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베토벤의 사람들

독일의 작가 요한 고트프리트 조이메

정준극 2012. 11. 21. 11:24

요한 고트프리트 조이메(Johann Gottfried Seume)

베토벤이 존경했던 독일의 작가. '월광' 소나타에 영향을 준 인물

 

요한 고트프리트 조이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번인 '월광'(Mondlicht: Moonlight)에 노래가 포함될 수도 있었다. 독일의 저명한 작가인 요한 고트프리트 조이메(Johann Gottfried Seume: 1763-1810)의 '기원하는 여인'(Die Breterin)이라는 시가 '월광 소나타'의 도입부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독일의 음악교사인 게오르그 크리스토프 그로스하임(Georg Christoph Grosheim: 1764-1841)이 베토벤에게 조이메의 시를 소나타에 넣으면 어떻겠냐고 문의하였으며 베토벤은 그 아이디어를 찬성하였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베토벤과 조이메는 평소에 만난 일은 없지만 베토벤은 조이메를 존경하였으며 그의 작품을 애독하였다. 베토벤이 임종할 때에 그는 곁에는 조이메의 작품집 두 권이 있었던 것만 보아도 알수 있는 일이었다.

 

조이메는 1810년 6월에 독일의 북쪽, 덴마크와 가까운 곳에 있는 테플리츠(Teplitz)에서 세상을 떠났다. 베토벤은 이듬해 8월에 3주간, 이어 1812년 여름에도 이곳에 잠시 머문 일이 있다. 연주여행의 일환이었지만 테플리츠에서 휴양도 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베토벤은 이곳에서 세상을 떠난 조이메의 묘지를 방문하고 추모했다고 한다. 조이메의 묘지를 찾아가 보았던 베토벤은 카셀 출신의 음악교사인 그로스하임에게 편지를 보내어 조이메에 대한 존경하는 마음을 표현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한참 후인 1819년 11월에 그로스하임은 베토벤에게 편지를 보내어 조이메의 시를 '월광 소나타'의 도입부에 노래로서 포함하면 어떻겠느냐고 문의하였다.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는 이미 오래전인 1801년에 완성한 것이다. 그로샴은 '월광 소나타'의 느린 도입부에 조이메의 시에 의한 노래를 넣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제시했던 것이다.

 

베토벤에게 깊은 영향을 준 요한 고트프리트 조이메는 어떤 사람인가? 조이메는 독일의 작가로서 라이프치히에서 가까운 포제르나(Poserna)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현재는 작소니 안할트 주의 뤼첸에 속한 마을이다. 조이메는 라이프치히의 성니콜라이학교(St Nikolaisschule)를 거쳐 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문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라이프치히의 성니콜라이학교는 나중에 리하르트 바그너가 다녔던 학교로서 유명하다. 조이메는 대학교에서 문학을 공부하면서 영국의 작가이며 철학자, 정치인인 안토니 샤프테스베리(Anthony Shaftesbury: 1671-1713)과 역시 영국의 철학자이며 정치인인 헨리 생 존 볼링브로우크(Henry St John Bolingbroke: 1678-1751)의 사상과 문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라이프치히를 떠나 영국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영국으로 가는 도중 파리에서 헤센의 모병관에게 붙잡혀서 영국에 팔리는 신세가 되었고 그후 캐나다 병사로 강제로 징집되어 캐나다로 떠날 운명이었다. 조이메는 1783년에 브레멘에서 탈영하였다. 그러나 곧 체포되어 엠덴(Emden)이란 곳으로 이송되었다. 조이메는 두번째로 탈출코자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1787년에 엠덴의 사는 어떤 사람이 조이메를 존경하여서 80 탈러라는 보석금을 지불하여 고향을 방문할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조이메는 고향으로 가서는 다시는 귀대하지 않았다. 나중에 조이메는 엠덴의 그 사람에게 빚을 갚았다고 한다. 영어 소설을 독일어로 번역하여서 번 돈으로 갚았다고 한다.

 

조이메는 한때 라이프치히에서 외국어를 가르쳤으며 그후 이겔슈트롬 백작의 가정교사가 되었고 1792년에는 그의 비서로서 그와 함께 바르샤바를 여행하였다. 이때 그는 공포의 폴란드의 봉기를 직접 목격하였다. 코치우츠코(Kosciuszko) 봉기였다. 몇 년후 조이메는 이겔수트롬 백작의 비서를 사임하고 라이프치히로 돌아와 고셴이라는 출판사에 들어가 일을 하기 시작했다. 1801년에 그는 9개월에 걸친 시실리 여행을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나온 것이 1803년의 '시라큐스로의 여행'(Spaziergang nach Syrakus)였다. 그후 그는 러시아, 핀랜드, 스웨덴, 덴마크 등을 여행하며 '1805년의 나의 여름'(Mein Sommer im Jahr 805)라는 저서를 남겼다. 건강이 갑작스럽게 나빠진 조이메는 테플리츠(현재는 체코공화국에 속함)로 돌아와 지내다가 1810년에 세상을 떠났다.

 

테플리츠에 있는 요한 고트프리트 조이메의 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