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오페라의 황제 베르디

참고자료 3 비토리오 에마누엘 2세

정준극 2010. 1. 30. 10:50

참고자료 3

비토리오 에마누엘 2세

이탈리아 리스르기멘토의 주역

 

비토리오 에마누엘2세

 

19세기 말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에마누엘2세에 대하여 얘기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대체로 그가 누구인지 알아서 무엇을 하느냐고 말할 것이다. 근대 이탈리아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거나 또는 특별히 베르디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일반인으로서는 비토리오 에마누엘에 대하여 흥미가 없다. 그러면 베르디와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았다. 베르디는 1813년에 태어나서 상당히 장수하여 1901년에 세상을 떠났다. 비토리오 에마누엘은 1820년에 태어나서 1878년에 세상을 떠났다. 베르디의 이력서에 비토리오 에마누엘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1887이다. 그러므로 비토리오 에마누엘이 세상을떠난지 거의 10년만에 그의 이름이 재등장한 것이다. 1887년에 비토리오 에마누엘의 이름이 등장한 것은 그 해에 오페라 오텔로가 밀라노에서 초연된 것과 관련이 있다. 오텔로에 감격한 시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비바 베르디’(Viva VERDI)라고 외쳤으며 건물의 벽에도 페인트로 Viva VERDI라고 썼다. 이때의 VERDI는 잘 아는대로 두가지 의미를 함께 포함하는 것이었다. 오텔로를 작곡한 애국자 베르디를 찬양하는 의미이기도 했지만 이탈리아의 통일을 염원하여 초대 이탈리아왕이었다가 얼마전 세상을 떠난 비토리오 에마누엘을 추모하고 그분의 조국통일에 대한 정신을 이어받자는 의미이다. 그리하여 기왕에 이것저것 베르디에 대한 얘기를 하는 중이므로 비토리오 에마누엘이 어떤 양반인지 살펴보자.

 

밀라노 거리에서 비바 베르디라고 쓰는 시민들

 

비토리오 에마누엘2세(영어로는 Victor Emanuel: 1820-1878)는 1849년부터 1861년까지 피에드몽(Piedmont)-사보이-사르디니아의 왕이었으며 1861년 2월에는 통일 이탈리아의 첫 국왕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다. 이탈리아 국민들은 그를 Padre della Patria(조국의 아버지: Father of the Fatherland)라고 불렀다. 지금도 파드레 델라 파트리아라고 하면 비토리오 에마누엘를 말하는 것으로 당장 안다. 더구나 로마의 거창한 비토리오 에마누엘 기념관은 로마관광 1번지이므로 잊을수가 없다. 이 기념관에는 1차대전중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묘소가 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의 아버지는 사르디니아의 샤를르 알베르(Charles Albert)이며 어머니는 오스트리아와 투스카니의 마리아 테레자(Maria Theresa)였다. 마리아 테레자는 그 마리아 테레자와 이름만 같을 뿐, 다른 사람이다. 예전에는 이름들이 길었다. 대개 출신지를 표시하였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통치하고 있는 지역의 이름을 자기의 이름에 붙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유럽에 작은 나라들이 무수히 많았다. 그러므로 자기가 어느 나라를 대표하는지를 명시해야 남들이 알아주었다. 그래서 이름들이 ‘사르디니아의 샤를르 알베르’ ‘오스트리아와 투스카니의 마리아 테레자’등이 되었던 것이다.

 

베르디를 만나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의 아버지는 부인이 오스트리아 출신이지만 오스트리아에 대항하여 싸웠다.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의 통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저 유명한 노바라(Novara)전투에서 오스트리아의 명장 라데츠키 장군에게 대패하였다. 비토리오 에마누엘의 아버지는 오스트리아와의 전투에서 패배한데 대한 책임을 지고 왕위에서 물러났다. 그리하여 당시 49세의 비토리오 에마누엘가 피에몽-사르디니아의 국왕이 되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는 곧이어 라데츠키와 상당히 유리한 휴전조약을 체결할수 있었다. 하지만 비토리오 에마누엘의 마음속에는 이탈리아인에 의한 이탈리아라는 생각이 가득찼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는 1852년 카미요 디 카부르(Camillo Di Cavour)를 수상으로 임명했다. 카부르는 이탈리아 통일을 열망하는 비토리오 에마누엘의 오른팔 역할을 하였다. 그로부터 비토리오 에마누엘는 이탈리아 통일(리소르기멘토)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토리노에 있는 카부르 수상 기념상.

 

비토리오 에마누엘과 카부르 수상의 합작품 중의 하나는 피에드몽-사보이-사르디니아가 영국과 프랑스의 편에 서서 러시아에 대적하는 크리미아 전쟁에 참여한 것이다. 사실 당시에는 이탈리아로서 어느 편에 서야할지가 큰 숙제였다. 잘못하여 전쟁에 질 나라들의 편에 섰다가는 패가망신을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영국이나 프랑스는 변덕이 죽끓듯 하는 나라들이기 때문에 전쟁후에 어떤 보상을 받을수 있는지도 미지수였다. 그리고 러시아는? 영국과 프랑스가 원정경기를 치루는 대신에 러시아는 홈그라운드에서 전쟁을 벌인다는 이점이 있다. 더구나 러시아는 대국이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과 카부르 수상은 이런저런 고민 끝에 결국 영국과 프랑스의 편에 서기로 했다. 과연, 현명한 판단이어서 크리미아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였다. 전쟁이 끝날 즈음에 카부르 수상은 프랑스의 나폴레옹3세와 비토리오 에마누엘과의 비밀회담을 주선하였다. 만일 피에드몽이 이탈리아 북부에서 오스트리아를 몰아내기 위해 전투를 벌이면 프랑스가 지원하며 이에 대한 보답으로 니스와 사보이를 소유한다는 협상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아직도 북부 롬바르디-비네치아(베니스)를 점령하고 있었다. 당시 비토리오 에마누엘의 피에드몽-사보이-사르디니아 왕국은 롬바르디-베네치아 왕국과 별개의 것이었으나 이미 비토리오 에마누엘이 이탈리아 전역에 리소르기멘토의 심볼로 알려졌기 때문에 비토리오 에마누엘이 롬바르디-베네치아를 대신하여 프랑스와 협상하는 데에는 누구도 이의가 없었다.

 

1859년, 비토리오 에마누엘을 앞장세운 이탈리아와 나폴레옹2세의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군을 이탈리아 북부에서 몰아내는 전투는 성공적으로 시작되었다. 오스트리아군은 알프스 너머로 패주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역전의 오스트리아군도 만만치 않았다. 공연한 사상자를 낼 것을 두려워한 나폴레옹3세는 비밀리에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셉 황제와 협상하였다. 결과, 비토리오 에마누엘은 롬바르디만 차지하며 베니스는 계속 오스트리아에 남도록 하였으며 대신 프랑스는 예정대로 니스와 사보이를 차지한다는데 합의하였다. 도니제티의 프랑스어 대본으로 된 ‘연대의 딸’은 바로 이 전쟁 중에 일어난 일을 주제로 한 것이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는 카부르 수상을 해임하였으나 구관이 명관이라고 하듯 그만한 인물이 없어서 다시 카부르를 기용하였다. 카부르는 프랑스와 협상을 하여 중부 이탈리아 공국에서 주민투표를 시행하여 과연 이들이 어느 나라에 속하고 싶은지를 결정토록 합의하였다. 나폴리와 시실리 공국이 주민투표를 실시하여 피에드몽-사르디니아 공국과 통합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이탈리아는 전국 통일에 한걸음 다가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비록 전체 이탈리아의 통일은 아니지만 상당지역이 하나의 깃발 아래 통일이 되어 이른바 이탈리아왕국이 발족되었고 초대 국왕으로서는 비토리오 에마누엘이 비토리오 에마누엘1세로서 대관식을 가졌다. 이탈리아의 백성들은 비토리오 에마누엘이 조국 통일을 완성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한편, 비토리오 에마누엘과 교황과의 웃기지도 않는 관계에 대하여 설명코자 한다. 당시 교황은 비오9세(Pius IX)였다. 교황이면 교황답게 무욕심이어야 하는데 이 양반은 욕심이 많아서 교황에게 영토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그는 바티칸공국만으로는 도저히 만족할수 없다고 하여 인근지역, 특히 무주공산인 지역을 교황청 군대를 동원하여 점령하고 교황청의 열쇠 깃발을 게양하였다. 대표적인 점령지는 카스텔휘다르도(Castelfidardo)였다. 비토리오 에마누엘은 군대를 보내어 카스텔휘다르도의 교황청군대를 바티칸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교황이 차지하였던 영토를 통일 이탈리아왕국에 편입하였다. 백성들은 당연히 이같은 조치를 환영하였다. 하지만 교황은 체면이 말이 안될 정도로 구겨져서 속이 상할대로 상해 있었다. 교황은 전가의 보도를 꺼내 들었다. 파문(Excommunication)이었다. 교황은 비토리오 에마누엘을 파문하였다. 옛날 같으면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하면 곧 죽음과 마찬가지여서 벌벌 떨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사람들은 ‘파문 좋아하네!’라고 말하게 되었다. 더구나 교황이란 양반이 깨춤을 추면서 이탈리아 통일의 상징이며 애국자인 비토리오 에마누엘을 파문하였으므로 백성들은 픽픽 웃으며 기왕에 교황을 신이 아니라 옹졸한 인간으로 보았다. 결과적으로 비토리오 에마누엘에 대한 지지도만 높아졌다.

 

비토리오 에마누엘이 리소르기멘토 운동을 열심히 펼치고 있을 때에 저 남쪽에서 주세페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라는 용맹한 장군이 등장하여 역시 이탈리아의 통일이라는 기치를 높이 들었다. 가리발디 장군은 우선 ‘두 시실리왕국’(Kingdom of the Two Sicilities)를 함락하여 이탈리아왕국에 병합하였다. 가리발디 장군은 내친 김에 로마로 진군하였다. 당시 로마는 교황청의 산하에 있으면서 프랑스의 보호를 받았다. 그러므로 만일 가리발디 장군이 로마를 공격하면 교황청에게도 미안한 노릇이며 프랑스에게도 미안한 노릇이 된다. 비토리오 에마누엘은 가리발디 장군에게 우선 좀 참으로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는 한편, 1860년에 투스카니, 모데나, 파르마, 로마냐(Romagna)가 주민투표를 통하여 비토리오 에마누엘의 피에드몽-사르디니아와 통합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덧붙여서 비토리오 에마누엘은 1860년 카스텔휘다르도에서 교황청 군대를 격파한 여세를 몰아 마르케(Marche)와 움브리아(Umbria)로 당당하게 진군하였다. 새로운 이탈리아 왕국은 점차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1849년 가리발디 장군이 로마를 프랑스군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고 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은 테아노(Teano)라는 곳에서 가리발디 장군과 회동하여 가리발디로부터 남부 이탈리아에 대한 통치권을 이양 받았다. 1861년 3월, 신생 이탈리아 왕국은 토리노(Torino)를 수도로 정하였다. 이제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로마, 베네토(Veneto), 트렌티노(Trentino)만이 이탈리아 왕국에 복속하지 않고 있었다. 몇 년후인 1866년(한국에서 배재학당이 문을 연 해) 비토리오 에마누엘은 프러시아와 손을 잡고 이른바 제3차 이탈리아독립전쟁을 일으켰다. 프러시아와 연합하였다고 해서 프러시아군이 이탈리아까지 와서 이탈리아 왕국군과 함께 전투에 참가한다는 것이 아니라 프러시아군이 프러시아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전투를 벌이면 그 틈을 이용하여 이탈리아 왕국군이 이탈리아에 있는 오스트리아군을 무찌른다는 전략이었다. 프러시아와의 연합전쟁은 커다란 성과가 없었다. 그렇지만 비토리오 에마누엘은 독일에서 오스트리아가 패하자 반대급부적으로 이탈리아반도에서 베네토(Veneto)를 수중에 넣게 되었다. 한편, 1871년에는 비토리오 에마누엘은 로마에서 프랑스군이 철수하자 마침내 로마에 입성하였고 곧이어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를 토리노에서 로마로 옮겼다. 베르디는 카부르 수상시절에 1961년부터 의회의원을 지낸 일이 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이 테아노에서 주세페 가리발디를 만나다

 

프랑스군이 로마에서 철수한 것은 보불전쟁에서 프러시아가 프랑스에 승리하였기 때문이었다. 베르디의 오페라 ‘시실리의 만종’이나 ‘두명의 포스카리’ 등은 이탈리아가 프랑스의 점령 아래 있을 당시의 스토리이다.

이렇듯 이탈리아 반도가 거의 모두 통일되자 비토리오 에마누엘은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비토리오 에마누엘1세라고 부르던 것을 비토리오 에마누엘2세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러자 백성들은 이같은 명칭변경을 상당히 찜찜하게 생각했다. 백성들은 새로운 왕국이 들어서면 통치자의 이름도 새롭게 바꾸며 나아가서 입헌군주국으로서 백성들이 중심이 되는 정치가 실현될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런데 비토리오 에마누엘이 비토리오 에마누엘2세로 칭한 것은 결국 이탈리아 왕국이 피에드몽-사르디니아 공국을 계승한다는 의미가 아니냐는 생각들이었다. 백성들은 속으로 끙끙거렸지만 별수가 없으므로 참고 지냈다. 게다가 비토리오 에마누엘은 국제정치문제보다는 경제문제, 문화문제에 치중하였으므로 정통성에 대한 앙앙은 물에 물탄듯 슬며시 가라앉았다. 비토리오 에마누엘은 1878년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판테온에 안치되었다. 후임자는 아들 움베르토1세였다.

 

로마의 비토리아 에마누엘2세 기념상. 이탈리아 통일기념관이라고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