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베토벤의 사람들

쾰른선제후 막시밀리안 프란시스 대주교

정준극 2012. 4. 2. 18:14

쾰른선제후 막시밀리안 프란시스 대주교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프란시스 대공

 

청년시절의 베토벤을 크게 후원한 막시밀리안 프란시스 대주교 겸 쾰른선제후

 

쾰른선제후인 막시밀리안 프란시스(1756-1801)는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프란시스(Maximilian Francis) 대공이라고도 부른다. 굳이 오스트리아의 아무개라고 호칭하는 것은 황제의 자녀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신성로마제국황제이며 오스트리아 대공인 프란스시 1세와 합스부르크의 마리아 테레지아 사이에서 태어난 15명의 자녀 중에서 막내아들이다. 나중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오스트리아의 대공의 자리를 이어받은 요셉2세와 레오폴드2세는 모두 그의 형이며 프랑스의 마리 앙뚜아네트(마리아 안토니아), 두 시실리의 마리아 카롤리나 왕비 등은 그의 누이이다. 그는 베토벤이 음악인으로서 활동할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후원자였다. 그리하여 만일 막시밀리안 프란시스의 후원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위대한 베토벤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막시밀리안 프란시스는 모차르트와도 인연이 있다. 그는 모차르트와 같은 해인 1756년에 태어났다. 막시밀리안 프란시스는 1775년에 잘츠부르크 대주교를 방문하러 갔던 일이 있다. 그때는 막시밀리안 프란시스가 아직 쾰른선제후와 대주교가 되기 전으로 비엔나에 살고 있던 때였다. 당시 잘츠부르크 대주교는 히에로니무스 폰 콜로레도(Hieronymus von Colloredo)였다. 모차르트의 아버지인 레오폴드와 청년 모차르트도 콜로레도 대주교에게 봉사하고 있었다. 콜로레도 대주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아들로서 훗날 쾰른선제후가 될 막시밀리안 프란시스가 잘츠부르크를 방문한다고 하니까 성의를 다해서 환영해야 했다. 당시에는 그런 환영행사의 하나로 새로운 오페라를 공연하는 것은 관례였다. 콜로레도 대주교는 모차르트에게 막시밀리안 프란시스를 환영하는 오페라를 만들어 달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하여 모차르트가 6주만에 완성한 오페라가 '목동 왕'(Il re pastore)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자비를 보여주는 내용이다. '목동 왕'은 1755년 4월 23일 잘츠부르크의 대주교 궁전에서 초연되었다.

 

막시밀리안 프란시스가 누이인 프랑스의 마리 앙뚜아네트를 만나고 있는 장면. 옆에는 루이 16세

 

막시밀리안 프란시스는 비엔나의 호프부르크 궁전에서 태어났다. 그는 1780년, 즉 그가 24세 때에 삼촌인 샤를르 알렉산더 공자의 후임으로 독일기사단(Teutonic Knights)의 총본부장(Grand Master)이 되었다. 이어 28세 때인 1784년에는 쾰른선제후 및 대주교가 되어 본(Bonn)에 있는 선제후궁에서 지내기 시작했다. 그는 180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쾰른선재후 및 대주교로 있었다. 그래서 1790년 그의 형인 레오폴드 2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되는 선거에 참여했고 1792년에는 조카인 프란시스 2세(나중에 오스트리아제국의 프란시스 1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뽑히는 선거에 참여했다.

 

막시밀리안 프란시스가 태어난 비엔나 중심지역의 호프부르크 궁전

 

막시밀리안 프란시스는 음악 애호가이면서 후원자였다. 그는 본에 부임하면서 궁정오케스트라를 본격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베토벤의 아버지인 요한 반 베토벤은 막시밀리안 프란시스에게 봉사하는 궁정 채플의 테너였다. 실제로 막시밀리안 프란시스는 어린 베토벤의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어린 베토벤은 막시밀리안 프란시스 궁정의 음악원에 다니며 공부했으며 베토벤의 할아버지인 루드비히 반 베토벤(위대한 작곡가 베토벤과 이름이 같음)도 막시밀리안 프란시스 궁정에서 카펠마이스터로 있었다. 그러므로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 프란시스는 실로 베토벤과 무관한 관계가 아니다.

  

본의 대주교 궁전. 현재 본대학교 건물

 

막시밀리안 프란시스 궁정의 오르가니스트는 크리스티안 고트로브 니페(Christian Gottlob Neefe)였다. 그가 바로 어린 베토벤의 음악선생이었다. 니페는 어린 베토벤의 뛰어난 연주실력과 작곡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막시밀리안 프란시스에게 베토벤을 궁정 채플의 보조 오르가니스트로 고용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막시밀리안 프란시스도 어린 베토벤의 재능을 크게 인정하였다. 그리하여 1787년에는 베토벤을 비엔나로 보내어 모차르트에게 배우도록 했다. 막시밀리안 프란시스는 일찌기 19세 때에 잘츠부르크에서 모차르트를 만난 일이 있다. 베토벤은 비엔나에 갔지만 몇 달후에 다시 본으로 돌아와야 했다. 어머니가 병에 걸려 걱정이라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베토벤의 어머니는 그가 본에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세상을 떠났다. 1792년에 막시밀리안 프란시스는 또다시 베토벤의 장래를 위해 비엔나에 보내기로 했다. 모차르트는 불행하게도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요제프 하이든과 안토니오 살리에리 등에게서 음악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 베토벤에게는 궁정 보조 오르가니스트로서 봉급을 계속 주었다. 막시밀리안 프란시스는 베토벤의 활약에 대하여 계속 깊은 관심을 가지고 주시하였다. 하이든은 제자로서 베토벤의 진도를 막시밀리안 프란시스에게 편지를 보내어 보고하였다. 막시밀리안 프란시스는 베토벤이 본으로 돌아와 자기에게 봉사하게 될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베토벤은 비엔나에 남아 있으면서 경력을 쌓기로 했다.

 

베토벤이 본에서 지낼 때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음악스승인 크리스티안 고트로브 니페

 

막시밀리안 프란시스의 통치력은 1794년 프랑스 혁명으로 위기를 맞게 된다. 나폴레옹 전쟁 기간동안 쾰른과 본은 두번에 걸쳐 프랑스군에게 점령당하였다. 1794년 10월과 11월이었다. 막시밀리안 프란시스는 프랑스군이 진격해 오자 본을 떠나 다시는 본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가 통치하던 라인강 왼쪽 지대는 1801년의 뤼네빌죠약(Treaty of Luneville)에 의해 프랑스로 넘어갔으며 이에 따라 대주교 궁정도 해산되었다. 막시밀리안 프란시스는 비록 뮌스터와 베스트팔리아 공국을 비롯한 라인의 우안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비만증에 건강이 악화되어 비엔나로 돌아가서 1801년 4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헤첸도르프 궁전에서 지냈다. 베토벤으로서도 본의 대주교 궁정이 와해되자 더 이상 본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게 되어 비엔나에 계속 머물수가 있었다. 베토벤은 그의 교향곡 제1번을 막시밀리안 프란시스에게 헌정하려고 했으나 완성하기도 전에 그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대로 되지 못하였다. 성배에 대한 음모론(Conspirary theory)에 따르면 막시밀리안 프란시스는 시온수도회의 제22대 총본부장이라고 한다.

 

막시밀리안 프란시스가 비엔나에서 말년을 지냈던 비엔나 근교의 헤첸도르프 궁전. 지금은 유명한 패션학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