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이야기/유서깊은 광장

미하엘러플라츠(Michaelerplatz)

정준극 2010. 4. 6. 13:50

미하엘러플라츠(Michaelerplatz)

호프부르크 궁전 앞 광장 

 

호프부르크의 정문인 미하엘러토르와 그 앞의 광장. 광장에서는 로마시대의 유적이 발굴되어 노천박물관처럼 공개하고 있다.

 

미하엘러플라츠(미하엘 광장)은 호프루브크의 옛 정문 앞에 펼쳐진 광장이다. 호프부르트의 옛 정문의 이름은 미하엘러토르(미하엘 문)이다. 미하엘러 광장의 오른쪽은 요셉스플라츠와 스페인승마학교 쪽으로 가는 길이며 정면으로는 페터스키르헤(베드로교회)로 통하는 콜마르크크 길이다. 콜마르크트 길과 요셉스플라츠로 가는 길 중간에는 성미하엘교회가 있다. 성미하엘교회는 합스부르크 왕조 사람들의 심장을 보관한 장소로 유명하다.

 

미하엘러플라츠에서 발굴된 로마시대의 유적.

 

미하엘러플라츠가 구상된 것은 1725년이지만 실제로 광장이 마련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와서이다. 광장을 중심으로 방사선 형태의 길이 뻗어 나가도록 계획되었다. 그리하여 미하엘러토르를 중심으로 시계방향으로 샤우플러가쎄(Schauflergasse), 헤렌가쎄(Herrengasse), 콜마르크트(Kohlmarkt), 라이트슐레가쎄(Reitschulegasse)가 펼쳐져 있으며 뒤편으로는 호프부르크로 들어갈수 있다. 헤렌가쎄 쪽으로는 옛 부르크테아터(Burgtheater)가 있었다. 지금은 라트하우스 길건너편에 새로지은 건물이 부르크테아터이다.

 


2007년 미하엘러플라츠에서 열린 안드레 류와 요한 슈트라우스 오케스트라의 공연

 

미하엘러플라츠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1221년 바벤버그의 대공인 레오폴드6세가 이곳에 봉헌한 성미하엘교구교회에서 따온 것으로 1850년부터 미하엘러플라츠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성미하엘교회는 호프부르크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세운 교회이다. 당시에 호프부르크에는 약 1천명의 식솔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궁전의 주변에 여러 교회를 세워서 신앙심을 굳건히 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궁전 내에는 호프카펠라가 자리 잡게 되었으며 이밖에 미하엘러키르헤는 물론, 페터스키르헤와 아우구스티너키르헤도 궁정 사람들을 위한 교회로서 이용되었다. 그후 1725년에 호프부르크에 거장 요셉 에마누엘 피셔 폰 에어하르에 의해 미하엘러트락트(미하엘 동)을 증축하면서 그 앞의 거리를 정비하고 미하엘러플라츠를 마련하여 사통오달이 되게 하였다. 광장이 본격적으로 조성된 것은 1729년 칼6세(샤를르 6세) 시절이며 그후 1741년 그의 딸인 마리아 테레자의 시절에 발하우스플라츠와 부르크테아터가 마련되었다. 광장은 계속 확대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완성된 것은 1893년 이었다.

 

미하엘러플라츠에 있었던 부르크테아터(오른편의 작은 건물). 지금은 철거되어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다. 부르크테아터에서는 모차르트의 '후궁에서의 도주' '여자는 다 그래' '피가로의 결혼'이 초연되었다.

 

미하엘러플라츠에는 비엔나에서 최초로 가스 가로등이 설치되어 밤 길을 밝혔다. 1838년의 일이었다. 그후 교통이 발달하자 자동차가 통행하게 되어 미하엘러플라츠는 로터리 형태로 발전하였다. 1927년의 일이었다. 미하엘러플라츠 3번지는 유명한 로스하우스(Loos Haus)이다. 아돌프 로스가 설계한 새로운 형태의 건물로서 당시 사람들은 건물이 너무 밋밋하다고 하여 핀잔을 주었다. 미하엘러플라츠의 한 가운데는 고고학적 발굴을 위해 1991년에 파헤쳤는바 놀랍게도 로마시대의 유적이 그대로 발견되어 오늘날 잘 보존하고 있다.

 

미하엘러플라츠에서 호프부르크를 바라보며 서 있는 로스 하우스. 현재 은행과 카페 등이 들어서 있다. 오른쪽 길이 콜마르크트이며 왼쪽 길이 헤렌가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