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7년전쟁의 모든 것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참전

정준극 2010. 4. 19. 08:20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참전

 

해가 바뀌어 1761년이 되자 유럽의 서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스페인과 포르투갈도 그동안 가만히 있었던 것이 민망스러웠던지 고개를 기웃거리며 7년 전쟁의 소용돌이에 끼어 들었다. 실상 스페인은 예전부터 합스부르크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의 종주국인 오스트리아가 저렇게 사방팔방에서 죽어라고 애쓰고 있는 모습을 뻔히 보면서도 강건너 불보듯 모른채하며 지냈던 것을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있던 입장이었다. 스페인은 오스트리아를 지원키로 작정하였다. 사정이 이렇게 돌아가자 영국은 선수를 쳐서 1762년 1월 4일 스페인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했다. 이에 스페인도 지지 않겠다는 식으로 며칠 후인 1월 18일에 영국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자 스페인에 감정이 많은 포르투갈이 영국과 동맹을 맺고 전쟁에 뛰어 들었다.

 

슈봐이드니츠는 폴란드어로 스비드니카라고 한다. 사진은 슈봐이드니츠의 구시가지. 7년 전쟁 중에 오스트리아가 장악하고 있었다.

 

1761년의 전황은 어떠했는가?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대제는 심기일전, 시골에 있는 농부들까지 모두 동원하여 10만 대군을 편성하고 오스트리아, 프랑스, 러시아, 스웨덴에 맞서기로 했다. 그런 중에도 프러시아 군의 페르디난트 브룬스뷔크 공자가 적은 병력으로 9만2천이나 되는 프랑스 대군을 빌링하우젠(Villinghausen) 전투에서 격퇴하였다. 프러시아군의 사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다. 그렇다고 전황이 프러시아에 유리하게만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표트르 루미얀체프가 지휘하는 러이사군은 프러시아가 장악하고 있던 포메라니아의 콜버그(Kolberg)를 휩쓸었고 오스트리아군은 폴란드 남부 요새인 슈봐이드니츠(Schweidnitz)를 장악하였다. 프러시아가 콜버그를 잃은 것은 발트해에 있는 프러시아의 마지막 군항을 잃은 것이어서 타격이 컸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처음에 10만 대군을 조성하여 위세를 올리던 프러시아는 점점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다. 프러시아와 동맹국인 영국에서는 이미 프러시아가 조만간 무너질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망해가는 프러시아를 돕는 것은 낭비라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영국은 프러시아에게 '이제 그 지겨운 전쟁 좀 그만하고 양보할 것은 양보해서 평화를 찾아보시오'라고 권면했다. 사실상 프러시아군은 10만에서 6만으로 줄어들었다. 한 해 사이에 무려 4만의 병력을 손실한 것이다. 고향과 가적들을 떠나 전장에서 죽은 병사들만 억울하였다.

 

제정러시아의 표트르(페터)3세. 그는 1762년 1월에 엘리자베트 여제의 뒤를 이어 짜르가 되었으나 친프러시아적 태도로 인하여 인기를 얻지 못했으며 더구나 무능하다는 평가가 있었다. 짜르가 된지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으며 부인인 캐서린(카테리나)이 여제가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표트르3세는 부인인 캐서린2세에게 암살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1762년 1월 5일, 영국이 스페인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던진 바로 다음날 제정러시아의 엘리자베트 페트로브나 여제(1709-1762)가 세상을 떠났다. 엘리자베트 여제는 러시아군의 총사령관으로서 7년 전쟁의 이곳 저곳을 진두지휘했었다. 엘리자베트 여제의 뒤를 이어 황제(짜르)에 오른 표트르(페터)3세는 몇년에 걸친 전쟁으로 나라의 경제가 말이 아니게 되자 이 참에 전쟁을 끝낼 심산으로 유럽 전선, 특히 베를린에 나가 있는 러시아군을 모두 불러들였다. 러시아는 프러시아와 생페터스부르크 조약을 맺어 프러시아-러시아간의 휴전을 성사시키고 한편 프러시아와 스웨덴의 휴전을 종용하였다. 그해 10월 프레데릭 대제는 실레지아의 일부를 점령하고 있던 오스트리아군을 프라이버그(Freiberg)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브룬스뷔크군은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던 괴팅겐을 탈환하고 이어 카셀(Kassel)까지도 수중에 넣었다. 영국은 라고스와 퀴베롱 전투에서 프랑스 해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이후 브리타니의 프랑스 항구들에 대한 봉쇄작전을 계속하였다. 이통에 프랑스 해군은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프랑스에서는 백성들의 사기가 전반적으로 추락해 있었다. 그러다가 뉴파운드랜드에서 영국군이 프랑스군을 대파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쟁은 해서 무얼하나...'라는 노래가락이 이곳저곳에서 흘러나왔다. 프랑스의 모모한다는 인사들은 공공연히 영국에 대하여 '우리 제발 좀 잘 지냅시다'면서 평화에 대한 운을 띠게 되었다.

 

작소니에 있는 프라이버그. 사진은 프라이버그 시청과 광장. 7년 전쟁 중에 프레데릭 대제가 이곳을 점령하고 있던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