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제정러시아 페오도로브나

크리미아의 다그마르

정준극 2010. 2. 9. 02:28

크리미아의 다그마르

 

다그마르는 크리미아로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딸들인 세니아와 올가, 세니아의 남편인 알렉산더 대공, 그들이 딸인 이리나(Irina)와 그의 남편인 펠릭스 유소포프 공자와 합류하였다. 유소포프 공자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요승 라스푸틴을 살해한 인물 중의 하나였다. 1917년 10월, 크리미아에 있던 모든 황실 가족들은 혁명군에 의해 체포되어 둘버(Dulber)라는 요새에 구금되었다. 이듬해에 독일과 혁명 러시아가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다그마르와 가족들은 독일군에 의해 모두 석방될수 있었다. 이들은 흑해에 면한 하락스(Harax)의 화려한 별장으로 들어갔다. 1918년 7월에 다그마르는 막내 아들인 미하엘 대공이 볼세비키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비참한 소식을 들었다. 크리미아로 피난온 다른 황실의 사람들도 모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는 소식도 들렸다. 니콜라스 황제도 총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다그마르는 두 아들과 사위와 손주들이 죽었다는 소문을 믿지 않았다. 1918년 11월 그때까지만해도 승전을 거듭하고 있던 독일군이 크리미아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독일을 포함한 연합군은 크리미아에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다그마르의 아들인 짜르 니콜라스 2세 

 

볼세비키들이 크리미아로 진격해 온다는 소식이 들리자 다그마르와 남은 가족들은 영국함선을 이용하여 영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영국에서 얼마간을 지낸 다그마르는 딸 올가와 함께 덴마크로 가서 지내게 되었다. 당시 덴마크의 국왕은 다그마르의 조카인 크리스티안 10세였다. 크리스티안 10세 국왕은 다그마르에게 아말리엔보리(Amalienborg)궁전의 한쪽 건물을 사용하도록 주선해주었다. 다그마르는 경제사정이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누군데’라면서 경비를 줄이지는 않았다. 크리스티안 10세 국왕은 숙모의 그런 낭비성 태도가 못마땅했다. 또 다른 조카인 영국왕 조지 5세는 다그마르에게 덴마크의 흐비도레 별장에서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고 생활비로 매년 1만파운드를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다그마르는 수중에 무일푼이었지만 흐비도레 별장의 침대 밑에 50만 파운드에 해당하는 제정러시아의 보석들을 숨겨놓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다그마르는 단 한 개의 보석도 팔려고 하지 않았다.

 

                                            크리미아의 별장에서 손주들 및 개와 함께

 

언니인 알렉산드라가 81세로 세상을 떠나자 다그마르는 인생무상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조용한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한편, 사람들은 너도나도 다그마르가 가지고 있다는 보석을 차지하기 위해 안달하였다. 다그마르는 딸 세니아가 보는 앞에서 보석상자를 엄중하게 밀봉하고 조지 5세가 보낸 특별 사절을 통해 영국으로 가져가 보관토록 했다.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10세가 보석을 영국으로 보내는 것을 막기 위해 급히 당도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사절들이 영국으로 떠난 후였다. 훗날 이 보석들은 헨넬 앤드 손스(Hennel & Sons) 회사를 통해 매각되었다. 시가 35만 파운드를 받았다. 다그마르의 딸 세니아가 6만 파운드를 받았고 또 다른 딸인 올가가 4만 파운드를 받았다. 나머지 25만 파운드의 행방은 아무도 모른다. 다그마르는 1928년 덴마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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