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오페라하우스/라 스칼라 집중탐구

베르디와 스칼라

정준극 2010. 2. 2. 18:59

베르디와 스칼라

 

주세페 베르디

 

스칼라는 여러 편의 유명 오페라를 초연(프리마)하므로서 역사적인 장소가 되었다. 특히 베르디와 관계가 깊어서 그의 오페라가 여러편이 초연되었다. 스칼라 극장은 베르디의 첫 오페라인 Oberto(오베르토)가 초연된 곳이었으며 그의 마지막 오페라인 Falstaff(활슈타프)가 초연된 곳이었다. 베르디의 이름을 전국에 알린 Nabucco(나부코)가 스칼라에서 초연된 것은 1842년이었다. 그 전에 스칼라에서는 베르디의 Un giorno di regno(왕궁의 하루)가 공연되었으나 이것은 유감스럽게도 실패였다. Nabucco(나부코)는 우연찮게도 이탈리아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해 주는 작품이 되었다. 특히 이 오페라에 나오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Va, pensiero는 이탈리아  제2의 국가(國歌)라고 할 정도로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Nabucco를 위시하여 그 후에 등장한 I Lombardi alla prima croaciata(첫 십자군의 롬바르디인), Giovanna d'Arco(잔다크: 조반나 다르코) 등이 이탈리아 통일운동(리소르기멘토)의 상징처럼 되자 스칼라도 덩달아서 리소르기멘토의 상징처럼 되었다. 이때가 스칼라의 전성기였다.

 

그런데 스칼라와 인연이 깊었던 베르디는 한동안 자기의 작품을 스칼라에서 연주하는 것을 승인하지 않은 일이 있다. 1845년에 초연되는 Giovanna d'Arco(조반나 다르코: 잔다크)의 음악을 오케스트라가 자기 멋대로 수정했기 때문이었다. 베르디는 스칼라의 오케스트라가 음악의 일부를 제멋대로 해석하고 심지어는 수정까지 한 것을 공무원들의 ‘부정부패’와 같다고 하면서 비난했다. 베르디는 앞으로 유사한 사건의 일어날지도 모르므로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자기 작품의 연주를 하지 못하도록 했다. 베르디가 스칼라의 지휘봉을 다시 잡은 것은 그로부터 거의 30년이 지난 1874년 5월 25일이었다. 베르디는 그의 레퀴엠을 지휘하였다. 이후 1886년에는 Otello(오텔로)의 초연을 허락했으며 이어 Falstaff(활슈타프)의 초연도 승낙하였다.

 

베르디의 마지막 오페라인 활슈타프의 한 장면

 

베르디가 스칼라에서 활동할 당시에 베르디의 작품들에 출연하여 역사적인 발자취를 남긴 대표적인 위대한 성악가들로는 소프라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1834-1897), 아델리나 패티(Adelina Patti: 1843-1919), 테레사 슈톨츠(Teresa Stolz: 1834-1902), 테너 프란체스코 타마뇨(Francesco Tamagno: 1850-1905), 바리톤 빅토르 마우렐(Victor Maurel: 1848-1923)등이 있다. 테너 타마뇨는 오텔로의 초연에서 타이틀 롤을 맡았으며 마우렐은 활슈타프의 초연에서 타이틀 롤을 맡았다. 주세피나 스트레포니는 나부코에서 아비가일의 이미지를 창조하였으며 나중에 베르디와 재혼하여 거의 40년 동안을 동고동락했다. 슈톨츠는 아이다의 역할을 창조하였으며 베르디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4년 동안 베르디의 곁에서 보살펴준 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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