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오페라의 황제 베르디

참고자료 4 밀라노 그랜드 호텔

정준극 2010. 1. 30. 10:52

참고자료 4

밀라노 그랜드 호텔

베르디가 서거한 장소

 

베르디가 서거한 장소인 밀라노의 그랜드 호텔

                             

밀라노의 자부심인 그랜드 호텔은 오페라의 황제 베르디가 자주 머물렀던 곳이며 더구나 1901년 1월 27일 그가 서거한 장소로서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이 호텔의 한쪽 벽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이탈리아어 명판이 부착되어 있다.

 

“THIS HOUSE HOLDS THE MEMORY OF GIUSEPPE VERDI WHO WAS A PRESTIGIOUS GUEST AND WHO DIED HERE on 27TH JANUARY 1901. THIS PLATE WAS AFFIXED on THE FIRST ANNIVERSARY OF THIS DEATH BY THE MUNICIPALITY OF MILAN AND WITH THE UNANIMOUS CONSENSUS OF THE PEOPLE TO REMEMBER THE MAESTRO WHO REVIVED ITALIAN HEARTS WITH CELESTIAL HARMONIES, DESIRE AND HOPE FOR A MOTHERLAND".

 

이 내용을 굳이 번역하자면 “이 호텔에는 주세페 베르디에 대한 추억이 담겨 있다. 귀중한 투숙객이었던 베르디는 이곳에서 1901년 1월 27일 서거하였다. 이 명판은 거장의 1주기를 기념하여 밀라노시가 모든 시민의 한결같은 추모의 정을 담아 설치하였다. 베르디는 천상의 화음으로 이탈리아인들의 조국통일에 대한 열망과 희망을 일깨워 주었다”이다.

 

그랜드 호텔의 베르디가 서거한 방

                                       

오늘날 밀라노 그랜드 호텔(Grand Hotel et de Milan)이라고 부르는 이 호텔의 처음 명칭은 Albergo Di Milano(알베르고 디 밀라노)였다. 알베르고라는 말은 여관이란 의미이다. 1863년 5월 23일 토요일에 정식으로 그랜드 오프닝을 가졌다. 건축책임자는 안드레아 피짤라(Andrea Pizzala)로서 그는 일찍이 1831년에 밀라노의 명물인 피아짜 델 리버티의 크리스토포리스 갤러리아(Galleria De Cristoforis)를 설계한바 있다. 처음 알베르고 디 밀라노를 완성했을 때에는 현재의 규모보다 상당히 적었다. 그러다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증축과 보수를 병행하여 오늘날의 규모가 되었다.

 

밀라노 그랜드 호텔의 로비

                                   

밀라노 그랜드 호텔의 건축양식은 보통 ‘고딕 리바이벌’(Gothic Revival)이라고 부른다. 정면부분과 상단의 장식들은 이른바 네오-고딕 양식이다. 19세기에 말에 이 호텔에서는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전보와 우편서비스를 취급하였다. 때문에 주로 외교사절들과 중요한 비즈니스맨들이 이용하였다. 현재 그랜드 호텔은 200개의 객실을 보유하고 있다. 초창기에 설치한 슈티글러(Stigler) 수압식 승강기는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다. 그랜드 호텔은 비록 규모는 작지만 겨울정원이 유명하며 화려하게 장식된 식당은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이 식당에는 ‘돈 카를로’라는 명칭이 붙어 있다. 1867년 라 스칼라에서 초연된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Don Carlo)를 기념하는 식당이다. 라운지는 세 개가 있다. 베르디 라운지, 푸치니 라운지, 조르다노 라운지이다. 밀라노 사람들은 그랜드 호텔을 간단히 Milano(밀라노)라고 부른다. 택시를 타고 '밀라노에 갑시다'라고 말하면 군말 없이 밀라노 그랜드 호텔로 데려다 준다. 밀라노 그랜드 호텔의 주소는 비아 만조니(Via Manzoni) 29번지이다. 시인인 알레산드로 만조치를 기념하는 거리이다.

 

 

말년의 베르디 사진.

                              

다시 반복되는 얘기이지만 그랜드 호텔의 역사에서 가장 귀중한 손님은 주세페 베르디였다. 베르디는 1872년부터 이 호텔의 단골손님이었다. 오페라 ‘아이다’가 초연된 다음해부터였다. 베르디는 밀라노에서 사람들을 만나거나 조용히 휴식하는 곳으로는 그랜드 호텔만한 곳이 없다고 말했다. 그랜드 호텔은 라 스칼라에서 걸어서 지척인 거리에 있다. 게다가 그랜드 호텔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었다. 베르디의 시골별장이 있는 산타가타(Sant'Agata)를 연상케 하는 정원이었다. 당시 베르디는 ‘오텔로’와 ‘활슈타프’의 작곡을 착수한 상태였다. 그랜드 호텔은 라 스칼라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에 라 스칼라의 극장장을 비롯하여 음악스태프들이 언제라도 편리하게 베르디와 함께 신작 오페라에 대한 의견을 나눌수 있었다. 그랜드 호텔은 베르디의 오랜 친구인 클라라 마페이(Clara Maffei)백작부인의 살롱이 있는 곳인 비아 빌리(Via Bigli)와도 가까웠다. 걸어서 갈수 있는 거리였다. 당시 클라라 마페이백작부인은 얼마 전에 하나뿐인 딸을 잃고서 상심에 빠져 있다가 겨우 회복하여 그의 저택에 살롱을 개설하고 여러 예술가들과 교류를 시작하고 있었다. 

 

클라라 마페이 백작부인

 

클라라의 살롱에는 시인이며 소설가인 알레산드로 만조니(Alessandro Manzoni: 1785-1873), 카타네오(Cattaneo), 코렌티(Correnti), 마나라(Manara), 발작(Balzac), 로시니(Rossini), 화가인 프란체스코 하예즈(Francesco Hayez), 조반니 프라티(Giovanni Prati), 그리고 베르디 등이 수시로 모여 예술에 대한 열정을 토론하였다. 당시 베르디는 사랑하는 부인과 아이들을 저 세상으로 보내고 마음에 깊은 상처를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한 때에 클라라의 살롱은 그에게 새로운 영감을 제공해 주는 장소였다. 베르디는 클라라 살롱에서의 영감을 바탕으로 하여 저 유명한 ‘나부코’를 작곡하였다. 알레산드로 만조니는 마페이 살롱의 단골로서 베르디와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베르디는 만조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를 애도하여 저 유명한 진혼곡(레퀴엠)을 완성하였다. 밀라노 그랜드 호텔이 있는 비아 만조니는 시인 만조니를 기념하여 붙인 거리이름이다.

 

시인 알레산드로 만조니(1785-1873)

 

‘나부코’의 성공 이후 45년만에, 그리고 ‘아이다’의 개선 이후 16년만인 1887년 2월 5일, 베르디는 ‘오텔로’로서 라 스칼라의 무대에 다시 돌아왔다. 잊지 못할 날이었다. 밀라노는 이미 며칠전부터 흥분에 싸여 있었다. '오텔로'의 초연이 있는 날은 겨울의 쌀쌀한 날씨였지만 시민들은 거의 모두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거리에서는 사람들이 바이올린이나 아코디온을 들고 귀에 익은 베르디의 아리아들을 연주하였다. 공원이나 광장에서도 바렐 오르간(Barrel Organ: 손으로 돌리는 오르간)을 가진 사람들이 베르디의 멜로디를 연주했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베르디 만세’(Viva Verdi)를 외쳤다. 잘 아는 대로 이때의 ‘베르디’는 Vittorio Emanuele Re d'Italia를 뜻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의 약자로서 이탈리아의 통일을 염원하는 슬로간이었다. 그날 밤 늦게 ‘오텔로’의 공연이 끝나자 열광한 시민들은 베르디가 탄 마차를 뒤따라서 그랜드 호텔까지 행진하였다. 밀라노 시민들은 라 스칼라에서 어떤 오페라가 성공하면 공연이 끝난 후 작곡가의 뒤를 따라 거리를 행진하는 관습이 있었다. 하지만 이날 밤, 밀라노 시민들이 ‘오텔로’의 공연 이후에 베르디의 뒤를 따른 행진은 보통 때와는 달리 이탈리아의 통일을 염원하는 기운이 담겨 있어서 자못 극적인 감정이 충만한 것이었다. 그랜드 호텔에 도착한 베르디는 열광하는 시민들의 환호에 화답하기 위해 발코니에 나섰다. 사람들은 ‘베르디, 베르디’를 연호했다. 마침 오텔로의 이미지를 창조했던 위대한 테너 프란체스코 타마뇨(F. Tamagno)가 함께 있었다. 타마뇨는 발코니에 나와서 ‘오텔로’의 아리아를 불렀다. 사람들은 더욱 열광했다. 타마뇨는 베르디의 다른 오페라의 아리아도 불렀다. 새벽이 되어서야 사람들은 겨우 해산하였다.

 

테너 프란체스코 타마뇨. 오텔로 초연에서 타이틀 롤을 맡았다.

 

1901년 1월, 베르디가 중병으로 그랜드 호텔의 방에 누워 있을 때, 밀라노의 시민들은 며칠에 걸쳐 계속 호텔 밖에 모여 베르디의 회복을 간절히 기원하였다. 라 스칼라의 극장장이 하루에 두세번씩 베르디의 상태를 적어서 호텔 입구에 붙였다. 사람들은 게시판을 보고 혹은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혹은 조용히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호텔 측은 이 호텔에서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는 베르디에게 소음을 던져 줄것 같아서 걱정을 했다. 결국 호텔 측은 만조니 거리에서 마차의 소음을 줄이기 위해 길 바닥에 밀짚을 깔았다. 베르디가 조금이라도 조용한 가운데 마지막 시간을 가질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1901년 1월 27일, 마침내 베르디는 그랜드 호텔에서 세상을 떠났다. 밀라노뿐만 아니라 전 이탈리아가 애통의 물결에 휩싸였다. 밀라노의 그랜드 호텔에서 긴급 타전된 전보는 전세계에 베르디의 서거를 알렸다. 베르디에 대한 장례식은 1월 30일에 거행되었다. 수많은 시민들이 거장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기 위해 그랜드 호텔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랜드 호텔이 생긴 이래 이만한 인파가 호텔 앞에 모여 든 것은 처음이었다.

 

식당 벽면에는 오페라 관련 사진들이 빼곡히 걸려 있다.

 

1901년 1월에 베르디가 그랜드 호텔에서 서거함으로서 그랜드 호텔은 일약 세계적 문화유산이 되었다. 하지만 다른 일로도 그랜드 호텔은 세계의 관심을 받은 일이 자주 있었다. 1888년 4월 30일에는 브라질의 돔 페드로2세 황제와 테레사 크리스티나 황비가 그랜드 호텔에 머물렀다. 호텔측은 로열실을 재단장하고 현관과 계단도 다시 장식했다. 호텔 전체를 마치 열대 정원처럼 꾸몄다. 그런데 페드로1세 황제는 그랜드 호텔에 머무는 동안 늑막염에 걸려 거동조차 하기가 힘들게 되었다. 브라질로 돌아가는 일정이 연기되었다. 그 사이에 브라질에서는 황제를 대신하여 돈나 이사벨라 공주가 브라질의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저 유명한 법안에 서명하였다. 만일 완고한 페드로1세가 병에 걸리지 않고 예정대로 귀국했더라면 브라질에서의 노예제도는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랜드 호텔은 브라질의 노예제도 폐지라는 역사적인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현관에 깃털 옷을 입은 인디언이 뱀을 잡아 죽이는 조각을 만들어 설치했다. 뱀은 노예제도를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조각 작품은 아직도 그랜드 호텔의 현관에 자리 잡고 있다.

 

브라질의 돔 페드로2세 황제(1825-1891) 

 

1902년 4월 위대한 테너 카루소는 라 스칼라에서 토스카니니 지휘의 새로운 오페라인 Germania(게르마니아: 알베르토 프란케티 작곡)에 출연하기 위해 밀라노에 와서 그랜드 호텔에 머물렀다. 그라마폰 회사의 음반취입 선구자인 프레드 게이스버그(Fred Gaisberg)는 카루소의 음성에 감동하여 그의 노래를 레코드로 남기고자 했다. 하지만 카루소가 100 파운드라는 거금을 요구했기 때문에 계획은 무산될 처지였다. 그라마폰 회사로서는 성악가에게 그만한 사례금을 지불한 관례가 없다는 이유로 카루소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하지만 게이스버그는 카루소의 노래를 반드시 레코드에 담고 싶었다. 그는 급히 개인적으로 돈을 마련하여 다시 카루소를 찾아가 지불하고 녹음에 대한 허락을 받았다. 그랜드 호텔의 카루소 방에서 진행된 레코딩은 두 시간이나 걸렸다. 카루소는 생전 처음으로 이상하게 생긴 레코딩 기계 앞에서 노래를 불러야 했지만 진실로 정성을 다하는 열심을 보였다. 그렇게 하여 역사상 최초로 ‘카루소 레코딩’이 이루어졌다. 레코딩이 끝나자 카루소는 게이스버그로부터 받은 100 파운드를 다시 돌려주었다. 그러면서 제작자로부터 돈을 많이 받아 놓아야 그가 투자한 돈 때문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최선의 레코딩을 할 것으로 생각하여 그런 요구를 했었다고 말하며 웃었다.

 

엔리코 카루소. 그랜드 호텔에서 최초의 레코딩을 하였다.

 

1931년에 그랜드 호텔은 대대적인 내부수리를 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처음으로 항상 더운물과 차가운 물이 나오는 현대 스타일의 욕조를 설치했다. 그리고 각 방마다 이탈리아 호텔에서는 처음으로 전화를 놓았다. 화려하게 치장한 ‘아메리칸 바’도 문을 열었다. 1943년, 전쟁이 한창일 때에 그랜드 호텔은 인근 라 스칼라와 마찬가지로 포격을 받아 4층이 모두 파손되었다. 미군이 진주하여 그랜드 호텔을 접수하였다. 미군은 그랜드 호텔을 장교클럽으로 사용했다. 휴가장교의 숙소로도 사용하였다. 호화 레스토랑에서는 거의 매일 파티가 열렸다. 군대에서 파견된 요리사들까지 상주하다시피 했다. 약 1년 후인 1946년 6월 25일, 미군이 철수하자 그랜드 호텔은 예전의 평화를 되찾았다.

 

화려하고 고전적인 식당인 '돈 카를로스'

 

마리아 칼라스는 1950-52년에 라 스칼라에서 공연이 있을 때마다 그랜드 호텔에 머물렀다. 칼라스와 그의 첫 남편인 메네기니(Meneghini)는 둘 다 다혈질이어서 자주 논쟁을 벌였다. 말이 논쟁이지 실은 대단한 말다툼이었다. 어떤 날은 리셉션 앞에서 액세서리 상자를 열어 놓고 그날 밤에 어떤 목걸이와 귀걸이를 해야 하는지를 두고 무려 두 시간 동안이나 논쟁을 벌인 일도 있다. 사람들은 좋은 구경꺼리여서 프리마 돈나 칼라스와 남편의 언쟁이 계속되기를 바랐다.

 

돈 카를로스 식당

 

그랜드 호텔은 패선1번지로 유명하다. ‘밀라노의 프레타 포르테르’(Pret a porter)라고 불릴 정도이다. 프레타 포르테르는 파리의 유명한 패션 살롱이다. 그랜드 호텔의 구석구석은 1년에 한번, 패션주간이 닥치면 패선전시장으로 돌변한다. 홀과 회랑에서는 물론, 디자이너들의 침실과 응접실, 심지어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패션 전시가 이루어진다. 그랜드 호텔은 신진 패선 디자이너들의 등용문이나 마찬가지이다. 밀라노에서 성공한 패션 디자이너가 되려면 우선 그랜드 호텔에 들려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말이 있을 지경이다.

 

그랜드 호텔의 베르디 라운지. 한쪽에 베르디의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다.

 

영화배우인 비토리오 데 시카(Vittorio De Sica)도 밀라노에만 오면 그랜드 호텔에 묵었다. 1974년 소피아 로렌과 함께 Il Viaggio(비아지오)라는 영화를 촬영할 때에는 베르디가 머물렀던 방에 묵었다. 비토리오 데 시카는 베르디가 서거한 바로 그 방에 머물렀던 것을 자기의 일생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영국의 리챠드 버튼도 밀라노에 오면 베르디가 머물렀던 방을 고집했다. 그 방에 묵게 되면 베르디가 사용했다고 생각되는 침대는 감히 사용하지 못하고 방의 한쪽 구석에 다른 침대를 놓고 잠을 잤다. 리챠드 버튼은 그랜드 호텔의 단골이었기 때문에 간혹 바나 라운지에서 보드카를 마시고 있는 그를 볼수도 있었다. 그리고 밀라노에 오면 대개의 경우 이탈리아의 육체파 여배우인 아나벨라 인콘트레라(Annabella Incontrera: 1943-)와 함께 지냈다. 아나벨라는 버튼보다 18세 연하였다. 그랜드 호텔은 1990-93년에 대대적인 보수에 들어갔다. 돈 카를로 식당의 한쪽 벽을 허물었을 때 놀랍게도 기원후 250년경에 막시밀리안 황제가 세운 성벽의 일부가 나타났다. 오늘날 이 유적은 돈 카를로 식당에서 지하의 포도주 저장고로 내려가는 통로에서 볼수 있다.

 

포도주 저장고에 있는 로마제국 막시밀리안 황제 시대의 담벽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