3명만 살아남았다. 두번째로 태어난 아들이 훗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가 되어 온 세계의 추앙을 받는 베토벤이고 그 다음이 나중에 공무원 생활을 했던 카스파르이며 막내가 나중에 약사가 된 니콜라우스였다. 마리아의 남편 요한은 결혼 전에는 그럴듯하게 생각되는 사람이었는데 정작 결혼하고 나서 보니 사람이 의욕도 없으면서 성질만 부리며 더구나 술을 너무 좋아해서 얼마 후에는 날이면 날마다 술에 절어 지내는 인생이었다. 남편 루드비히는 술 때문에 음악가로서 성공하겠다는 야망은 접어둔지 오래였다. 나중에 마리아는 친구에게 ‘아, 어찌하여 나의 결혼생활은 슬픔과 비탄의 쇠사슬에 얽매어 있어야 하는가?’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마리아는 착한 어머니였다. 1784년 라인강이 갑자기 범람하여 라인가쎄(Rheingasse)에 있는 집이 물에 잠기게 되었다. 마리아는 자기의 몸은 돌보지 않은채 세 아들을 지붕을 통하여 이웃집으로 피신토록 했다. 아마 그 때문에 마리아는 폐렴에 걸렸고 결국 3년 후인 1787년 7월 17일(우리나라의 제헌절)에 애석하게도 약 한 첩 제대로 쓰지 못한채 고생만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베토벤은 어머니 마리아가 세상을 떠나기 두 달전에 청운의 뜻을 품고 제국의 수도인 비엔나로 떠났다. 비엔나에 온 베토벤은 모차르트를 만났고 모차르트는 베토벤의 음악적 재능과 열정에 감동하여 베토벤을 정식 제자로 삼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곧이어 본의 아버지가 베토벤에게 편지를 보내어 어머니가 매우 위독하니 당장 오라는 기별을 넣었다. 베토벤은 비엔나에 발을 들여 놓은지 두 달 만에 다시 본으로 돌아와서 어머니 마리아의 임종을 보았고 장례식을 치루었다. 그리하여 모차르트로부터 개인지도를 받을 기회를 잃었다.

 

악성 베토벤의 어머니 마리아는 어떻게 생겼을까? 다행히 초상화가 하나 남아 있지만 너무 작은 것이어서(미니에이처) 이러저러하게 생긴 분이라고 정확히 말할수 없는 처지이다. 하지만 마리아의 이웃들과 친구들은 마리아가 날씬하고 키가 큰 편이며(베토벤은 키가 작은데) 얼굴이 길죽하고 코는 약간 매부리코이며 눈은 법 없이도 살만큼 순진하였다고 한다. 이웃사람들은 마리아가 웃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좋은 일도 없는데 바보처럼 웃고만 지낼 형편이 아니어서 그랬던 것 같다. 이웃들은 마리아가 항상 말수가 적고 신중했으며 절약하는 생활을 했다는 말도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