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더 알기/속성 역사 정복

1. 고대 할슈타트문화

정준극 2010. 2. 6. 05:27

[고대 할슈타트문화]

 

세상에서 자연의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잘츠캄머구트(Salzkammergut)를 보기를 권면한다. 산과 호수에 둘러싸인 그림같이 아름답고 평화스러운 지역이다. 오스트리아의 고대역사를 알고 싶다면 잘츠캄머구트에 가기를 권면한다. 잘츠카머구트의 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할슈타트(Hallstatt)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살았다는 곳이다. 할슈타트 호반에 자리 잡고 있는 할슈타트에는 이미 석기-철기시대에 마을을 이루어 살았다는 흔적이 남아 있다. 이를 할슈타트문화라고 부른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부터 할슈타트문화에 대한 설명이 나오므로 할슈타트문화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그건 오스트리아 사람이 아니라고 말 할수 있다. 할슈타트문화는 오스트리아문화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할슈타트에 사람들이 모여 살며 할슈타트문화를 일구기 시작한 것은 소금 때문이었다. 할슈타트는 인근의 할라인(Hallein) 및 뒤른버그(Dürnberg)와 함께 중요한 소금 생산지였다. 할슈타트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때보다 훨씬 나중에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시며 소금의 중요성을 유난히 강조하셨지만 고대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소금의 중요성을 이미 기원전부터 잘 알고 있었던 것같다. 소금이라는 단어는 독일어로 잘츠(Salz)이다. 급료라는 단어인 샐러리(Salary)도 소금(Salt: Salz)에서 나온 말이다. 모차르트가 태어난 잘츠부르크(Salzburg), 오스트리아 최고의 명승지인 잘츠캄머구트(Salzkammergut: 소금저장창고), 비엔나의 잘츠브뤼케(Salzbrücke: 소금교량), 잘츠토르(Salztor: 소금성문)라는 명칭은 모두 소금(Salz)에서 연유한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음식이 대체로 상당히 짠 것도 오스트리아의 풍부한 소금생산과 무관하지 않다.

 

그림과 같은 할슈타트의 아침

                                  

오스트리아에 처음으로 왕국다운 왕국이 생긴 것은 기원전 150년경이다. 기원전 179년에 서쪽으로부터 켈트족들이 지금의 상부오스트리아(Upper Austria: Obere Oesterreich)로 대거 몰려와서 앞으로는 자기들이 이곳에 살고자하니 그렇게 알라고 하면서 마을들을 차지하였다. 순진한 원주민들은 험악한 인상의 켈트족들이 워낙 무섭게 나오는 바람에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그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소금광산들을 차지한 켈트족들은 장사도 아주 잘했다. 그 켈트족들이 기원전 150년경에 처음으로 잘츠부르크를 중심으로 나라 비슷한 것을 세웠으니 노리쿰(Noricum)이라는 왕국이었다. 노리쿰이 오스트리아에 세워진 첫 왕국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오스트리아 사람들에게 ‘혹시 노리쿰이 무엇인지 아시는가?’고 물으면 아마 십중팔구는 ‘노리끼리가 뭐예유?’라면서 모른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건 그렇고, 노리쿰 왕국은 뜻한바 있어서 자꾸 동쪽으로 눈길을 돌려 도나우 강변 지역, 서부 슈티리아, 카린티아까지 영향권을 넓혔다. 즉, 오늘날의 오스트리아와 슬로베니아에 이르기까지의 영토이다. 당시 도나우 지역에는 벌써부터 로마제국의 군대가 주둔하여 정착촌을 만들어 지내고 있었다. 결국 켈트족의 노리쿰 왕국과 로마제국이 한바탕 대결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어느날 아침, 노리쿰 왕국의 휨고르2세(Hümmgor II)라고 하는 용맹하지만 조금은 무식한 왕이 로마 주둔군에게 ‘이제부터는 그대들이 살고 있는 이곳에는 우리가 살겠으니 그대들은 당장 보따리를 싸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신상에 좋을 것이다’라고 대갈일성을 하였다. 그동안 편하게 먹고 마시고 자주 목욕이나 하면서 지내던 로마병사들은 공연히 도깨비 같은 켈트족과 부딪쳐서 목숨을 내놓고 싸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으며 차제에 고향 집에도 가보고 싶어서 도나우 강변의 마을들을 내어주고 후퇴했다.

  

할슈타트에서 출토된 쇠칼  

                              

그러나 대로마제국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억울했다.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을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내주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로마군이 어떤 군대인가?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군대가 아니던가? 실지회복의 기틀을 내건 용감한 로마병사들은 켈트족을 서서히 몰아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켈트족들도 로마군을 형편없다고 생각하여 얕잡아 보아 대항했지만 실제로 전투를 해보니 이건 제대로 훈련을 받은 막강병사들이어서 결국은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얼마후 로마제국은 도나우 일대를 다시 차지하고 본격적으로 통치하기 시작했다. 로마는 저멀리 잘츠부르크까지 탐험대를 보내어 지역개발에 박차를 가하였고 소금이 무진장이라는 보고를 받고는 집정관을 보내어 소금을 관리하고 원주민들을 다스리게 했다. 당시 소금은 금처럼 귀하던 때였다. 무엇보다 소금은 음식에 맛을 내주는 필수불가결의 물건이었고 식품을 오래 저장해 주는 귀한 물건이었다. 그리하여 한때 로마는 병사들에게 주는 급료를 소금으로 주기도 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다시 반복하자면 영어의 샐러리(월급: Salery)이라는 말도 사실 따지고 보면 소금이라는 단어에서 비롯한 것이다. 아무튼 이윽고 로마는 잘츠부르크 지역을 철광, 암염, 포도주 무역의 중심지역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로마시대에는 두 개의 교역로가 있었다. 하나는 도나우를 중간에 두고 동과 서를 중개한 동서교역로이며 다른 하나는 남-북 교역로로서 멀리 덴마크의 유트란드 반도로부터 로마까지 이어지는 이른바 ‘호박길’(Amber Road)이었다. 로마는 북으로부터 호박(琥珀)과 고래 뼈 등을 가져왔고 대신 청동검, 염료 등을 주었다.

 

할슈타트의 인근 마그덴버그에서 발굴한 고대 호박 목걸이 

                    

로마군의 사령관인 카이우스 마리우스(Caius Marius: 157-86)는 도나우 연안지역을 넘보는 야만족들을 차례차례로 격퇴하였다. 특히 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튜톤족을 사정없이 쫓아버렸다. 로마제국은 또 다시 북쪽으로부터 야만족들이 침공하지 못하도록 이 지역을 식민지로 육성하고 군대를 보강하였다. 로마제국은 어느 지역을 점령하면 우선 길부터 닦는 습성이 있었다. 병력과 군수품 이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지역에도 넓은 군사도로가 생겨났다. 그것은 결국 상업도로가 확장되는 것이기도 했다. 로마제국은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 성경에 나오는 아구스도)황제 때에 오늘날 북부 티롤과 포아아를버그(Vorarlberg) 지방에 해당하는 곳을 리티아(Rhaetia)라는 이름의 지방으로 조성했다. 그리고 얼마후 켈트족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노리쿰 왕국은 결국 로마제국에 흡수되었다. 로마제국은 도나우 양안지역에 대한 통치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파노니아(Pannonia)지방을 설치했다. 파노니아는 노리쿰 왕국이 동쪽 경계선으로 삼았던 오늘날의 부다페스트까지 뻗어 있게 되었다. 이것이 중세까지의 오스트리아 약사이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할슈타트호수. 바다가 없는 나라인 오스트리아는 웬만한 호수를 모두 See(바다)라고 부른다. 그래서 Hallstatt See라고 하면 '할슈타트 바다'가 아니라 '할슈타트 호수'이다. 독일어로 바다는 메르(Meer)라고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