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13구 히칭

[참고자료] 요한 슈트라우스의 첫 부인 예티 트레프즈

정준극 2010. 3. 27. 21:21

[참고자료]

요한 슈트라우스의 첫 부인 예티 트레프즈(Jetty Treffz)

오페레타 ‘박쥐’ 완성에 기여

히칭구에 예티를 기념하는 트레프즈가쎄가 있다.

 

예티 트레프즈(그림). 비엔나 13구 히칭의 트레프즈가쎄는 요한 슈트라우스의 첫째 부인인 헨리에타 트레프즈를 기억하여 붙인 이름이다.

 

왈츠의 황제 요한 슈트라우스는 세 번 결혼했다. 첫째 부인이 예티라는 애칭의 헨리에타 트레프즈(Henrietta Treffz)였다. 결혼 전의 이름은 헨리에타 샬루페츠키(Henrietta Chalupetzky)였고 아버지는 금세공업자였다. 예티는 1818년 7월 1일 지금은 비엔나에 속하여 있지만 전에는 교외였던 알저 포아슈타트(Alser Vorstadt)에서 태어났다. 예티는 뛰어난 메조소프라노였다. 오스트리아에서 뿐만 아니라 독일, 프랑스, 영국에서까지 인기를 끌었던 오페라 성악가였다. 요한 슈트라우스와 결혼하기 전에는 영국에서 대단한 갈채를 받아 한때 영국에 정착하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예티는 훌륭한 음성으로 노래도 잘 불렀지만 매력적으로 생긴 여자였다. 당시 대개의 오페라 성악가들은 대체로 마치 백금녀의 사촌여동생들처럼 둔둔했다. 아마 그래야 소리가 잘 나왔던 모양이다. 그런데 예티는 날씬했다. 키가 자그마했으며 얼굴은 예뻤다. 그러니 찬미자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지 않을수 없었다. 사태가 이러하다보니 스캔들이 무성했다. 예티는 23세때에 첫 아이를 낳았다. 부친되시는 양반이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예티는 더욱 분발하여서 30세 초반에 이르기까지 약 10년동안 서너 명의 아이를 낳았다. 모두 사생아였다.

 

그러던중 예티는 25세 쯤해서 뜻한바 있어서 돈 많은 은행가인 모리츠 토데스코(Moritz Todesco)라는 사람의 정부로서 아예 딴 살림을 차렸다. 예티에게 깜빡한 토데스코는 예티를 위해 커다란 저택을 사주고 편하게 지내도록 했다. 하기야 바야흐로 요단강을 건널 준비를 해야 하는 늙은 토데스코로서는 그저 젊은 예티를 화분의 화초처럼, 새장의 카나리아처럼 눈으로만 보고 만족해야할 입장이었다. 예티는 토데스코와의 관계를 무려 18년 동안 계속하였다. 18년동안 부족함 없이 먹고 싶은 것 있으면 마음대로 사서 먹고, 입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마음대로 사서 입는 생활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물론 간간히 바람도 피웠다. 애인인 늙은 토데스코는 예티에게 잔소리를 할 처지가 못되어서 그저 해 달라는 대로 해줄 뿐이었다. 예티가 런던에서 오페라에 출연할 때에 요한 슈트라우스(아버지)가 지휘를 한 일이 있었다. 1849년 쯤이었다. 런던에서 발행되는 Musical World(음악세계)라는 잡지는 예티에 대하여 ‘아, 음성뿐만 아니라 모습도 아름다운 헨리에타 트레프즈! 놀랍도록 신선한 음성과 모습이다.’라며 찬사를 보낸 것만 보아도 얼마나 인기였는지 잘 알수 있다.

 

요한 슈트라우스(아버지)

 

토데스코 영감은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것이 낙이었다. 그래서 예티를 후원한 것이다. 비엔나에 있는 그의 저택은 영향력있는 예술가들이 밤낮으로 모여드는 살롱이었다. 예티가 요한 슈트라우스를 처음 만난 것은 아마 1861년 아니면 1862년이라고 한다. 요한 슈트라우스는 1825년에 태어났으므로 예티가 7년 연상이 된다. 두 사람은 서로 얘기만 많이 듣고 있다가 처음으로 얼굴을 대면하자 감개가 무량했던 모양이었다. 그때 예티는 이미 40대 중반에 접어든 입장이었지만 워낙 반반하다보니 20대 여인 못지않은 모습이었다. 아마 요한 슈트라우스도 처음에는 예티가 그렇게 나이를 많이 먹은 여자인줄을 몰랐을 것이다. 게다가 비엔나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길을 지나가는 사람까지도 예티가 토데스코 영감의 정부인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요한 슈트라우스로서는 그런 예티를 그저 예의적으로 만났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예티가 요한 슈트라우스에게 ‘어머, 슈트라우스 선생님! 저는요 얼마 전에 런던에서 아버님과 함께 공연한 일이 있어요! 호호’라고 하며 접근하자 한다하는 슈트라우스도 그저 눈이 화려했을 뿐이었다. 예티는 참으로 애교만점의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예티를 만난 요한 슈트라우스는 아무래도 전에 어디선가 만난 일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자 예티가 말을 거들었다. ‘슈트라우스 선생님! 선생님은 저를 잘 모르시겠지만요 실은 16년전에 선생님을 만나서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모른답니다. 호호’라고 말했다. 예티는 16년전에 요셉슈타트에 있는 슈트로이쎄 홀(Sträussel-Säle)의 무도회에서 요한 슈트라우스가 처음 데뷔했을 때 그 자리에 있었다. 요한 슈트라우스는 그제서야 그때 웬 밝고 명랑하고 예쁜 아가씨가 자기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일을 생각하며 오히려 가슴이 설레었다. 그렇게 하여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더구나 둘 다 음악가가 아니던가!

 

예티 트레프즈(리토그라프)

 

요한 슈트라우스(샤니)와 예티는 1862년 8월 27일 슈테판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당시 예티는 44세의 중년여인이었고 요한 슈트라우스는 예티보다 7년 아래인 37세의 청년이었다. 처음에는 그동안 예티에게 투자한 토데스코의 입장이 있어서 결혼이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으나 토데스코는 의외로 선선히 예티를 놓아 주었다.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들은 비엔나 시민들은 모두 놀랬다. 화려하고 감미로운 왈츠를 선사해 주는 위대한 요한 슈트라우스가 어찌하여 저런 나이 많은 여자, 스캔들이 많은 여자, 거의 20년 동안 돈 많은 영감의 정부인 여자, 사생아가 서너명이나 된다는 여자와 결혼한다니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요한 슈트라우스의 어머니 안나도 결혼을 반대했고 동생들인 요셉과 에두아르드도 결혼을 반대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행복했다. 두 사람은 현재 요한 슈트라우스 박물관으로 되어 있는 2구 프라터슈트라쎄 54번지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지하철 U1의 네스트로이플라츠에서 내리면 지척인 곳이다. 이 집은 요한 슈트라우스가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작곡한 집이다.

 


요한 슈트라우스가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작곡한 프라터슈트라쎄 54번지의 집은 현재 2층이 '요한 슈트라우스 보눙'으로서 기념관이며 아래층은 '3/4 박자'(Takt)라는 카페 식당과 맥도날드이다. 예티는 요한 슈트라우스와 결혼하고 나서 이 집에서 살았다.

 

요한 슈트라우스는 예티를 통하여 음악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음악가의 아내가 음악가이므로 잔소리도 많았겠지만 그보다도 격려와 자문과 심부름이 더 많았다. 예티는 요한 슈트라우스의 수입과 지출 관리를 장부에 적으면서 철저히 관리했고 악보 관리도 했으며 오케스트라 사보도 해주고 출판사와의 계약업무도 맡아했다. 비서도 이런 비서가 없을 정도였다. 말하자면 요한 슈트라우스의 매니저였다. 나중에는 요셉 슈트라우스도 ‘예티는 우리 집안에서 없어서는 안될 필수불가결의 인물이다’라며 형수를 따랐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폴카인 '트리츄-트라츄'(Tritsch-tratsch)는 예티의 강아지 이름이었다고 한다. 트리츄-트라츄는 영어로 Chi-chat, 즉 수다를 떨다는 뜻이다. 그런데 요한 네포무크 네스트로이의 코미디 중에서 Der Tritsch-tratsch 가 있는데 요한 슈트라우스는 아마도 이 연극(벌레스크)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 같다고 한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오페레타 '박쥐'에서 아델레의 아리아에 신사들이 환호를 보내고 있다. 예티는 '박쥐'의 초연에서 아델레를 맡았었다.

 

예티의 가장 큰 기여는 요한 슈트라우스로 하여금 오페레타를 작곡하게 격려한 것일 것이다. 예를 들면 ‘박쥐’는 순전히 예티의 간곡한 격려에 의해서 완성된 것이다. 일각에서는 요한 슈트라우스가 오펜바흐의 오페레터에 충격을 받아 자기도 오페레타를 작곡해야 겠다고 마음 먹고 있던 중 '한 밤중의 만찬'이라는 스토리를 읽고나서 '박쥐'를 작곡하게 되었다고 한다. 예티는 ‘박쥐’의 초연에서 하녀 아델레의 역할을 맡아 대성공을 거두었다. 혹자는 ‘박쥐’가 예티와의 결혼 이전에 완성된 것이라고 하지만 실은 결혼 후에 완성한 것이다. 예테는 요한 슈트라우스로 하여금 궁정악단 지휘자가 되도록 격려해주었다. 그리하여 결혼 이듬해인 1863년 요한 슈트라우스는 마침내 궁정악단의 지휘자라는 영예를 안게 되었다. 그러나 꽃노래도 몇 번 들으면 귀찮아 진다는 속담처럼 천성이 카사노바 친구쯤 되는 요한 슈트라우스는 결국 얼마후 예티와 이혼하고 두 번째 결혼을 한다. 일설에 의하면 예티의 사생아 아들이 알고보니까 실은 예티가 런던에서 요한 슈트라우스(아버지)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어 낳은 아들이라는 것이 밝혀져서 요한 슈트라우스(아들)로서는 도저히 마음이 괴로워서 결국 헤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비엔나 슈타트파르크에 있는 요한 슈트라우스 황금 기념상

 

예티는 그후 약간 오래 살아서 1878년, 60세가 되던 해의 4월 8일에 심장마비를 일으켜 그날 밤에 세상을 떠났다. 평소에 예티를 괴롭히던 아들 중의 하나가 보낸 편지를 보고 충격을 받아 심장마비를 일으켰다고 한다. 그 아들은 편지에서 ‘아버지가 누군지 아니까 다 털어 놓겠다’고 쓰고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고 한다. 예티는 히칭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장례식 때에 요한 슈트라우스는 어딜 갔는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장례식의 모든 절차는 동생인 에두아르드 슈트라우스가 맡아서 했다. 요한 슈트라우스는 예티가 죽은지 7주후인 1878년 5월 28일 에르네스티네 헨리에테 안젤리카 디트리히라는 가수와 재혼하였다. 그리고 잘 아는 대로 요한 슈트라우스는 1899년 향년 74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에는 예티가 아니라 세 번째 부인인 아델레와 함께 합장되어 있다. 예티는 히칭공동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헨리에타 슈트라우스(예티 트레프즈)의 묘지. 히칭공동묘지. 예티는 알저 포아슈타트에서 태어났지만 히칭에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