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 밖 숭인동의 동묘(東廟)
촉한의 장군인 관우를 모신 사당
동묘 입구. 동묘공원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정문은 닫아 두었으며 옆에 있는 작은 문으로 출입한다.
지하철 1호선이나 6호선을 타고 동묘 앞 역에서 내려 3번 출구로 나가면 동묘의 담장을 만난다. 6호선을 타고 동묘 앞에서 내리면 거미줄 같은 지하에서 3번 출구를 찾느라고 이리저리 탐험한후에 겨우 찾아서 나올수 있다. 하지만 1호선을 타면 3번 출구가 금방이어서 편하다. 동묘에 대하여는 여러 사람들이 블로그에 방문기 및 소감을 게재하였기에 이를 반복할 의향이 추호도 없다. 한편, 나도 사진 몇장을 찍었지만 다른 분들이 찍어서 웹사이트에 올린 사진들을 일고해보니 너무나 훌륭하여서 나의 사진은 명함도 내밀지 못할 것 같아 올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래도 의무감으로 일부만 수록하는 바이다.
동묘내의 금잡인 표석. 이곳으로부터 잡인들은 들어갈수 없다는 표지이다.
동묘에 대한 배경설명을 하자면 한참 해야 하고 더구나 이미 많은 분들이 감상기와 함께 역사적 설명을 전개하였으므로 필자는 대략만 기술코자 한다. 동묘는 옛날 중국의 위, 촉, 오 삼국의 시절, 촉한의 5호 장군중 하나인 운장 관우의 혼을 모신 사당이다. 관우는 황제로부터 왕의 칭호를 받았기 때문에 관왕(關王)이라고도 불린다. 그래서 동묘는 동관왕묘, 또는 관제묘(關帝廟)라고도 불린다. 동묘는 언제 만들었는가? 조선 선조 33년인 1600년에 시공하여 2년 후인 1662년에 완성했다고도 하고 1559년에 착공하여 1601년에 완성했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지금으로부터 410여년전에 만든 사당이다. 보물 142호로 지정되어 있다. '아니, 갑자기 수도 한양에 중국 저 먼 옛날 촉한의 장군인 관우의 사당이 있는 연고는 무엇인가?'라는 궁금증이 있을 것이다. 관운장과 우리나라 조선왕조와 무슨 연관이 있다는 말인가? 그 사정은 이러하다. 임진왜란 중에 조선군과 명나라 군이 합동하여 왜군들과 대적하고 있을 때에 관우의 혼백이 간혹 나타나 조선군과 명나라군을 도왔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어떻게 나타났는지는 모르며 또한 어떤 방법으로 도와 주었는지도 모르지만 하여튼 긴 수염을 휘날리는 관우 장군이 느닷없이 나타나서 도와주었다고 한다.
동묘내의 중간문. 잘만 가꾸면 훌륭한 관광상품이 될터인데...보수! 보수가 필요하다.
나중에 이 얘기를 들은 명의 신종이라는 황제는 '아하, 관우장군께서 그 바쁘신 중에도 조선에까지 가시어 조선군과 우리 명나라군을 도와 주시었으니 이 어찌 감개무량한 일이 아닐수 없은손가!'라면서 서울(한양)에 관우를 모시는 사당을 짓도록 당부하여 건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동묘 정전의 현판에 적힌 글도 신종의 친필이라고 한다. 그러한 동묘인데 일제 시대와 저 김일성 도당에 의한 6. 25 사변 때에 크게 훼손되어 기와는 부서지고 잡초만 우거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근자에 정부에서 우선 복원하여 면모를 일신하고 관리사무소까지 두어 하인을 막론하고 동묘 내에서 담배를 피는 등 공공질서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법에 따라 처벌하겠다는 안내문을 이곳저곳에 부착하였으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지만 한편으로는 창피한 감도 없지 않다. 도대체 양식있는 사람이라면 국가가 보물로 지정한 건물에 들어와서 담배를 피거나 휴지를 버리지는 않을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잡인 들이 있으므로 금연 안내문을 수없이 붙여 놓은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어느날 뜻한바 있어서 동묘 벼룩시장을 구경갔다가 동묘를 관람하였는데 마침 부속건물들을 복원하느라고 공사담장들을 설치했기에 그저 겉으로만 구경하고 돌아섰다. 복원공사는 2010년 12월 중순에나 가야 마무리된다고 적어 놓았다.
동묘의 중앙건물. 삼국지 유관장 3인 중의 하나이며 촉한제국 오호대장중의 한 사람인 관우를 모셨다.
동묘의 메인 건물에는 한 가운데에 관우의 목상을 모셔놓았는데 그나마 가까이 가서 창살 사이로 눈을 크게 만들어서 들여다 보아야 어둑 컴컴한 중에 무언지 알아 볼수 없을 정도의 희미한 형상들을 감지할수 있다. 설명에 의하면 관우의 양자인 관평(關平), 관우의 충복인 주창(周倉) 등의 상도 함께 모셔 놓았다고 한다. 기왕에 실내에 조명좀하여서 누구나 자세히 관람할수 있도록 해놓았으면 원이 없겠다. 그나저나 동묘는 엄연히 사당인데 알고보니 어느새 공원으로 변신하였다. 동묘로 들어가는 입구에 '동묘공원'이라는 큰 비석이 있는 것을 보고 그제야 공원인줄을 알았다. 그러나 안에 들어가면 중간 건물 앞에 금잡인(禁雜人)이라는 표지석이 있어서 잡인들은 감히 들어가지 못하게 했던것 같다. 국가의 보물인 동묘에 들어와서 아무데나 드러누워 잠을 잔다든지 고성으로 떠든다든지 하면 곤란하다. 가장 문제는 문화재의 주변환경이다. 숭인동 동묘의 주변은 어느덧 서울의 명물이라고 하는 벼룩시장이 형성되어 특히 주말이며 난리도 아니다. 동묘와 벼룩시장! 어떻게 조화를 시킬것인지가 관건이다. 동묘도 문화재로서의 이상을 높이고 인근의 벼룩시장도 활성화하고! 마침 외국 관광객들이 겨우 동묘를 찾아와서 구경하고 나와서 골목마다 늘어선 혼잡스런 벼룩시장을 보자 '오 마이 갓!'이라고 탄성을 질렀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
동묘 앞길 벼룩시장. 서울의 명물이다. 외국인들도 간혹 눈에 띤다.
벼룩시장에서는 잘만 하면 그럴듯한 서적이나 골동품을 건질수 있다. 오래된 레코드를 파는 집도 많았다. 웬만한 전자제품은 벼룩시장에서 헐값에 구할수 있다. 가장 많은 것은 옷가지이지만 낚시 도구도 만만치 않게 많다.
메인 게이트의 동묘 현판
동묘의 메인 빌딩에 깊숙히 모셔져 있는 관우 상. 생시 관우상이라고 생각된다. 동묘에는 생시 관우상뿐만 아니라 사시 관우상(죽은 후의 관우상), 도원결의한 유비-관우-장비의 상, 우장군 장비상, 왕장군 조자룡상, 황충-황보 장군상, 옥천대사, 그리고 앞서 언급한 관평-주창의 상이 있다. 그런데 옥천대사는 누구시더라? 일설에는 관우의 사부라고 한다. 거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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