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오페라의 황제 베르디

리골레토와 레퀴엠

정준극 2010. 1. 30. 10:35

리골레토와 레퀴엠

인간애의 작곡가 베르디

 

폭풍우가 지나간 후에는 햇빛이 비치는 것처럼 베르디에게도 어려운 시절이 지나가고 영광의 시대가 찾아왔다. 1851년 베니스에서 초연된 리골레토는 베르디의 명성을 하루아침에 떨치게 한 것이었다. 물론 리골레토에도 사소한 어려움이 있었다. 리골레토의 원작은 빅토르 위고의 Le roi s'amuse(일락의 왕)이었다. 당국은 ‘일락의 왕’을 오페라로 만든 것에 대하여 내용이 합당하지 못하다고 트집을 잡으며 공연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일락의 왕’은 몇 번에 걸쳐 대본을 수정해야 했으며 제목도 리골레토로 바꾸었다. 리골레토는 대성공이었다.

 

오페라 '리골레토'의 한 장면. 만투아공작궁에서의 연회

 

리골레토의 성공에 힘입은 베르디는 평소부터의 아이디어인 뮤지컬 드라마에 인간적인 문제, 사회적인 이슈를 반영하는 칵테일을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코미디에 비극이라는 이질적인 내용을 혼합코자 생각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음악이 대중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팝송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거리의 가난한 사람이라도 좋아할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이었다. 리골레토의 음악적 구성은 다양하다. La donna e mobile는 밴드 뮤직과 같은 것이었다. 유명한 4중창인 Bella figlia dell'amore는 이탈리아적인 멜로디이다. 리골레토와 스파라푸칠레의 듀엣은 실내악적 분위기이다. 여기에 리골레토와 몬테로네의 아리아에 하이 C를 넘어서는(C#) 높은 음정을 사용했다. 그 이전의 이탈리아 오페라에서는 하이 C를 넘는 아리아가 거의 없었다. 그렇게까지 높은 소리를 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페라 '리골레토'에서 만투아공작역의 엔리코 카루소

 

이어서 베르디 오페라의 중기(中期)에 해당하는 Il Trovatore(일 트로바토레: 로마)와 La Traviata(라 트라비아타: 베니스)가 나왔다. 모두 1853년에 초연되었다. 1855년부터 1867년까지의 10여년의 기간동안은 그야말로 베르디의 전성기였다. Un ballo in maschera(가면무도회: 1859), La forza del destine(운명의 힘: 1862), 그리고 Macbeth(맥베스: 1865)의 수정본이었다. 이밖에도 파리오페라가 위촉한 Les vepres siciliennes(시실리의 만종: 1855), Don Carlos(돈 카를로: 1867)가 프랑스어 대본으로 초연되었다. 오늘날 ‘시실리의 만종’과 ‘돈 카를로’는 주로 이탈리아어 버전으로 공연되고 있다. 1857년에는 Simon Boccanegra(시몬 보카네그라)가 나왔다.

 

베르디의 '레퀴엠이 초연된 밀라노대성당(두오모)

 

1869년 베르디는 로시니를 추모하는 진혼곡(Requiem)의 한 파트를 작곡하여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베르디는 로시니를 위한 진혼곡이므로 로시니 시대의 이탈리아 작곡가들이 합동하여 완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베르디는 진혼곡 사업을 주도한 지휘자 안젤로 마리아니(Angelo Mariani)가 성의가 없어서 일이 진행되지 않았다고 책망을 하였다. 안젤로 마리아니는 베르디의 친구였으나 진혼곡 문제로 사이가 멀어져 평생을 상대하지 않고 지냈다. 당시 유명한 소프라노인 테레사 슈톨츠(Teresa Stolz)는 마리아니와 결혼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베르디가 마리아니의 성의 없음을 비난하자 테레사는 여러가지로 생각 끝에 결혼문제를 없던 것으로 되돌렸다. 1871년 카이로에서 '아이다'의 초연이 있게 되자 베르디는 마리아니와의 지나간 문제는 접어두고 화해의 제스추어로서 '아이다' 초연의 지휘를 부탁하였다. 하지만 마리아니가 마음을 풀지 못하고 모처럼의 호의를 거절하였다. 여기에는 아마 마리아니가 약혼자인 테레사 슈톨츠와의 문제도 개재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슈톨츠는 나중에 베르디와 일종의 로맨틱한 관계를 가졌다는 얘기가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그로부터 5년후 베르디는 당초 로시니를 위한 진혼곡에 사용하려고 작곡한 Libera Me 부분을 다시 손질하여 자신의 진혼곡의 한 파트로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모차르트의 진혼곡, 포레(Faure)의 진혼곡과 함께 세계 3대 진혼곡의 하나인 베르디의 진혼곡이 완성되었다. 베르디는 그의 진혼곡을 막역한 친구로서 1873년에 서거한 시인 알레산드로 만조니(Alessandro Manzoni)를 위해 헌정하였다. 베르디의 진혼곡은 1874년 5월 22일 밀라노 대성당에서 초연되었다. 테레사 슈톨츠가 소프라노 솔로 역할을 맡았다. [테레사 슈톨츠는 베르디의 두번째 부인인 주세피나가 세상을 떠나자 그때로부터 베르디의 동반자로서 베르디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4년여 동안 베르디의 곁에서 그를 보살펴주었다.]

 

베르디 '레퀴엠'의 초연에서 소프라노 솔로를 맡은 테레사 슈톨츠. 1872년 라 스칼라에서의 '아이다' 이탈리아 초연에서 타이틀 롤을 맡아 음악사에 기록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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