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제정러시아 페오도로브나

덴마크의 다그마르

정준극 2010. 2. 9. 02:19

덴마크의 다그마르

 

덴마크의 다그마르 공주

 

마리아 페오도로브나는 덴마크의 공주였다.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왕과 루이제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4남매 중 둘째 딸이었다. 원래 이름은 다그마르(Dagmar)였다. 마리아 페오도로브나라는 이름은 제정러시아의 황비가 되고나서 갖게된 러시아식 이름이었다. 다그마르는 언니인 알렉산드라만큼 아름답지는 못했다. 하지만 상냥한 모습에 매력 있는 여자였다. 다그마르는 좀 작고 마른 듯한 체구였으나 우아한 모습으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언니 알렉산드라는 나중에 영국의 유명한 빅토리아 여왕의 아들인 에드워드 황태자와 결혼하였다. 다그마르는 언니 알렉산드라를 무척 좋아하였다.

 

1864년 여름, 다그마르는 제정러시아 알렉산더 2세 황제(짜르)의 큰 아들과 약혼하였다. 니콜라스 황태자였다. 니콜라스는 핸섬하고 우아하며 지성적인 왕자였다. 그렇지만 건강이 좋지 않았다. 바로 그해 겨울, 니콜라스 황태자는 기관지염에 걸려 치료를 받기 위해 남불로 갔으나 병세는 악화되었을 뿐이었다. 이듬해인 1865년 다그마르는 약혼자인 니콜라스 황태자를 만나보기 위해 남불로 갔다. 불행하게도 니콜라스 황태자는 다그마르를 만난지 며칠후 세상을 떠났다. 덴마크는 제정러시아와 우호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다그마르는 새로운 황태자인 알렉산더와 결혼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알렉산더 황태자는 어떻게 생긴 사람인가? 형인 니콜라스와는 달리 체구가 거대하며 행동이 느리고 성격이 완고한 편이었다. 세상을 떠난 형 니콜라스와는 닮은 점이 하나도 없었다. 다그마르는 왕족으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생긴 모습은 중요하지 않았다. 다그마르는 새로운 황태자인 알렉산더와의 약혼을 겸허하게 받아 들였다. 덴마크로서는 다행이었다.

 

알렉산더와 결혼

 

 

남편 알렉산더 III와 함께. 원, 체격이 이렇게 차이가 나서야...츳츳.

 

다그마르와 황태자 알렉산더는 1866년 11월 9일 결혼식을 올렸다. 다그마르는 개신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나 러시아정교회로 개종하였고 러시아 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다그마르는 평범한 코펜하겐의 궁전을 떠나서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궁전 중의 하나라는 생페터스부르그 궁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황태자와 결혼한 다그마르는 마리아 페오도로브나 대공부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다그마르는 장래의 황비(짜리짜)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하나하나 배워나갔다. 다그마르는 사교 모임을 좋아했다. 무도회를 즐겨하고 연회를 좋아했다. 마침 시어머니인 모후가 계속 와병중이어서 결국 다그마르는 궁중의 주역을 맡아하지 않을수 없었다. 알렉산더 황태자와 다그마르는 사람들이 우려했던 것처럼 어려운 결혼생활을 하지 않았다. 다그마르의 지성적인 성격과 센스 있는 행동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황태자인 알렉산더는 이점을 매우 감사하게 생각했다. 북극곰처럼 거대한 체구의 알렉산더였지만 실은 평범하고 가정을 사랑하며 성실한 사람이었다. 다만, 부인인 다그마르와는 달리 사교모임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그마르의 손에 끌려 어쩔수 없이 무도회나 연회에 참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더는 자그마한 체구의 놀랄만한 매력이 있는 다그마르에게 참을성 있게 순종하였다. 알렉산더는 다그마르와 함께 식구들과 지낸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다그마르는 그런 남편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다그마르는 남편을 장래 제정러시아의 황제로서 손색이 없도록 세밀하게 인도하였다.

 

러시아 황태후의 신분으로 덴마크를 방문한 다그마르

 

다그마르의 시아버지인 알렉산더 2세는 개방적인 정책을 펼쳤다. 지금까지 제정러시아에서 그 누구도 펼치지 못했던 자유주의 정책이었다. 알렉산더 2세는 농노제도를 과감하게 철폐하였다. 그래서 그를 ‘해방 황제’(Liberating Tsar)라고 불렀다. 알렉산더 2세는 자유주의 정책을 반영한 새로운 헌법을 만들어 공표코자 했다. 그러나 1881년 3월 13일 이에 반대하는 세력에 의해 암살당했다. 다그마르의 남편인 알렉산더가 알렉산더 3세로서 새로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다그마르는 제정러시아의 황비가 되었다. 새로운 황제인 알렉산더 3세의 기본정책은 독재전제정치였다. 그리하여 부왕인 알렉산더 2세가 추진하려던 자유주의 정책은 빛을 보지 못했다. 만일 알렉산더 3세도 부왕의 뜻에 따라 자유주의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면 민중의 지지를 얻어 러시아혁명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알렉산더 3세는 새로운 헌법을 결코 공표하지 않았다.

 

알렉산더 3세는 덩치는 컸지만 자기도 언젠가는 부왕처럼 살해당하지 않을까 하는 비참한 공포속에서 지냈다. 따라서 다그마르와 자녀들도 언제나 엄중한 경비속에 군대의 보호를 받으며 지냈다. 말하자면 적군에게 포위된 성에서 살고 있는 셈이었다. 다그마르와 자녀들은 생페터스부르크의 왕궁이 위험할수도 있다고 하여 그곳으로부터 50마일 떨어진 가치나(Gatchina)궁에서 지냈다. 알렉산더 3세는 반유태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는 유태인들을 핍박하고 억압했으며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다그마르는 러시아내의 정치적인 문제에 결코 간섭하지 않았다. 다그마르의 관심사항은 남편 알렉산더 3세와 러시아 궁정에 덴마크의 반독일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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