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이야기/유서깊은 광장

슈봐르첸버그플라츠(Schwarzenbergplatz)

정준극 2010. 4. 9. 08:58

슈봐르첸버그플라츠(Schwarzenbergplatz)

슈봐르첸버그 장군의 기마상이 압도하는 광장 

슈봐르첸버그 장군 기마상 

 

비엔나 시내에서 두루두루 관광해야 할 곳이 하도 많지만 슈봐르첸버그플라츠를 그냥 지나친다면 비엔나의 진면목을 이해하는데 부족함이 있을수 있다. 슈봐르첸버그플라츠는 필견의 명소이다. 벨베데레 궁전을 간다면 전차를 타거나 자가용을 타고 렌베그를 쭉 올라가도 되지만 슈봐르첸버그플라츠로부터 천천히 걸어가면서 주변 건물들을 살펴보는 것이 더 유익하다. 여러나라 대사관들도 이 거리에 있으므로 어느나라 대사관인지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다. 슈봐르첸버그플라츠는 비엔나의 1구 인네레 슈타트, 3구 란트슈트라쎄, 4구 뷔덴이 서로 만나는 교차점이다. 그만큼 위치적으로 중요하다. [광장에 있는 기마상은 슈봐르첸버그 장군이다. 슈봐르첸버그 장군은 슈봐르첸버그 공자인 칼 필립을 말한다. 1771년에 비엔나에서 태어나서 1820년, 49세로 작소니 공국의 라이프치히에서 세상을 떠난 오스트리아 제국의 뛰어난 장군이다. 칼 필립 슈봐르첸버그 공자는 1788년, 17세에 제국 기병에 입대하였고 이듬해에 벌써 터키와의 전쟁에 참여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어 수없는 전투에 참전하였는데 특히 프랑스 혁명전쟁, 나폴레옹 전쟁 등에 참여하여서 용감성으로 뛰어난 전공을 세웠다. 그는 외교관으로서도 두드러진 활약을 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의 국익을 위해 헌신하였다. 특히 나폴레옹과 프란시스 1세 황제의 딸인 마리 루이스의 결혼을 주선한 인물로서도 기억되고 있다.

 

1900년도의 슈봐르첸버그 플라츠 일대. 저 멀리 기마상은 보이지만 소련 적군 기념상은 없다.

 

슈봐르첸버그플라츠에서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길 한가운데의 전차길 옆에 우뚝 서 있는 슈봐르첸버그 장군의 기마상이다. 그 뒤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분수(호흐슈트랄브룬넨: Hochstrahlbrunnen)가 있으며 또 그 뒤로 황금헬멧을 쓰고 황금 문장을 붙잡고 있는 소련 붉은 군대(적군) 병사의 기념상이 서 있다. 그 뒤로는 팔레 슈봐르첸버그(Palais Schwarzenberg)가 있다. 팔레 슈봐르첸버그는 벨베데레와 담장을 함께 하고 있다. 슈봐르첸버그플라츠를 둘러싸고 있는 건물들은 예전에 모두 지체높은 귀족들의 시내궁전(팔레)이었다. 현재는 관공서, 대사관 등이 들어서 있다. 슈봐르첸버그플라츠로부터 벨베데레로 가는 길에는 실로 대사관들이 많이 있다. 그리하여 이 지역을 대사관 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프랑스대사관이다.

 

슈봐르첸버그플라츠에는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비엔나 성벽과 보루들이 있었다. 그래서 비엔나 센터와 교외를 구분하였다. 그러다가 1858-1863년 비엔나 시내 확장계획에 따라 성벽을 허물었으며 그 때에 슈봐르첸버그플라츠도 광장으로서 생겨났다. 1895-1902년 사이에는 빈강(Wienfluss)이 현재의 로트링거슈트라쎄와 암 호이마르크트(Am Heumarkt) 사이에 흘렀다. 그래서 팔레 슈봐르첸버그로 가려면 슈봐르첸버그브뤼케를 건너야 했다. 빈강은 지금은 복개되어 있으며 다만 슈타트파르크(시립공원)의 한쪽으로 자취가 남아 있다. 1863년 프란츠 요셉 황제는 오스트리아군을 이끌고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프러시아에 승리한 칼 필립 슈봐르첸버그 장군을 기리는 기념상을 세우도록 지시했다. 조각가 에른스트 해넬(Ernst Hähnel)이 책임을 맡았다. 1867년 10월 20일 제막되었다. 로트링거슈트라쎄와 링슈트라쎄 사이의 슈봐르첸버그 장군 기마상이 있는 광장을 슈봐르첸버그플라츠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1880년부터였다.

 

슈봐르첸버그 궁전. 한쪽에는 호텔이 들어서 있으나 다른 한쪽에는 후손들이 살고 있다.


분수(Hochstrahlbrunnen)는 1873년에 완공되었다. 슈티리아 알프스에서 비엔나까지 파이프 수로 공사가 완성된 것을 축하하기 위한 분수이다. 비엔나에는 1860년대에 상수도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때에는 비엔나 숲에 있는 여러 샘으로부터 또는 빈강으로부터 물을 끌어서 상수도로 공급했다. 하지만 계속 증가하는 인구로 인하여 상수도원을 새로 개발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슈트리아의 알프스는 천혜의 상수도원이었다. 분수의 제막식에는 프란츠 요셉 황제가 친히 참석하였다. 혹자는 그 뒤에 있는 소련 적군 병사의 당당한 모습이 보기 싫어서 높은 분수가 가려주고 있다는 얘기를 하지만 그건 별로 명분이 안되고 있다. 가려 줄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날이 더 많다. 소련 적군 병사의 기념상(Heldendenkmal der Roten Armee)은 2차 대전 직후인 1945년 8월 소련군 전몰장병들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것으로서 분수보다 훨씬 나중에 세워진 것이다. 비엔나 사람들은 소련 적군 영웅 기념상을 보통 러시아기념상(Russendenkmal)이라고 부른다. 이곳에는 1955년까지 소련의 T-34 탱크가 전시되어 있었으나 소련군이 비엔나에서 철수하면서 그것도 치워버렸다. 소련은 비엔나를 임시로 점령하고 통치할 때인 1946년 4월부터 1956년 7월까지 슈봐르첸버그플라츠의 남쪽 부분을 자기들 마음대로 ‘스탈린 플라츠’라고 불렀다. 물론 소련군이 철수하자 스탈린 플라츠라는 이름은 종적도 없이 사라졌고 예전의 슈봐르첸버그플라츠라는 이름이 복원되었다.

 

호흐슈트랄브룬넨. 둥근 수조의 가장자리에는 365개의 작은 분수를 설치했다. 섬에는 가운데 가장 높은 물줄기를 뿜어내는 분수 이외에 6개의 중간 사이즈의 분수가 있다. 그 바깥으로는 12개의 작은 분수가 있다. 또 그 바깥으로는 24개의 작운 분수가 있다. 그리고 더 바깥 쪽으로는 30개의 작은 분수가 설치되어 있다. 1년 열두달, 365일, 1주일의 7일, 한달 30일을 상징한다.

 

이제 슈티리아 알프스로부터의 파이프라인에 대하여 좀 더 설명해 보자. 이 장대한 파이프라인은 19세기 후반에 비엔나 현대화를 이끈 상징이었다. 아무튼 비엔나 사람들은 '우린 이제 알프스의 만년설에서 녹아내린 생수를 마신다'면서 대단히 자랑스러워했다. 공사가 끝나자 공사책임을 맡았던 안톤 가브리엘리(Anton Gabrielli)는 공사 완공의 기념으로 분수를 제작하자고 하면서 20만 크로네를 기증하였다. 그래서 슈봐르첸버그플라츠의 분수가 탄생한 것이다. 그로부터 약 20년후, 안톤 가브리엘은 지난번과 비슷한 금액을 다시 기증하면서 분수의 조명설치를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1906년에 조명시설이 완성되었으며 지금까지 여름 밤에 파랑, 빨강, 초록색의 조명이 찬란하게 비쳐지고 있게 되었다. 가운데 분수를 중심으로 외곽에 365개의 작은 분수들로 구성된 서클이 있다. 1년 365일을 상징하는 것이다. 가운데 분수와 365개의 서클분수 사이에는 여섯개의 중간 분수와 1개의 섬이 있다. 이것은 한 주간의 7일을 상징하는 것이다. 가운데의 높이 물을 쏘아 올리는 분수들은 12개이다. 물론 1년 열두달을 상징한다. 열두개의 중간 분수를 둘러싸고서는 24개의 작은 분수들이 있다. 하루의 24시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중앙의 섬으로부터는 30개의 분수가 펼쳐져 있다. 이것은 한달 30일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같은 배열은 분수를 처음에 건설할 때에 이루어지지 않았고 한참 후인 1906년에야 완성되었다. 분수와 프린츠 오이겐 슈트라쎄의 사이에는 에두아르트 쥐스(Eduard Suess)의 기념상이 있다. 지질학가로서 비엔나 시의회를 대표했던 그는 1836년에 상수도관을 설치하자고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이다. 그는 도나우와 비엔나 운하, 그리고 비엔나 강을 복개하고 만든 운하를 정리하는 책임을 지기도 했다.

 

소련 적군 병사 기념상과 호흐슈트랄분스. 그 뒤가 슈봐르첸버그 궁전이다. 비엔나 시민들은 소련 적군 기념상이 보기가 싫어서 비엔나 시당국에 분수를 좀 더 높여서 가려달라고 했지만 기술적, 환경적으로 어려움이 있어서 소련 군인을 완전히 가리지는 못했다.

 

비엔나 시당국은 슈봐르첸버그플라츠를 보다 아름답고 깨끗하게 꾸미기 위해 특별계획을 세웠다. 2003-04년도에 시행된 이 계획에 따라 거리의 조명을 완전히 새로 설치하였으며 건물들도 모두 세수를 하여 깨끗한 품위를 유지토록 했고 아울러 여유가 있는 땅을 찾아서 화단으로 만들었다. 가장 관심을 끈 것은 가로등을 어떤 모양으로 만드느냐는 것이었다. 예전에 만들었던 가로등은 마치 주교의 지팡이처럼 생겨서 화제를 불러 모은 일이 있다. 이번에도 그렇게 만들자는 제안이 우세했었다. 하지만 너무 가톨릭 주교의 냄새를 피우면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기분이 좋지 않을수도 있을지 모르므로 조심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현재 세워진 가르등의 모습은 아래 사진에서 볼수 있듯이 밋밋한 철구조물이다.

 

슈봐르첸버그 장군 기마상과 광장을 경유하여 운행하는 전차들. 눈이 많이 왔다. 하지만 이 정도는 보통이다. 

 

슈봐르첸버그플라츠에는 전차 D번이 있어서 첸트룸(센터)에서 쥐드반호프(남부역)까지 가며 또한 2번도 링슈트라쎄를 거쳐 정류한다. 버스는 3A와 4A의 정류장이 있다. 2019년에는 U2가 새로 정류장을 만들 계획이다. 이제 슈봐르첸버그플라츠를 둘러싸고 있는 건물들의 면모를 살펴보자.

 

- 1번지는 팔레 에르츠헤르초그 루드비히 빅토르(Palais Erzherzog Ludwig Viktor)이다. 거장 하인리히 페르스텔(Heinrich Ferstel)이 1863년에 두 채의 팔레를 건축했는데 그 중 하나가 루드비히 빅토르 대공을 위한 팔레(시내궁전)로서 실제로는 1구 슈베르트링의 끝머리에 자리잡고 있다. 이 팔레는 1900년 새로 단장되었으며 1910년에 정부에서 매입하여 1911년부터 1939년까지 밀리태르카지노(Militärkasino: 군인카지노)로서 사용되었다. 이 팔레는 1981년부터 Burgtheater im Kasino와 Verein der Alt-Neustädter(페어라인 데어 알트 노이슈태터: 구노이슈태터 연맹)가 사용하고 있다. 알트 노이슈태터는 노이슈타트에 있는 군사아카데미를 말하며 이 팔레에는 아카데미동창회의 사무실이 있다. 페르스텔이 두 번째로 지은 건물은 건너편의 17번지이다.

 

팔레 빅토르. 노이슈타트군사학교 동창회사무실

 

- 2번지는 팔레 비너 폰 벨텐(Palais Wiener von Welten)이다. 1869년에 건축가인 아우구스트 슈벤덴봐인(August Schwendenwein)과 요한 로마노(Johann Romano)가 공동으로 설계한 건물로서 에두아르트 비너 폰 벨텐의 요청으로 지은 건물이다. 현재 스페인 문화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팔레의 안뜰에는 작은 포도밭이 있다.

- 3번지는 구국립철도회사(Staats-Sisenbahn-Gesellschajft) 본부였다. 로트링거슈트라쎄의 끝머리에 위치하고 있다. 하인리히 페르스텔이 설계하였다. 1945년 폭격을 받아 거의 전소되었다. 1983년에 예전의 현관을 그대로 재현하여 복구했다. 현재 라이파이젠(Reiffeisen)회사 소유의 사무실 건물이다.

- 4번지는 하우스 데어 인두스트리(Haus der Industrie)이다. 상공회의소와 같은 건물이다. 로트링게슈트라쎄의 끝머리에 있으나 행정구역상으로는 3구 란트슈트라쎄에 속하여 있다. 1945-55년까지는 전후 오스트리아를 분할 통치한 4개 연합국 의회가 사용했다.

 

하우스 데어 인두스트리(상공회의소)

 

- 5번지는 팔레 폴라크 파르나우(Palais Pollack-Parnau)라고 불리던 건물이다. 3구 렌베그가 시작되는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1914년에 건설되었다. 유태인 기업가인 폴라크 폰 파르나우 가문의 소유였으나 1938년 나치에 의해 몰수되었다. 2차 대전중에 폭격을 받아 크게 파손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폴라크 가족이 폐허를 다시 매입하여 예전과 같은 건물을 재건하였다. 1950년대에는 슈타이르 다임러 푸흐(Steyr Daimler Puch)회사의 사무실이었다. 2000년에 철근과 유리를 사용한 현대적 건물로 새롭게 단장하였다.

- 6번지는 아르놀트 쇤버그 센터(Arnold Schoenberg Center)이다. 오스트리아 브랜디 전매회사 건물이었으며 1917-18년에 에른스트 고트힐프(Ernst Gotthilf)와 알렉산더 노이만(Alexander Neumann)이 다핑거슈트라쎄(Daffingerstrasse)와 차우너가쎄(Zaunergasse)사이에 길모퉁이 집으로 개조하였다. 현재 현대작곡가인 아르놀트 쇤버그 센터가 들어서 있다.


아놀드 쇤버그(아르놀트 쇤베르크) 센터


- 8번지는 슈타트키노(Stadtkino)이다. 렌베그가 시작되는 곳에 있는 건물로서 상업용 영화관이 아닌 영화관이 들어서 있다. 영화 비엔날레가 열리는 장소이다. 1916년부터 문을 연 영화관이 아직도 영화를 상영하고 있다. 건물의 한쪽에는 비엔나에서 유명한 이용소인 Bundy & Bundy가 있다.

- 9번지는 팔레 슈봐르첸버그(Palais Schwarzenberg)이다. 렌베그와 프린츠 오이겐 슈트라쎄의 사이에 걸쳐 있는 아름다운 팔레이다. 호흐슈트랄브룬넨(높이 솟아오르는 분수)과 헬덴덴크말(Heldendenkmal: 영웅기념상: 소련 적군병사 기념상)의 뒤편에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다. 호흐슈트랄브룬네은 1873년에 완성되었으며 루쎈덴크말(Russendenkmal)이라고도 불리는 소련 적군병사 기념상은 1945년에 만들었다.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칼 1세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20004년 복자의 반열에 올랐다. 이를 축하하고 추모하는 미사가 2004년 10월 21일 팔레 슈봐르첸버그에서 거행되었다. 복자 칼의 축일은 10월 21이다. 1911년 10월 21일 칼이 부르봉 파르마의 치타와 결혼한 날이다. 

 

- 11번지는 EU 산하의 EU 기본권 사무소이다. 약자로 FRA라고 부른다. Fundamental Rights Agency를 말한다. 독일어로는 Agentur der EU(Europäischen Union) für Grundrechte이다. 예전에는 구트만(Gutmann)이라는 사람의 저택이었다.

- 12번지는 프랑스 대사관이다. 1904-1912년 파리의 건축가인 조르즈 셰단느(Georges Chedanne)가 설계했다. 테크니커슈트라쎄와 브루크너슈트라쎄의 사이에 있다. 내부는 프랑스의 아르 누보 양식으로 단장되어 있다.

 

슈봐르첸버그플라츠에 있는 프랑스 대사관

 

- 14번지는 비엔나 상인연합회(Wiener Kaufmannsschaft) 건물이다. 네오바로크 양식으로 에른스트 고트힐프와 오스카르 노이만의 공동 작품이다. 비엔나 상인연합회 사무실은 1903년 11월 7일 프란츠 요셉 황제가 참석하여 오픈했다. 오늘날에는 비엔나 경제회의소 사무실이 있으며 무역, 운송, 정보, 콘설팅 업무를 관장하고 있다. 14번지와 15번지 사이의 로트링거슈트라쎄 교차로에는 1906년 리하르트 카우풍겐(Richard Kaufungen)이 제작한 조각가 게오르그 라파엘 돈너의 동상이 있다. 돈너 동상은 2차 대전 중에 나치가 군수목적으로 철거하여 가져갔으나 1947년 다시 만들었다.

 

조각가인 라파엘 돈너 기념상

 

- 15번지는 팔레 오펜하임(Palais Ofenheim)이다. 철도사업가인 빅토르 오펜하임(Viktor Ofenheim)이 1868년에 아우구스트 슈벤덴봐인과 요한 로마노에게 의뢰하여 지은 건물이다. 1931년 이래 취리히 보험회사의 오스트리아 지사가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아름다운 현관의 팔레 오펜하임

 

- 17번지는 팔레 베르트하임(Palais Wertheim)이다. 기업가인 프란츠 폰 베르트하임이 1868년에 지은 건물이다. 캐른트너 링 18번지의 모퉁이에 있다. 1910년에 주거 및 사무실 용으로 개조되었다. 이 건물의 아래층에 1978년 오스트리아 최초의 맥도날드가 들어섰다. 사람들은 비엔나의 유서 깊은 건물에 노란 색의 맥도날드가 들어서자 기분이 나쁘다고 했지만 장사는 잘 되었다.  


팔레 베르트하임. 아래층에 맥도날드가 들어서 있다. 이 건물의 뒤편은 임페리얼 호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