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베토벤의 사람들

베토벤의 막내동생 니콜라우스 요한 반 베토벤

정준극 2010. 1. 27. 15:41

베토벤의 막내동생 니콜라우스 요한 반 베토벤(Nicolaus Johann van Beethoven)

보통 요한이라고 부르는 린츠의 천박한 약사

 

베토벤의 막내 동생 니콜라우스 요한. 린츠에서 약국을 경영했다.

                                 

니콜라우스 요한 반 베토벤(Nikolaus Johann van Beethoven: 1776-1848)은 베토벤의 막내 동생이다. 니콜라우스는 형 베토벤을 따라 1795년 본에서 비엔나로 왔다. 비엔나에 온 니콜라우스는 요한이라는 이름만 사용했다. 나콜라우스라는 이름은 어쩐지 러시아식 인상을 주기 때문에 순수 독일이름인 요한만을 사용한 것이다. 니콜라우스는 아버지인 요한을 기억하여서 요한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베토벤은 동생이 니콜라우스라는 이름 대신에 요한을 사용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아버지 요한에 대한 생각하기 싫은 기억 때문이었다. 동생 요한은 본에서부터 약사가 되는 공부를 했다. 비엔나에 온 요한은 어떤 약국의 조수로 취직할수 있었다.

 

요한이 비엔나에 온지도 13년이 지났다. 요한은 그동안 모은 돈으로 린츠에 있는 어떤 약국을 샀다. 장사가 잘 안되어서 문을 닿을 지경이었다. 요한은 우연히 약국의 선반 구석에서 옛 약단지 두 개를 발견했다. 순영국제 주석으로 만든 단지였다. 당시 나폴레옹은 영국과의 어떤 교역도 금지하였다. 따라서 영국제품은 무엇이든지 품귀여서 비싸게 팔렸다. 요한은 순영국제 주석단지 두 개를 비싼 값에 팔아서 어느 정도의 빚을 갚을수 있었다. 또 하나의 행운은 창고에서 아름답게 만든 주물(鑄物) 철책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도 비싸게 팔아 빚의 일부를 갚았다. 요한은 이럭저럭하여 파산은 면했다. 이듬해인 1809년 나폴레옹군이 오스트리아를 침공해 왔다. 나폴레옹군은 비엔나를 포위하고 사령부를 린츠에 설치하였다. 나폴레옹군의 부상병들은 모두 야전사령부가 있는 린츠로 후송되었다. 린츠에서 약국을 경영하는 요한은 나폴레옹군의 야전병원에 의약품들을 납품하여 상당한 돈을 벌었다. 물론 상당수의 린츠 사람들은 독일에서 온 이상하게 생긴 요한이 적군을 도와주며 돈을 벌고 있기 때문에 매국노라고 비난하였지만 요한은 그런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된 요한은 비엔나 서쪽 도나우강 연안 크렘스(Krems) 부근의 그나익센도르프(Gneixendorf)에 커다란 장원을 샀다. 베토벤은 조카 칼과 함께 이 장원에서 말년의 마지막 한 해를 지낸 일이 있다.

 

베토벤이 그나익센도르프에서 지냈던 방. 지금은 기념관은 아니지만 베토벤을 생각하게 하는 몇가지 물건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베토벤과 동생 요한은 일반적으로 그다지 사이가 나쁘게 지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나중에는 몇가지 문제 때문에 의견이 맞지 않아 크게 언쟁을 벌인 일이 있다. 우선 동생 요한의 결혼문제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1812년 요한은 린츠의 자기 집에서 하녀로 있는 테레제 오버미아어(Therese Obermeyer: 1787-1828)와 결혼하겠다고 당당하게 선언했다. 베토벤은 반대했다. 가문이 형편없는 여자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당시 테레제는 이미 어떤 놈팡이와 놀아나서 사생아인 딸까지 하나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도 요한은 테레제와 결혼하겠다고 난리를 폈다. 베토벤은 그런 형편없는 여자가 Beethoven이라는 이름을 쓰게 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교구주교를 찾아가서 만일 요한과 웬 여자(테레제)가 와서 결혼식을 올려 달라고 하면 무조건 거절해 달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주교는 그런 것은 사생활 문제이므로 개입하기 싫다면서 베토벤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러자 베토벤은 린츠 시당국을 찾아가 테레제를 린츠에서 추방해 달라고 요청했다. 린츠시민으로 등록하지 않은 떠돌이라는 이유였다. 하지만 시당국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마침내 베토벤과 요한은 결혼문제를 놓고 주먹다짐까지 벌이는 촌극을 연출했다. 베토벤은 동생이라는 작자가 도무지 큰형인 자기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자 너무 화가 나서 ‘그래 어디 잘 먹고 잘 살아 봐라’는 말과 함께 비엔나로 돌아왔다. 요한과 테레제는 그해 11월 8일 린츠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베토벤의 막내 동생 요한과 결혼한 테레제 오버마이어

                                       

베토벤의 바로 아래 동생인 카스파르 칼의 결혼도 결국은 불행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요한의 결혼도 결국은 불행한 것이었다. 베토벤의 말을 듣지 않아서였을까? 아무튼 요한과 테레제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테레제가 혼전에 딸까지 낳은 경력이 있으므로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테레제의 잘못이라고만 볼수 없는 일이었다. 베토벤의 집안은 어찌된 일인지 세 아들이 모두 결혼복이 없으며 따라서 자식복도 없었다. 요한은 형제중에서 그나마 가장 지성적이지 못했다. 간단히 말해서 천박했다. 베토벤을 보라. 나폴레옹이 보고 싶다고 오라고 했는데도 꿈쩍하지 않고 가지 않았다. 괴테와 함께 거리를 거니는데 지체 높은 왕족들과 귀족들이 지나가자 괴테는 모자를 벗어 들고 공손히 인사를 하며 예의를 차렸지만 베토벤은 모자를 벗기는 커녕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괴테가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저들이 나에게 인사를 해야지 어찌하여 내가 저들에게 인사를 해야 한단 말입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요한은 어떠했는가? 요한은 그나익센도르프에 장원을 사고 나서 베토벤에게 편지를 보내어 장원을 샀으니 놀러 오라고 기별을 넣었다. 그러면서 서미(書尾)에 ‘지주인 동생 요한 보냄’(Landowner)라고 썼다. 자기의 돈 많음을 은근히 자랑하고 싶어서였다. 베토벤은 답장을 보내면서 말미에 ‘정신적인 지주인 형 보냄’(Brain owner)라고 썼다. ‘야 이놈아, 돈 좀 있다고 그렇게 으스대는 것이 아니야’라는 뜻이었다.

 

베토벤의 장례식에는 어느 왕후장상의 장례식보다도 많은 시민들이 몰려와서 애도하였다. 요한은 형 베토벤이 정말로 위대한 인물인줄을 그제야 깨달았다. 요한은 베토벤이 서거한후 마치 자기야 말로 형 베토벤을 가장 존경했고 가장 많이 도와주었다는 식으로 행세하였다. 베토벤의 서거후 비엔나를 비롯하여 린츠, 그라츠, 잘츠부르크 등지에서는 베토벤 추모음악회가 자주 열렸다. 그럴 때면 요한은 푸른색 정장을 하고 커다란 흰 장갑을 끼고 언제나 맨 앞줄에 앉아 하나의 악장이 끝날 때마다 '브라보'라며 소리를 지르고 박수를 쳐댔다. 일반적으로 연주회장의 맨 앞줄에는 정말로 베토벤을 존경하는 유지들이 앉는다. 만일 황제가 왔다면 역시 맨 앞줄에 앉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요한은 베토벤의 유일한 동생이라는 생색을 내며 맨 앞줄에 앉아서 주책없이 아무 때나 박수를 치고 소리를 지르며 자기의 존재를 알리는데 주력했다. 사람들은 그런 요한을 꼴불견이라고 생각했고 나중에는 연주 중에 박수를 치지 않을 곳에서 박수를 치는 사람을 '요한과 같은 녀석'이라며 핀잔을 주었다. 요한은 연주회가 아닌 다른 모임에서도 베토벤의 유일한 동생이라는 점을 노골적으로 나타내 미움을 사기도 했다. 요한은 베토벤과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베토벤은 작은 키에 약간 험상궂은 얼굴이며 고집스러운 표정이지만 요한은 우선 키가 장대하고 얼굴이 넓적하게 길며 코가 유난히 컸다. 그리고 한쪽 눈은 불쑥 튀어나온 것처럼 보였다. 그런 요한이 베토벤을 추모하는 연주회장에 나와 박수를 치고 소리를 지르니 가관은 가관이었다. 요한은 1848년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2세였다. 앞서 말한 대로 자녀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