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오페라의 황제 베르디

황혼과 죽음

정준극 2010. 1. 30. 10:38

황혼과 죽음

베토벤과 토스카니니

 

 

 사진으로 남아 있는 베르디의 모습 1890년대

 

1871년의 '아이다' 이후, 베르디는 새로운 작품의 작곡에서는 손을 떼고 다만 이미 완성한 '돈 카를로스', '운명의 힘', '시몬 보카네그라' 등에 대한 수정작업만을 하며 지냈다. '오텔로'가 밀라노의 무대에 올려진 것은 아이다 이후 16년만의 일이었다. 오텔로는 지금까지의 오페라에 비하여 완전히 다른 개념으로 완성된 작품이다. 지금까지의 오페라는 이른바 넘버(numbers)에 의한 개념이었다. 아리아든지 합창이든지 중창이든지 하나하나가 마치 독립된 곡목처럼 되어 전체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콘서트의 레터토리로서도 쉽게 채택할수 있었다. 그러나 '오텔로'의 음악은 처음부터 끝까지 연결된 것이었다. 개별적인 넘버로 나눌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오텔로'에서는 지난날 베르디 오페라에서처럼 물이 흐르는 듯한 멜로디의 아리아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오텔로'가 베르디의 대표적인 비극적 오페라로서 가장 아름답고 감정이 풍부한 음악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며 찬사를 보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과거의 작품만을 생각하여서 ‘어, 이건 좀 다르네. 이게 아닌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깊이 있는 오케스트레이션을 들어본 후에는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다고 한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는 '오텔로'의 초연에서 첼로주자로 활동했다. 이후 베르디와는 친분을 다지며 평생을 지냈다. 토스카니니는 베르디를 베토벤과 같은 위대한 인물로 간주하여 존경해 마지않았다.

 

베르디의 장례식장면. 진실로 황제의 예에 의한 장례식이었다.

   

밀라노 시내에서 카사 베르디로 가는 베르디 장례 행렬 그림

                                 

베르디의 마지막 오페라인 '활슈타프'(Falstaff)는 셰익스피어의 원작 Merry Wives of Windsor(윈저의 유쾌한 아낙네들)를 빅토르 위고가 번역한 것을 역시 아리고 보이토가 대본으로 만든 작품이다. '활슈타프'는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사람들은 ‘아니, 베르디에게도 이처럼 코믹한 면이 있었나?’라면서 놀라워했다. '활슈타프'는 베르디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베르디의 마지막 순수 오케스트라 작품은 1894년에 만든 발레곡이다. '오텔로'의 프랑스 제작을 위해 작곡한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어떤 오페라든지 발레곡이 들어가야 직성이 풀리기 때문에 베르디로서도 어쩔수 없이 오텔로를 위한 발레곡을 만들었다. 그리고 1897년에는 정말로 마지막으로 전통적인 라틴어 대본의 Stabat Mater(성모애상)을 완성했다. Stabat Mater는 베르디가 완성한 마지막 4편의 성곡(Quattro Pezzi Sacri) 중 마지막 작품이다. 4편의 성곡은 혼성합창을 위한 Ave Maria(아베 마리아), 혼성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Stabat Mater(성모애상), 여성합창을 위한 Laudi alla Vergine Maria(동정녀 성모찬양), 더블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Te Deum(테 데움: 감사찬양)이다. 4편의 성곡은 각각 연주되는 경우고 있고 한꺼번에 연주되는 경우도 있다. 이 4편의 성곡은 1898년 4월 7일 파리 그랜드 오페라에서 초연되었다.

 

카사 디 베르디의 베르디의 묘소

 

1900년 7월 29일 이탈리아의 움베르트 왕이 저격을 당하여 숨을 거두었다. 이 사건은 이탈리아 통일운동에 적극적이었던 베르디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는 것이었다. 이후로 베르디의 건강은 점점 쇠약해졌다. 베르디는 밀라노의 그랜드 호텔에 머무는 중인 1901년 1월 21일 심장마비의 증세를 보였다. 이제 베르디는 너무 쇠약해 져서 거동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그로부터 엿새 후인 1월 27일 오페라의 황제는 저 세상으로 떠났다. 그 엿새 동안 밀라노의 전시민은 물론, 세계가 베르디의 병세에 대하여 걱정을 아끼지 않았다. 인류의 역사에서 한 사람의 병세를 전세계가 걱정을 아끼지 않았던 일도 아마 베르디의 경우 이외에는 없었을 것이다. 장례식에서는 토스카니니가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오케스트라는 사실상 이탈리아의 전역에서 스스로 올라온 연주자들로 구성되었다. 820여명으로 구성된 합창단은(주로 라 스칼라 합창단) 베르디의 시신이 그랜드 호텔에서 Casa Di Riposa의 묘지로 갈 때 나부코에서 ‘히브리 포로들의 합창’인 Va, pensiero를 불렀다. '날아라 내 마음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모두들 목이 메어 제대로 부르지 못했다. 하지만 이들의 합창은 멀리 르 론꼴레까지 울려 퍼졌을 것이다. 묘지에서 하관할 때에는 합창단이 오페라 Il Trovatore(일 트로바토레)에 나오는 Miserere(미제레레)를 불렀다. 베르디의 장례식은 오늘날까지도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많은 군중이 모인 것이었다.


밀라노의 카사 베르디 앞의 광장에 세운 베르디 기념상. 1913년 에니코 부티(Enrico Butti)가 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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