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이야기/유서깊은 광장

카이저포룸 - 못 이룬 꿈

정준극 2010. 5. 4. 04:40

카이저포룸 - 못 이룬 꿈

Kaiserforum(황제의 광장)

 

카이저포럼(Kaiserforum)을 글자그대로 번역하면 '황제의 광장'이지만 구체적으로는 프란츠 요셉 황제가 호프부르크 궁전을 중심으로 삼아서 비엔나 중심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도시계획을 추진했던 것을 말한다. 현재의 호프부르크를 구성하고 있는 레오폴드 트락트(棟)를 시작으로하여 현재의 박물관 구역이 있는 곳까지 하나의 궁전단지를 조성하려는 계획이었다. 카이저포룸 계획은 헬덴플라츠(영웅광장)의 오른쪽으로(부르크토르에서 바라보았을 때) 노이에 부르크를 완성하였으며 아래 쪽으로 쌍둥이 건물인 미술사박물관과 자연사박물관을 완성하였지만 나머지는 여러 사정상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하고 미완성으로 남겼다. 고트프리트 젬페르가 그린 아래의 조감도를 보면 카이저포룸의 규모를 대충 알수 있다. 거장 건축가인 젬페르는 당초에 호프부르크를 대표하는 중앙건물(대관식건물)을 다시 짓고 이를 중심으로 양 옆에 노이에 부르크를 두며 다시 아래로 내려와 미술사박물관과 자연사박물관을 짓는다는 거창한 계획이었다. 궁전과 박물관의 사이에는 개선문과 같은 웅장한 부르크토르를 둘 생각이었다. 젬페르의 계획안에 의하면 두 박물관 건물의 가운데에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기념상이 들어서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다가 나중에 설계변경이 있었다. 카이저포럼은 링슈트라쎄가 조성될 때에 미술사박물관과 자연사박물관을 완성하여 그나마 상당부분은 진척을 보았지만 그후 노이에 부르크만을 완성하고 대칭되는 건물은 완성하지 못하는 등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만일 카이저포럼이 완성되었다면 합스부르크의 영광을 더 할수 없이 크게 떨쳤을 것이다.

 

1870년경 고트프리트 젬페르의 카이저포룸 계획안. 중앙에 대연회장 및 대관식 홀을 만들고 양쪽으로 날개처럼 새로운 호프부르크 궁전과 합스부르크이 소장품들을 전시하는 박물관들을 건설하는 대계획이었다. 현재 두개의 박물관은 완성되었으며 새로운 호프부르크는 오른쪽 것만 완성되었다. 노이에 호프부르크이다. 중간의 개선문과 같은 것도 규모를 줄여서 부르크토르로서 완성되었다. 아래쪽 두개의 박물관 사이에는 마리아 테레자 여제의 기념상을 설치하였다.

 

사실 호프부르크와 연계하여 합스부르크의 위대한 소장품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을 세우자는 갸륵한 뜻은 1864년 링슈트라쎄를 건설할 때 이미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합스부르크의 소장품 중에서 미술품과 자연세계에 관한 물품들을 우선 전시하는 두 건물을 세우게 되었다.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국립미술관인 미술사박물관(Kunsthistorische Museum: 쿤스트히스토리세 무제움)과 자연사박물관(Naturhistorische Museum: 나투르히르토리세 무제움)이다. 쌍둥이 건물인 두 박물관을 지을 때 설계에 대한 공모가 있었다. 네명의 당대 건축가들이 응모했다. 칼 하제나우어, 테오필 폰 한젠, 하인리히 페르스텔, 모리츠 뢰르였다. 그러나 심사에서 모두 흡족치 못하여 독일의 고트프리트 젬페르(Gottfried Semper)를 중재원으로 위촉하여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자연사박물관과 마리아 테레자 여제 기념상

 

젬페르는 현재의 레오폴드 트락트를 중심으로 시작하여 오늘날 박물관 크바르티어(구역)에 있는 궁정마구간까지 연결되는 웅대한 카이저포룸을 구상하였다. 궁정마구간(Hofstallungen)은 현재 두 박물관의 뒤편에 있는 방대한 건물로 19세기에 비엔나만국박람회가 열린 장소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피셔 폰 에어라흐(Fischser von Erlach)가 주축이 되어 카이저포룸 계획을 마련하였다. 이 계획은 1870년 프란츠 요셉 황제의 승인을 받아 이듬해인 1871년부터 건설공사에 들어갔다. 다시 설명하지만, 카이저포룸의 근간은 호프부르크의 레오폴드 트락트를 중심으로 좌우에 날개처럼 노이에 호프부르크를 건설하여 이어 링슈트라쎄를 건너서는 두 개의 박물관을 건설하여 하나의 거대한 단지를 조성한다는 것이다. 루돌프 폰 알트가 그린 아래 그림을 보면 카이저포룸의 계획을 충분히 짐작할수 있다.

 

루돌프 폰 알트가 그린 카이저포룸 계획도. 1880년도경.

 

두개의 박물관은 1880년에 외관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 후인 1891년 대대적인 개관식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다른 건축공사는 정치, 사회적인 혼란으로 지연되었다. 드디어 프란츠 요셉 황제는 1913년 한쪽 날개의 건축을 포기한다고 발표했다. 샤를르 대공의 기마상이 있는 쪽에 건설키로 한 서쪽 날개였다. 만일 서쪽 건물이 완성되었다면 오늘날의 헬덴플라츠는 면모를 갖출수 없었을 것이다. 호프부르크 앞의 헬덴플라츠에서 서쪽으로 시청과 보티프교회, 부르크테아터, 비엔나대학교의 웅장한 스카이라인은 바라볼수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오히려 다행이라는 견해도 있었다. 1913년에는 왼쪽 날개인 현재의 노이에 호프부르크 건물만이 완성되었다. 장엄하고 화려한 건물이다. 오늘날 노이에 호프부르크에는 에베소박물관, 고대악기 전시관, 비엔나 민족박물관, 사냥 및 무기박물관, 그리고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의 한 부분이 자리 잡고 있다. 두 개의 박물관 사이의 광장은 마리아 테레자 광장이라는 명명했으며 한 가운데에는 카스파르 폰 춤부슈(Karpar von Zumbusch)가 제작한 마리아 테레자의 기념상이 장엄하게 서 있다.

 

1900년경 헬덴플라츠 항공사진. 왼편에도 오른쪽과 대칭되는 궁전을 지으려고 했다. 카이저포룸의 양 옆에는 부르크가르텐(궁정정원: 오르쪽 검은 부분)과 폭스가르텐(시민정원: 왼쪽 끝 편)이 자리 잡고 있고 아래쪽으로는 미술사박물관과 자연사박물관의 모습이 보인다.

 

노이에 호프부르크의 건물들을 대칭되게 건설하려고 했으나 사정상 중단된후 일각에서는 그 자리에 공화국역사관(Haus der Geschichte der Republik)을 건설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오스트리아가 공화국이 되고 나서 나온 주장이었다. 하지만 그 또한 전쟁 등의 어려운 사정으로 없던 일이 되었다. 오늘날 카이저포룸이 들어서려던 서쪽으로는 폭스가르텐이 조성되어 엘리자베트 왕비 기념상, 프란츠 그릴파르처 기념상, 테세우스 신전 등이 들어섰다. 폭스가르텐의 장미정원은 비엔나에서도 알아주는 이름난 곳이다.

 

카이저포룸의 계획에 따라 1913년에 완성된 노이에 부르크. 그 앞의 오이겐 공자 기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