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오페라의 황제 베르디

론꼴레의 프랑스인

정준극 2010. 1. 30. 10:34

론꼴레의 프랑스인

역경 속의 참 인간상

 

론콜레 베르디 마을의 비아 베르디(Via Verdi) 1번지에 있는 베르디 생가. 마당에 베르디의 흉상이 있다.

                        

베르디가 프랑스국적으로 태어났다고 하면 믿겠는가? 하지만 사실이다. 베르디는 부세토(Busetto)라는 마을의 인근에 있는 르 론콜(Le Roncole)에서 태어났다. 르 론콜? 그건 론꼴레의 프랑스식 표기이다. 당시 프랑스 제1제국은 그곳에 있던 파르마와 피아첸자 공국(Duchy of Parma and Piacenza)을 합병하여 통치하였다. 오늘날의 피아첸자(Piacenza)지방은 당시에 타로지방(Department Taro)이라고 불렀다. 타로지방의 르 론콜레에서 태어난 베르디는 당연히 당세의 정세에 따라 프랑스 국적으로 태어났다. 물론 나중에는 파르마가 통일된 이탈리아에 속하기 때문에 베르디는 당연히 이탈리아 국적을 되찾게 되었다. 베르디는 태어난 다음날 마을성당에서 로마 가톨릭 전례에 의한 세례를 받았다. 당시의 성당 기록에 의하면 ‘어제 태어난’(born yesterday) 아무개 씨의 아들이 10월 11일 세례를 받았다고 되어 있다. 태어난 다음날에 세례를 받았으므로 태어난 날은 10월 10일이 된다. 하지만 당시에는 보통 하루의 시작을 해가 진후부터 계산하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그러므로 그 전날에 태어났다고 하면 10월 9일이 될수도 있다. Le Roncole는 오늘날 Roncole Verdi(론꼴레 베르디)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부세토의 베르디광장에 있는 베르디 기념상

                   

베르디의 아버지는 세례를 받은 다음날 베르디를 데리고 부세토까지 가서 출생신고를 하였다. 당시에는 출생신고를 하려면 반드시 아이를 데리고 가서 공무원에게 보여주었던 것 같다. 마을사무소의 직원은 베르디의 이름을 프랑스 스타일로 조셉 포르튀냉 프랑수아(Joseph Fortunin Francois)라고 기록했다. 그리하여 베르디는 변화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프랑스인으로 태어났다. 사족: 베르디의 아버지는 카를로 주세페 베르디(Carlo Giuseppe Verdi)였고 어머니는 루이지아 우티니(Luigia Uttini)였다. 베르디의 이름과 관련하여 Giuseppe Verdi를 영어로 번역하여 Joseph Green이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정확한 것이 아니다. Verdi라는 단어는 Green의 복수형이다. 그러므로 영어로 굳이 쓰고 싶다면 Joseph Greens로 적어야 할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뮤지컬 코미디언인 빅토 보르즈(Victor Borge)는 Joe Green이라는 예명을 사용하였다. 그러면서 원래의 예명은 주세페 베르디이지만 무대에서는 영어식으로 조 그린(Joe Green)이라고 부르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아니, 자기를 감히 오페라의 황제와 비교하다니!

 

   

론 콜레 베르디에 있는 베르디의 흉상. 소년 베르디의 재능을 인정하여 베르디를 후원한 부세토의 음악애호가 안토니오 바레찌. 나중에 베르디는 바레찌의 딸 마르게리타와 결혼하였다.

                   

베르디의 아버지는 베르디가 아직 어릴 때에 장래의 교육을 위해 부세토 마을로 이사를 갔다. 베르디는 이곳에 있는 예수회학교의 도서관을 자주 찾아가서 공부를 했다. 또한 부세토에서 처음으로 작곡 레슨을 받았다. 베르디는 20세 청년일 때에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위해 밀라노로 갔다. 밀라노에서는 대위법 레슨을 받았으며 아울러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오페라를 보며 오페라에 대한 소양을 높였다. 하지만 베르디는 밀라노음악원에는 입학하지 못했다. 밀라노는 베르디가 첫 오페라를 발표한 곳이며 마지막 오페라도 발표한 곳이다. 밀라노에서 부세토로 돌아온 그는 마을 상인이며 음악애호가인 안토니오 바레찌(Antonio Barezzi)의 도움을 받아 마을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었다. 베르디의 아버지 카를로 베르디의 친구인 안토니오 바레찌는 베르디를 오랫동안 후원해준 인물이다. 베르디가 처음으로 자기의 작품을 대중 앞에 선보인 것은 1830년 바레찌의 저택에서였다. 베르디의 음악을 사랑한 안토니오 바레찌는 베르디에게 딸 마르게리타(Margherita)의 음악선생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다. 곧이어 베르디와 마르게리타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아멘.

 

베르디가 활동할 당시의 라 스칼라극장(그림)

 

두 사람은 1836년 5월 4일 부세토의 성녀 트리나타 교회(Oratorio della Santissima Trinata)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베르디가 23세였고 마르게리타는 22세였다. 두 사람은 부세토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결혼 이듬해에 딸이 태어났다. 비르지니아 마리아 루이지아(1837.3-1838.8)였다. 비르지니아는 1년을 조금 넘기고 세상을 떠났다. 비르지니아가 세상을 떠나기 한 달전에 아들이 태어났다. 이칠리오 로마노(Icilio Romano: 1838.7-1839.10)였다. 아들 이칠리오도 태어난지 1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에는 유아 사망률이 매우 높았었다. 모두 부세토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한 어려운 때인 1839년, 베르디의 첫 오페라인 Oberto가 라 스칼라에서 막을 올렸다. 성공하지 못했다. 아들 이칠리오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꼭 1년 후인 1840년 10월, 이번에는 사랑하는 아내 마르게리타가 세상을 떠났다. 아마도 두 아이를 잃은 어머니로서 상심이 컷을 것이고 그로 인하여 병마가 찾아와서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베르디의 애통함은 이루 말할수 없었다. 베르디는 가족을 잃은 다시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작정한 후 거의 20년 동안 독신으로 지냈다. 그러다가 1859년에 자기를 진정으로 아껴주는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와 재혼하였다. 주세피나 스트레포니는 베르디보다 4년 먼저 저 세상으로 갔다. 재혼한지 38년이 지난 때였다.

  

   

(왼쪽) 베르디의 첫 부인인 마르게리타 바레찌. 26세의 젊은 나이로 두 아이를 잃은 후에 세상을 떠났다.        

(오른쪽) 베르디의 두번째 부인 주세피나(페피나). 1897년 세상 떠나기 전의 모습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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