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오페라하우스/라 스칼라 집중탐구

세계 오페라의 메카

정준극 2010. 2. 2. 18:55

라 스칼라

세계 오페라의 메카

 

19세기의 스칼라극장

 

오페라를 전공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밀라노의 라 스칼라는 예루살렘이나 메카와 같은 곳이다. 이곳을 다녀가야 성지순례를 갔다 온 것과 마찬가지의 감동을 가질수 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세계 3대 오페라 하우스라고 하는 밀라노의 라 스칼라, 비엔나의 슈타츠오퍼, 파리의 로페르(갸르니에극장)을 못보고 요단 강을 건너간다면 곤란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선 라 스칼라를 탐방코자 한다. 라 스칼라극장은 이탈리아어로 ‘테아트로 알라 스칼라’(Teatro alla Scala)라고 부른다. 스칼라라는 단어는 사다리를 말한다. 구약 성경에 천사들이 땅에서 하늘과 연결된 사다리를 타고 오르락 내리락 하는 모습을 야곱이 보았다는 내용에 따른 것이다. 일찍이 1778년 8월 3일 오픈했다. 당시에는 Nuovo Regio Ducal Teatro alla Scala라고 불렀다. 영어로 번역하면 New Royal Theater at La Scala(신왕립라스칼라극장)이다. 개관기념 공연은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Europa riconsciuta(recognized Europe: 인정받은 유로파: 페니키아의 왕녀로 제우스의 사랑을 받음)였다. 오늘날 라 스칼라는 세계에서 가장 으뜸가는 오페라와 발레극장으로 간주되고 있다. 스칼라는 모든 오페라 성악가들의 등용문이다. 스칼라는 ‘스칼라극장 합창단’ ‘스칼라극장 발레단’ ‘스칼라극장 오케스트라’를 거느리고 있다. 스칼라에는 부속학교도 있다. ‘스칼라극장 아카데미’(Accademia Teatro alla Scala)이다. 음악, 무용, 무대예술에 대한 것을 전문적으로 교육하고 있다.

 

스칼라 극장의 정면은 화려하지 않고 수수하다. 이곳이 세계 최고의 오페라극장이다.

 

스칼라의 시즌은 전통적으로 매년 12월 7일부터 시작한다. 이 날은 밀라노의 수호성인인 성암브로스(St Ambrose)의 축일이다. 스칼라는 어떤 공연이든지 자정 전에 끝나야 한다는 관례가 있다. 만일 바그너의 오페라처럼 장시간이 소요되는 공연일 것 같으면 오후에 일찍 시작하여 자정 전에는 끝나도록 하고 있다. 스칼라에는 또 하나의 전통이 있다. 아무리 훌륭하게 아리아를 불렀다고해도 절대로 앙코르를 받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전통이 최근 깨졌다. 테너 후안 디에고 플로레즈가 도니체티의 '연대의 딸'(La Fille du Régiment)에서 '친구들이여...'(Ah! mes amis..)를 불렀는데 관중들이 앙코르를 연호하는 바람에 오케스트라의 양해를 받아 앙코르를 부른 것이다. 이 아리아에는 하이C음이 무려 아홉번이나 나온다. 스칼라의 역사에서 74년만에 깨진 앙코르 전통이었다. 스칼라에는 다른 오페라극장과는 달리 극장박물관이 있다. Museo Teatrale alla Scala이다. 박물관에는 오페라 및 스칼라의 역사와 관련한 많은 그림, 소묘, 조각, 의상, 기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스칼라박물관에 대하여는 나중에 자세히 설명코자 한다. 이제 스칼라의 이력서를 살펴보자.

 

도니체티의 '연대의 딸'에서 토니오의 아리아 Ah, mes amis , quel jour de fete!(아, 친구들이여, 오늘은 축제의 날)과 이어 계속되는 Le camarade est amoureaux!(친구들이 사랑스럽다)를 부르는 테너 후안 디에고 플로레즈. 스칼라 74년의 전통을 깨고 앙코르를 불렀다.

 

밀라노에는 1700년대 중반부터 피아짜 델 두오모(Piazza del Duomo)에 Teatro Regio Ducal(또는 Teatro Ducale)이라는 극장이 있었다. 왕립극장이라고 할수 있다. 1776년 2월 25일 이 극장에서 카니발 행사가 있던 날 밤에 불이 나서 극장이 전소되었다. 이 극장에 전용 관람석을 가지고 있던 밀라노의 유지 90명은 어서 속히 새로운 극장을 지어야 한다고 합의하고 만일 짓기로 결정되면 후원하기로 뜻을 같이했다. 이들은 왕립극장을 새로 짓는 것이므로 왕족인 오스트리아-에스테(Austria-Este)의 페르디난트 대공에게 극장을 새로 지어 줄것과 건축기간동안 임시로 사용할 극장을 주선해 달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했다. 이들은 당대의 건축가인 피에르마리니(Piermarini)에게 의뢰하여 신고전주의양식의 새로운 극장 디자인까지 마련하여 제출하였다. 페르디난트 대공은 이들의 청원서를 롬바르디 총독에게 내어주고 검토하라고 했다. 당시 밀라노가 속하여 있는 롬바르디 공국은 오스트리아의 지배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자여제가 임명한 총독이 다스리고 있었다. 롬바르디 총독은 유지들이 제출한 신극장 피에르마리니의 디자인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하면서 새로운 극장의 건축을 거부했다. 유지들을 다시 디자인을 마련했다. 새로 제출한 디자인은 무리가 없이 접수되었다. 그리하여 극장건축 계획은 비엔나의 마리아 테레자 여제에게까지 올라갔다. 마리아 테레자는 밀라노 사람들의 청원을 존중하여서 극장신축계획을 승인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마리아 테레자 여제가 피에르마리니를 직접 만나서 스칼라극장을 짓도록 당부했다고 한다.

 

스칼라의 오디토리움

 

 

새로운 극장은 원래 극장이 있던 장소에 건축하려고 했다. 그러나 기왕에 새로 짓는 극장이므로 종전의 것보다 규모가 커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종전의 극장부지는 협소했다. 마침 인근에 산타 마리아 델라 스칼라(Santa Maria della Scala)라는 교회가 있는데 너무 오래되어 철거해야할 입장이었다. 밀라노 시당국은 스칼라교회를 허물고 그 자리에 새로운 극장을 짓기로 결정했다. 스칼라라는 말은 사다리를 뜻한다. 성경의 야곱과 천사들의 사다리에 관한 에피소드에서 가져온 표현이다. 스칼라라는 명칭은 그렇게 하여 비롯되었다. 스칼라는 2년 동안의 건축 끝에 1778년 8월 3일에 완공하고 개관기념 공연을 가졌다. 피에트로 말리아니, 피에트로 노세티, 주세페 페(Giuseppe Fe)가 공동으로 건축을 담당했다. 스칼라는 3000석 규모로 건설되었다. 당시로서는 대규모였다. 전체 6층이며 예에 의하여 말굽 형태의 오디토리움으로 만들었다. 스테이지는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규모가 크게 만들었다. 깊이가 16m, 높이가 26m, 넓이가 20m가 된다. 건축비의 상당부분은 박스 관람석(Palchi)라고 부름)을 판매하여 충당했다. 밀라노의 유지들과 부호들이 박스 전용석을 열심히 샀다.

 

[사람들은 테아트로 알라 스칼라를 라 스칼라라고 부른다. 라(La)는 정관사이므로 그냥 스칼라라고 불러도 되지만 굳이 우기면서 라 스칼라라고 부른다. 토스카의 원래 타이틀은 라 토스카(La Tosca)이다. 하지만 라 토스카라고 꼬박꼬박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저 토스카라고 부를 뿐이다. 그런데 라 보엠(La Boheme)의 경우에는 또 다르다. 라 토스카의 경우처럼 그냥 토스카라고 부르지 않고 반드시 관사를 붙여서 친절하게도 라 보엠이라고 부른다. 정말 친절해서 일까? 일 트로바토레(Il Trovatore)의 일(Il)도 관사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트로바토레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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