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오페라의 황제 베르디

참고자료 2 테레사 슈톨츠

정준극 2010. 1. 30. 10:47

참고자료 2

베르디의 마지막을 보살펴준 당대의 소프라노 테레사 슈톨츠

아이다의 유럽초연에서 타이틀 롤

 

 테레사 슈톨츠

 

보헤미아 출신의 소프라노인 테레사 슈톨츠(Teresa Stolz: 1834-1902)는 두 번째 부인인 주세피나와 사별한 베르디를 마지막 임종시까지 옆에서 보살펴준 갸륵한 여인이다. 테레사는 베르디에게 무려 21살 연하이지만 베르디가 서거한 다음 해에 향년 69세로서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테레사가 베르디를 저 세상으로 먼저 떠나보내고 도저히 이 세상에서 살수 없어서 뒤따라가기로 결심한것 같다고 말했다. 테레사는 한동안 베르디의 숨겨놓은 애인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숨겨놓은 애인이든지 아니든지 아무튼 테레사는 베르디에게 헌신적이었다. 베르디를 진정으로 존경해서였다. 테레사는 위대한 소프라노였다. 그는 세계초연을 갖는 베르디의 오페라에 여러번 출연하여 주인공의 이미지들을 창조하였다. 테레사는 베르디 오페라에 가장 적합한 소프라노였다. 베르디의 여주인공들의 모습을 참으로 완벽하게 표현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테레사를 베르디안 드라마틱 소프라노라고 불렀다. 테레사의 음성은 힘이 있고 열정적이며 아울러 위엄이 있었다. 그리고 톤과 컬러가 결코 불안하지 않았다.

 

테레사 슈토츠는 1834년 오스트로-헝가리제국에 속한 코스텔레크(Kostelec nad Labem)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체코공화국이다. 테레사는 프라하음악원에서 공부했다. 테레사는 가정사정상 프라하에서 공부할 수가 없어서 오빠가 살고 있는 트리에스테로 갔다. 당시 트리에스테도 오스트로-헝가리제국의 통치 아래에 있었다. 테레사는 트리에스테에서 루이지 리치(Luigi Ricci)로부터 음악을 배웠다. 루이지 리치는 1848년에 베르디의 Il corsaro(해적선)의 세계초연을 지휘했던 사람이다. 테레사의 첫 오페라 데뷔는 1857년, 23세 때에 티플리스(Tiflis)라는 도시에서였다. 어떤 오페라에 출연했었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모른다. 아무튼 테레사는 놀라운 재능으로 인기를 끌어 이후 흑해연안의 오데싸, 터키의 콘스탄티노플, 프랑스의 니스, 스페인의 그라나다에서 모습을 보였다. 테레사는 1864년 오페라의 메카라고 하는 밀라노로 가서 오페라 수업을 본격적으로 받았다. 테레사는 그 해에 토리노에서 본격적인 오페라 데뷔를 하였으며 1865년부터 1877년까지 10년 이상을 라 스칼라에 고정 출연하여 정상의 소프라노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다.

 

테레사가 태어난 체코의 코스텔레츠 나드 라벰(Kostelec nad Labem) 중심지역

 

                  

테레사는 1869년 라 스칼라에서 베르디의 ‘운명의 힘’ 수정본의 초연에 출연하였고 ‘돈 카를로’ 수정본의 초연에서도 엘리사베타를 맡았다. 베르디와의 인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아이다’때문이었다. 테레사는 1872년 2월 8일 ‘아이다’의 라 스칼라 초연에서 타이틀 롤을 맡았다. ‘아이다’의 세계초연은 그 전해인 1871년 12월 카이로에서 있었다. 베르디는 카이로의 초연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밀라노에서 '아이다'가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공연될 때에 막이 오르기 전까지 모든 분야에 깊이 관여하였다. 베르디는 '아이다'의 밀라노 초연을 정식 세계 초연으로 간주하였다. 그러한 공연에서 테레사가 주역인 아이다를 맡아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였던 것이다. 테레사는 또한 1874년 5월 22일 베르디의 레퀴엠의 세계초연에서 소프라노 솔로를 맡았다. 이듬해인 1875년 베르디는 런던의 로열 앨버트 홀에서 레퀴엠을 직접 지휘하게 되었다. 테레사는 이때에도 소프라노 솔리스트로 출연하였다. 이어 그해에 비엔나의 아이다 초연과 1876년의 파리 초연에도 타이틀 롤을 맡았다. 테레사는 아이다의 대명사였다.  

라 스칼라에서의 아이다 초연 때의 테레사 슈톨츠.

 

테레사는 수많은 오페라에 출연하였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Lucrezia Borgia(도니제티)의 타이틀 롤, Norma(벨리니)의 타이틀 롤, Giovanna d'Arco(베르디)의 타이틀 롤, Guillaume Tell(로시니)의 마틸드, Robert le diable(마이에르베르)의 알리스, Un ballo in maschera(베르디)의 아멜리아, Rigolette(베르디)의 질다, Otello(베르디)의 데스데모나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테레사는 진정한 베르디 소프라노였다. 테레사는 모스크바, 생페터스부르크, 카이로, 팔레르모, 볼로냐, 밀라노, 비엔나, 파리, 런던을 주름잡으며 오페라에 출연했다.

 

테레사 슈톨츠

 

테레사와 지휘자인 안젤로 마리아니(Anngelo Mariani)의 관계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잘 알려진 가십이었다. 테레사는 오래동안 마리아니의 나쁘게 말하면 정부, 좋게 말하면 애인이었다. 그러다가 1871년(카이로에서 아이다가 초연된 해)에 두사람의 관계는 종지부를 찍었다. 이유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가 분분했다. 실상 베르디와 안젤로 마리아니는 좋은 친구사이였다. 베르디는 마리아니에게 1871년 12월 카이로의 ‘아이다’ 초연을 지휘해 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마리아니가 베르디에게 ‘지휘 좀 하게 해 달라’고 부탁해도 될까 말까한 입장인데 사람 좋은 베르디가 친구를 생각해서 마리아니에게 역사적인 ‘아이다’의 세계초연의 지휘를 부탁했던 것이다. 그런데 마리아니는 ‘아, 좋지요, 하지요’라고 말하지 않고 ‘글세 두고 봅시다. 곧 알려드리지요’라면서 확답을 질질 끌었다. 시간만 자꾸 지나도록 지휘자가 결정되지 않아서 연습에 차질이 생기자 베르디는 속이 탔다. 속이 탔을뿐만 아니라 마리아니의 우유부단함에 대하여 화가 났다. 베르디는 마리아니를 더 이상 친구로 간주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마리아니가 베르디를 곤란하게 만든 것은 자기의 정부인 테레사가 베르디와 가깝게 지낸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마리아니는 테레사에게 화를 버럭버럭내며 ‘어떻게 그대가 베르디와 섬싱을 가질수 있느냐?’면서 난리를 쳤다고 한다. 당시 진짜로 테레사가 베르디와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는 아무런 증거가 없어서 확실치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하여 마리아니와 베르디의 사이는 단절되었고 아울러 마리아니와 테레사의 사이도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베르디의 '레퀴엠' 초연 장면. 베르디가 지휘했으며 테레사 슈톨츠가 솔리스트 중의 하나로 출연했다. 맨 오른쪽이 테레사 슈톨츠이다.

                          

‘아이다’는 1872년 2월에 라 스칼라 초연이 예정되었다. 테레사가 타이틀 롤을 맡게 되었다. 꼼꼼한 베르디는 ‘아이다’의 라 스칼라 초연을 위해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관여하였다. 베르디가 주역인 테레사와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베르디는 지금까지 어떤 여주인공과도 그만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예가 없었는데 테레사와는 참으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노래와 연기에 대한 자문을 하였다. 당시 물론 베르디는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와 결혼하여 지내고 있던 터였다. 베르디는 주세피나에게 성실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런 베르디가 설마 한참 연하의 테레사와 그렇고 그런 사이일 것이라고는 짐작도 하지 않았다. 다만, 거장 작곡가와 유명 소프라노와의 친분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아이다’의 라 스칼라 초연은 테레사 슈톨츠의 놀라운 역할로 대성공이었다. 문제의 지휘자인 마리아니는 이듬해인 1873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말년의 베르디와 가까웠던 사람들. 베르디의 왼쪽이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이며 오른쪽 끝이 테레사 슈톨츠이다.

 

1875년 9월 4일 플로렌스(피렌체)의 Rivista independente라는 신문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테레사 슈톨츠의 사생활을 자세하게 파헤치는 특집을 게재하기 시작했다. 이 신문은 결론적으로 테레사와 마리아니의 비정상적인 관계를 비난했으며 이어 테레사와 베르디도 그러면 안된다는 식으로 몰고 나갔다. 이후로 사람들은 참으로 바쁘지도 않은지 베르디와 테레사의 관계에 대하여 백인이면 백인이 모두 다른 아이디어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말들을 많이 만들어냈다. 이탈리아 사람들의 다혈질적이며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성질은 세계적이다. 그러므로 매일처럼 마리아니-테레사-베르디-주세피나의 4자 관계에 대하여 소설을 쓰는 것쯤은 누워서 피자 먹는 정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얘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젊은 시절의 테레사 슈톨츠

 

그럴수록 얘기의 내용은 점점 복잡해졌다. 그럴 때에 주세피나가 테레사에게 보낸 편지 몇장이 공개되었다. 편지는 ‘나의 사랑하는 테레지나(Teresina)여, 언제나 변함없는 좋은 친구여’라는 내용으로 시작되는 것이었다. 테레사를 테레지나라고 다정스럽게 부르는 것은 정말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힘든 일이다. 그렇다면 주세피나와 테레사는 서로 마음을 터놓으며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다고 볼수 있다. 그러한 입장에서 테레사와 베르디 사이에 섬싱이 있다고 하는 것은 감히 감이 잡히지 않는 일이다. 그럭저럭하여 테레사와 베르디의 스캔들에 대한 소설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여 심심하던 판에 이번에는 참으로 곤란하게도 주세피나가 테레사에게 보낸 편지가 실은 가짜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사람들은 그러지 않아도 속편이 궁금하던 차에 또 다시 입방들을 찧기 시작했다. 그후로 이 문제의 진실은 과연 무엇인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지나갔다. 테레사와 베르디와의 사이가 플라토닉한 것이었는지 그렇지 않으면 로맨틱한 것이었는지는 당사자들만 아는 일로 남았다. 그나저나 테레사는 주세피나가 세상을 떠난 이후 4년이라는 기간동안 베르디의 옆에 있으면서 베르디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헌신적으로 그를 보살펴주었다. 대단한 순애보였다. 테레사 슈톨츠는 베르디가 서거한 다음해인 1902년에 밀라노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양반이 바로 저 유명한 루이지 리치이다.

 

테레사에게는 두 여동생이 있었다. 프란체스카(홰니)와 루드밀라(리디아)라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쌍둥이였다. 정말 똑같이 생겼다고 한다. 게다가 둘다 소프라노였다. 프란체스카와 루드밀라는 둘 다 지휘자이며 작곡가인 루이지 리치(Luigi Ricci)의 제자가 되었다. 루이지 리치라고 하면 베르디의 두번째 부인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와도 무관한 사이가 아니었다. 주세피나가 소프라노로서 첫 데뷔한 작품이 루이지 리치의 오페라 Chiara Di Rosembergh(로젬버그의 키아라)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이 루이지 리치라는 사람은 카사노바의 친척쯤 되는지 쌍둥이 자매인 프란체스카 및 루드밀라와 동시에 연애를 하였다. 말이 고상해서 연애이지 실은 그렇고 그런 사이였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얼굴이 똑같이 생긴 쌍둥이 자매와 연애를 하되 서로 까맣게 모르게 연애를 했다니 재주가 기막히게 대단하다고 말하지 않을수 없다. 얼마후 루이지 리치는 그래도 몇시간이라도 젊다고 생각하여 동생 루드밀라와 결혼하였다. 그런데 루이지 리치는 동생 루드밀라와 결혼한 후에도 쌍둥이 언니인 프란체스카와 관계를 맺으면서 지냈다. 그러면 안되는데 말이다.

 

밀라노에 있는 테레사 슈톨츠의 묘

 

루이지 리치는 루드밀라와의 사이에서 딸 하나를 두었다. 아델라이데(렐라)로서 역시 소프라노였다. 테레사의 조카인 아델라이데는 보헤미아의 유명한 작곡가인 스메타나와 좋아 지내다가 결국은 임신까지 하게 되었다. 아델라이데는 임심중절 수술을 받다가 잘못되어 목숨을 잃었다. 아델라이데가 21세 때였다. 한편, 루이지 리치는 프란체스카와의 사이에서도 아들 하나를 두었다. 아버지의 이름과 같은 루이지 리치였다. 역시 지휘자 겸 작곡가로 활동했다. 아들 루이지 리치는 이모인 테레사가 세상을 떠나자 테레사의 유산을 상속받았으며 이름도 루이지 리치-슈톨츠(Luigi Ricci-Stolz)라고 바꾸었다. 테레사의 손자뻘이 되는 사람이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오페레타 작곡가인 로베르트 슈톨츠(Robert Stolz: 1880-1975)이다. 테레사가 태어난 현재의 체코공화국의 코스텔레크(Kostelec)에는 테레사 슈톨츠 기념관이 있다.

 

로베르트 슈톨츠는 테레사 슈톨츠의 후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