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더 알기/독-오 합병

[참고사항] 독일제국

정준극 2019. 7. 26. 10:34

독일제국(Deutsches Kaiserreich) - The German Empire - Imperial Germany

1871-1918년의 통일 독일의 제국


공식적으로는 도이체스 라이히(Deutsches Reich)라고 불리는 독일제국(도이체스 카이저라이히)은 1871년 비스마르크에 의한 독일국가의 통일로부터 1918년 1차 대전이 끝나고 프러시아 왕국의 빌헬름 2세 황제가 퇴위할 때까지의 독일을 말한다. (우리는 Deutsches Reich를 독일제국이라고 번역해서 사용하고 있지만 Reich 라는 단어는 나라, 국가라는 뜻일 뿐이다. 주권이 없는 나라가 있을수는 없지만 Reich는 구체적으로 주권이 있는 나라를 말한다. 그러므로 제국이라고 번역하는 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왕국을 독일어로는 Königreich(쾨니히라이히)라고 하는 것을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독일제국이 처음 형태를 보인 것은 1815년이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비엔나 회의'의 후속조치로였다. 비엔나에서는 나폴레옹 전쟁의 후속조치로서 유럽의 지도를 어떻게 새로 그리느냐는 문제를 놓고 이른바 '비엔나 회의'가 열렸고 이에 따라 독일 연방(German Confederation)이 창설되었다. 그것이 훗날 독일제국의 모태가 되었다. 독일 연방은 1814년 파리조약을 통해서 처음으로 언급되었고 이듬해인 1815년에 비엔나 회의 협약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독일 연방이 가능했던 것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독일인에 의한 하나의 나라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나라들은 연합하여 하나의 나라를 이루어야 한다는 국가주의적인 이념이 제기되어서였다. 그래서 지금의 독일 영토에 산재하여 있던 많은 왕국, 공국들이 독일인에 의한 하나의 나라를 만들자는 아이디어에 찬동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독일 연방은 생각만큼 많은 국가들이 동참하지 않아서 실질적이지 못했다. 그러다가 1848년에 이르러 이른바 범독일주의라는 독일 국가주의는 자유적이며 민주적인 성격으로부터 실질정치(Realpolitk)라는 실용적인 개념으로 급작히 변환되었다. 실질정치는 프러시아의 재상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주장에 의한 것이다. 비스마르크는 프러시아의 호엔촐러른 왕조가 전 독일 국가들을 통할하는 주도권을 잡게 되기를 바랬다. 그러자면 독일 국가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프러시아의 1차적인 라이발인 오스트리아는 제외하는 것으로 구상했다. 비스마르크의 이상은 보수적이고 프러시아가 주도하는 독일을 이룩하는 것이었다. 프러시아는 그동안 세번의 주요 전쟁을 통해서 국력을 과시한바 있다. 1864년에 덴마크와 벌인 2차 슐레스비히 전투, 1866년의 오스트로-프러시아 전쟁, 그리고 1870-71년의 보불전쟁이다. 이들 일련의 전쟁에서 프러시아가 승리하자 비스마르크는 그것을 바탕으로 독일 국민들을 설득할수 있었다.


1871년 현재의 독일 남부에 있던 국가들이 프러시아 왕국이 주도한 북부독일연맹(North German Confederation)에 통합되고서부터였다. 물론 오스트리아는 여기에 참여하지 않았다. 1871년 1월 1일을 기하여 독일제국의 새로운 헌법이 공포되었으며 이에 따라 프러시아 왕인 빌헬름 1세가 독일제국의 첫 황제로서 대관식을 가졌다. 독일제국의 수도는 프러시아의 수도인 베를린으로 결정되었으며 독일제국의 첫 재상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계속 역할을 맡게 되었다. 독일제국이 선포되는 시점에도 프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북부독일연맹과 이를 지지하지 않는 남부독일동맹은 아직도 보불전쟁을 치루고 있었다.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을 패배시킨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독일 통일의 마지막 걸림돌인 프랑스를 제거하여 독일 통일을 마무리하고자 했던 목적으로 일으킨, 프랑스 제2제국과 프로이센 왕국간의 전쟁으로 1871년 7월 19일에 시작하여 이듬해인 1871년 5월 10일에 끝난 전쟁이다. 독일이 프랑스를 우선 공격목표로 삼은 것은 유럽에서 프랑스가 전쟁이 나면 러시아보다 더 빨리 국민동원령을 내릴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라인란트의 독일의 주요 산업기지들이 프랑스 국경과 근접하여 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로서도 잃어버린 영토인 알자스-로렌을 다시 찾을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독일과의 전쟁에 과감히 참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잘 아는대로 독일이 워낙 맹렬하게 공격하는 바람에 프랑스는 거의 속수무책으로 당할수 밖에 없었다.


프러시아가 파리를 점령한 기간 중인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독일제국 선포식. 포디움의 왼쪽으로부터 프리드리히 황테자(후에 프리드리히 3세), 그의 아버지 빌헬름 1세 황제, 바덴의 프리드리히 1세. 1877년 안톤 폰 베르너 작. 빌헬름 1세가 독일제국의 황제로 명명된 것은 1870년 10월 10일 베를린에서의 북부 독일연맹 의회에서 독일제국의 헌법을 통과시키고부터였고 그것이 효력을 발생하기는 1871년 1월 1일부터였다.

                   

독일제국은 27(또는 26)개 국가로 구성되었다. 왕국이 4개, 대공이 통치하는 대공국이 6개, 공작이 통치하는 공국이 5개, 프린스가 통치하는 소공국이 7개, 자유-한자도시가 3개, 그리고 1개의 제국 직할 영토로 구성되었다. 프러시아 왕국도 따지고 보면 독일제국을 구성하는 왕국 중의 하나이지만 영토와 인구의 규모로 보아서는 전체의 3분의 2를 점유하고 있어서 주도국이 아닐수 없다. 독일의 국가들은 1850년 이후 급작스럽게 산업국가들이 되었다. 풍부한 석탄과 철광으로 공업화가 이루어졌다. 여기에 철도의 발달은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게 만들었다. 석탄과 철광이 풍부하다보니 화학공업도 발달하게 되었다. 독일국가들이 프러시아의 주도아래 통일을 이룩하던 1871년에 전체 인구는 4천 1백만이었다. 그러다가 산업화, 공업화로 인하여 인구의 증가가 이루어져서 1차 대전 직전까지에는 전체 인구가 6천 8백만으로 증가하였다. 독일은 프랑스처럼 비옥한 농토가 부족하였지만 산업화 이전에는 그래도 농촌이 국민생활의 중심지였다. 그러다가 산업화와 함께 도시화가 이루어져서 이제는 도시 중심의 국가가 되었다. 산업화, 도시화와 함께 학문의 발전도 이루어져서 과학기술의 발전은 눈부신 것이었다. 독일제국은 47년의 짧은 역사이지만 그 기간 동안에 산업, 과학, 기술의 거대국으로 발전하였다. 노벨상 수상자를 따져 보아도 알수 있다. 독일은 영국이나 프랑스 등 다른 나라들보다 월등히 많은 노벨 수상자를 배출하였다. 그리하여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독일은 유럽에서 영국을 제치고 경제대국이 되었다. 독일경제는 세계적으로도 미국 다음으로 강대국이 되었다. 


1884년의 비스마르크 주관하의 베를린 회의. 아프리카 식민지 문제 협의


그러한 때에 비스마르크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타났다. 독일제국의 재상(宰相: 수상)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1898)이었다. 비스마르크는 1871년에 초대 재상으로 임명되어 1890년까지 약 20년을 독일제국의 재상으로 활약했다. 사족이지만, 우리는 보통 비스마르크 라고 말하지만 그의 실제 이름은 오토 에두아르트 레오폴드이며 그의 호칭이 비스마르크의 공자(Fürstin von Bismarck: Prince of Bismarck)였다. 그를 오토 폰 비스마르크-쇤하우젠(von Bismarck-Schönhausen)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당시 작소니 안할트(Saxony-Anhalt)의 쇤하우젠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비스마르크는 독일제국의 초대 재상이 되기 전에 1867년부터 1871년까지 북부독일연맹 재상이었다. 비스마르크는 처음에는 자유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점차 보수적인 사상을 가졌다. 비스마르크의 임기 말기에 독일은 식민주의 정책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비스마르크의 이념과는 다른 것이었다.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가져서 착취한다는 것은 자유주의 이념에 어긋난다는 생각에서였다. 사실상 독일은 영국이나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이 다른 대륙에 대한 식민지 정책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에 오로지 경제발전으로 인한 자력갱생에만 신경을 썼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다른 나라들에게 뒤쳐진다고 생각해서 늦었지만 식민지화 대열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가장 손쉬운 대상이 아프리카였다. 그러나 독일제국 시대에는 아프리카라고 해도 그저 나머지 부스러기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아프리카에 대한 식민지 정책에 박차를 가하여 결국 아프리카에서 영국과 프랑스 다음으로 식민지를 많이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그때문인지 다른 열강들과 땅을 놓고 다툼이 종종 있었는데 특히 영국과의 다툼이 많았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


1888년 3월에 빌헬름 1세가 91세 생일을 며칠 앞두고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3세가 새로운 황제로 등극하였다. 프리드리히는 자유사상을 가진 사람이었고 영국헌법의 찬미자였다. 프리드리히의 영국과의 관계는 그가 빅토리아 여왕의 큰 딸인 빅토리아 공주와 결혼하므로서 더욱 공고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프리디르히가 새로운 황제가 되어서 바야흐로 독일에도 자유의 바람이 불어 닥칠 것으로 기대했다. 예를 들어서 제국의 정치 추진에 있어서 의회의 역할을 더욱 커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를 못했다. 프리드리히 3세는 6월에 강력한 보수주의자인 내무장관 로베르트 폰 푸트카머를 전격 갱질하였고 이것은 바스마르크 내각에 대한 일대 가격이 아닐수 없었다. 그런데 하늘도 무심하신지 어쩐지 하여튼 프리드리히는 황제의 자리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서 후두암이 발전하는 바람에 1888년 6월 15일에 숨을 거두었다. 황제가 된지 99일만이었다. 그의 아들인 빌헬름 2세가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


시간은 흘러서 독일제국은 철도망의 발전, 세계 최강의 군사력, 급성장하는 산업 기반을 바탕으로 강대국의 대열에 올라섰다. 독일제국은 발족한지 10여년 만에 영국 다음으로 가장 강력한 해군력을 자랑할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보니 자꾸 전쟁이 하고 싶어졌다. 비스마르크는 그러면 안된다고 만류했지만 빌헬름 2세 황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결국 비스마르크는 1890년에 빌헬름 2세에 의해 사임을 했고 독일제국은 이른바 호전적인 세계정치(Weltpolitik)를 지향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결국 1차 대전의 발발에도 기여하는 것이었다. 비스마르크는 열강 간의 힘의 균형을 복잡하고도 변화하는 외교로서 유지하였다. 비스마르크는 외교의 천재였다. 그러나 비스마르크 이후의 재상들은 그런 능력이 부족하였다. 그러다보니 독일제국은 외교적으로 고립되는 경우가 있었다. 더 어려웠던 것은 황제가 국민들의 의견과는 상관없는 결정을 내리는 일이 종종 있었던 것이다. 1879년에 독일제국은 오스트로-헝가리 제국과 2중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1882년에는 이탈리아와 3국 동맹을 맺었다. 그러는 한편 오토만 제국과도 강력한 외교적 유대를 유지하였다. 그러다가 1914년의 대위기가 도래하자 이탈리아는 동맹에서 떠났고 오토만 제국도 발을 뺐다.


1890년대-1900년대 초의 베를린 제국의회(라이히스라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되자 빌헬름 2세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프란츠 요제프 황제에게 만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를 침공한다면 전적으로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 사학자들은 빌헬름 2세의 이같은 제안을 '백지 수표'라고 불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세르비아 침공은 결과적으로 1차 대전을 촉발시킨 것이었고 그 배경에는 독일제국의 역할도 무시할수 없었다. 1차 대전이 일어나자 독일은 파리를 전격적으로 점령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하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서부전선의 전황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연합국의 해상봉쇄는 독일에게 심각한 식량난을 가중케 했다. 다행히 독일제국은 동부전선에서 성공적이었다. 독일의 동쪽으로는 방대한 영토를 점령할수 있었다. 독일은 대서양에서의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제한없는 잠수함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결과 1917년 초에 미국을 전쟁을 끌어들이게 되었다. 전쟁은 파울 폰 힌덴부르크 원수와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지휘력도 대세를 어떻게 할수가 없었다. 독일군은 1918년 봄부터 각 전선에서 퇴각하기 시작했다. 동맹국인 오스트로-헝가리 제국과 오토만 제국은 무너졌고 불가리아는 항복했다. 결국 독일제국은 1918년 11월의 봉기로 붕괴되었다. 제국은 황폐해 졌고 국민들은 사정은 어려워지기만 했다. 독일은 한동안의 혼란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히틀러에 의한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는 사태에까지 도달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패전국 독일에 대한 조치가 강구되었다. 그 이후의 사태는 이미 다른 본 블로그의 다른 항목에서 설명한바와 같다.


1914년의 총동원령으로 전선으로 향하는 병사들


독일제국을 구성한 왕국들과 공국들은 다음과 같다.


[왕국: Konigreiche: Kingdoms)

- 프러시아(Prussia: Preussen). 수도 베를린(Berlin)

- 바바리아(Bavaria: Bayern). 수도 뮌헨(Munchen: Munich)

- 작소니(Saxony: Sachsen). 수도 드레스덴(Dresden)

- 뷔르템버그(Wurttmberg). 수도 슈투트가르트(Stuttgart)


슈투트가르트


[대공국: Grossherzogtümer: Grand Duchies]

- 바덴(Baden). 수도 칼스루에(Kalsruhe)

- 헤세(Hesse: Hessen). 수도 다름슈타트(Darmstadt)

- 메클렌부르크 슈베린(Mecklenburg-Schwerin). 수도 슈베린(Schwerin)

- 메클렌부르크 슈트렐리츠(Mecklenburg-Strelitz). 수도 노이슈트렐리츠(Neustrelitz)

- 올덴부르크(Oldenburg). 수도 올덴부르크

- 작세 봐이마르 아이제나하(Saxe-Weimar-Eisnach: Sachsen-Weimar-Eisenach). 수도 봐이마르


봐이마르 구시가지


[공국: Herzogtümer: Duches]

- 안할트(Alhalt). 수도 데사우(Dessau)

- 브룬스비크(Brunnswick: Braunschweig). 수도 브라운슈봐이크(Braunschweig)

- 작세 알텐부르크(Saxe-Altenburg). 수도 알텐부르크(Altenburg)

- 작세 코부르크 및 고타(Saxe-Coburg and Gotha: Sachsen-Coburg und Gotha). 수도 코부르크(Coburg)

- 작세 마이닝겐(Saxe-Meiningen: Sachsen-Meiningen). 수도 마니닝겐(Meiningen)


마이닝겐 대성당


[소공국: Furstentümer: Principalities]

- 리페(Lippe). 수도 데트몰트(Detmold)

- 로이스 게라(Reuss-Gera: Junior Line). 수도 게라(Gera)

- 로이스 그라이츠(Reuss-Greiz: Elder Line). 수도 그라이츠(Greiz)

- 샤움부르크 리페(Schaumburg-Lippe). 수도 뷔케부르크(Bückeburg)

- 슈봐르츠부르크 루돌프슈타트(Schwarzburg-Rudolfstadt). 수도 루돌프슈타트(Rudolfstadt)

- 슈봐르츠부르크 존더스하우젠(Schwarzburg-Sondershausen). 수도 존더스하우젠(Sondershausen)

- 봘데크 및 피르몽트(Waldeck and Pyrmont: Waldeck und Pyrmont). 수도 아를로젠(Arlosen)


아를로젠 대공궁


[자유도시 및 한자 도시: Freie und Hansestadte: Free and Hanseatic Cities]

- 브레민(Bremen)

- 함부르크(Hamburg)

- 뤼베크(Lübeck)


뤼베크


[제국 직속 영토" Reichslander: Imperial Territories]

- 알자스-로렌(Alsace-Lorraine: Elsass-Lothringen). 수도 슈트라스부르크(Strassburg)


슈트라스부르크 구시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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