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7년전쟁의 모든 것

7년 전쟁의 득실

정준극 2010. 4. 21. 23:43

7년 전쟁의 득실

 

영-불간의 적대관계는 1763년 파리조약으로 끝을 맺었다. 파리조약의 내용은 영국과 프랑스가 세계의 이곳저곳에 있는 식민지들을 상당히 복잡하게 주고 받는 것이었다. 평화스럽게 살고 있던 남의 땅을 무력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더니 이제는 '너 이거 가져, 나 이거 가질께'라는 식으로 주고받기까지 하게 되었던 것이다. 가장 중요한 교환은 프랑스가 루이지애나를 스페인에게 양보한것, 그리고 영국에게는 오늘날 미국 남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당시의 뉴 프랑스를 거의 모두 넘겨 준 것이었다. 프랑스가 그나마 간직한 영토는 생피엘 및 미켈롱(St Pierre and Miquelon) 섬뿐이었다. 프랑스는 뉴 프랑스를 포기할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카리비아해에 있는 섬들인 과델루페와 마르티니케를 포기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프랑스는 카리비아의 설탕을 잊지 못하여 뉴 프랑스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프랑스는 카리비아 섬들에서 생산되는 설탕으로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었다. 

 

세인트 루이스에서 바라본 미시시피 강.

 

프랑스는 또한 지중해의 미노르카 섬을 영국에 반환하였다. 스페인은 플로리다의 통치권을 영국에게 넘겨 주었다. 그러나 스페인은 프랑스로부터 미시시피 서쪽의 루이지아나 테리토리와 뉴 오를레앙스를 받았다. 이러한 교환에서 가장 득을 본 것은 물론 영국이다. 영국은 카리비아 해의 섬들로부터 이미 오래전부터 설탕을 생산하여 가져가고 있었기 때문에 설탕에는 별로 큰 관심이 없었다. 대신 뉴 프랑스를 받았고 플로리다를 얻었다. 이로써 영국은 사실상 북미를 총괄하는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물론 1774년 미국이 독립하기 전까지였다.

 

 뉴 오를레앙스의 부르봉 거리. 7년 전쟁의 여파로 영국은 프랑스로부터 뉴 오를레앙스를 받았다.

 

인도에서 영국은 북부 시르카르스를 확보하였다. 하지만 프랑스가 가지고 있던 무역항구는 모두 돌려주었다. 한편, 파리조약에 의하면 프랑스는 인도에서 어떠한 정착촌도 만들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만일 정착촌 건설이 진행되고 있는 곳이 있으면 파괴해야 했다. 다만, 무역항구 보호를 위해 최소 인원의 수비대는 둘수 있도록 했다. 최소 인원이기 때문에 병영이나 진지가 될수는 없었다. 인도에서 프랑스 세력이 종말을 고하게 된 또 다른 큰 이유는 프랑스와 동맹관계를 맺고 있던 벵갈이 패배한것도 있지만 인도 최대 도시중의 하나인 하이데라바드가 프랑스를 배반하고 영국 편에 서게 된것도 큰 이유 중의 하나였다. 실로 하이데라바드가 영국편이 된 것은 향후 영국이 인도를 지배할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었다.

 

하이데라바드의 샤르미나르(네개의 미나렛을 가진 모스크). 7년 전쟁 중에 하이데라바드는 프랑스 편에 있다가 영국 편으로 돌아섰다. 이로써 인도에서 영국의 영향력이 확고하게 되었다.

 

앞서도 언급하였지만, 유럽의 국경선은 후버투스부르크 조약(1763. 2)에 의해 거의 모두 전쟁 전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그리하여 프러시아는 실레지아를 계속 소유하게 되었다. 프러시아는 신성로마제국의 희생을 발판으로 하여 유럽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가 되었다. 프러시아가 강대해 진 것은 현대독일의 탄생을 가속화시켜 준 것이었다. 프러시아는 유럽에서 대영제국과 막상막하의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프레데릭 대왕이 처음에 오스트리아를 공격하여 7년전쟁이 막을 올리게 되자 사람들은 프레데릭을 전쟁광으로 보고 비난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유럽의 세력판도를 바꾸어 놓은 것이 되었으며 특히 프러시아의 괄목할 만한 도약을 이루게 해준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자는 별로 큰 손실을 입지 않고서도 리더쉽을 강화할수 있었다. 마리아 테레자의 시대는 오스트리아의 최대 번영시기로서 이 때에 보헤미아,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헝가리, 이탈리아 북부 등이 오스트리아의 영향아래에 들어오게 되었다. 7년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프랑스였다. 7년 전쟁의 패배로 프랑스는 1792년의 프랑스 혁명을 마지할수 밖에 없었다.

 

1792년 8월 프랑스 혁명 중에 튈러리 궁전을 공격하고 있는 장면. 7년 전쟁은 결과적으로 프랑스 혁명에 도화선을 붙여 준 것이었다. 

 

미국의 피츠버그는 7년전쟁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보여준 영국의 윌리엄 피트를 기념하기 위해 붙인 명칭이다. 마찬가지로 프레데릭 대제를 기리기 위한 지명도 많이 생겼다. 예를 들면 펜실베이니아주의 '킹 오브 프러시아'(King of Prussia)와 버지니아주의 프레데릭(Frederick)이다. 레씽의 '바른헬름의 민나'(Minna von Barnhelm)은 7년 전쟁의 주제로 삼은 것이다. 제임스 쿠퍼의 소설 '모히칸 족의 최후'(The Last of the Mohicans)는 북미에서의 7년 전쟁을 무대로 삼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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