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따라, 추억 따라/서울

삼각산 진관사(津寬寺)

정준극 2010. 6. 8. 06:31

삼각산 진관사(津寬寺)

 

진관사 대웅전과 앞마당. 한 여름의 한적한 가람에 비구니 스님의 걸음만 바쁘다.

 

서울근교에는 4대 명찰로 알려진 사찰들이 있다. 서울을 중심으로 사방에 하나씩의 사찰을 회자한 것이다. 동쪽의 불암사, 서쪽의 진관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승가사라고 한다. 그중에서 진관사는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처로서 오랜 전통의 사찰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사모하는 유명사찰이다.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여 진관사로 가려면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연신내역에서 내려 2711번 버스를 타거나 구파발역에서 내려 7724번을 타면 절입구까지 간다. 진관사에는 귀중한 불교 문화재가 많다. 성보유물이다.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된 것만 해도 12종 36점에 이른다. 무심한 방문객으로서는 하나하나 접근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탱화와 같은 유물은 넌지시 감상할수 있어서 다행이다.

 

명부전의 삼존불과 그 뒤의 탱화

 

우선 진관사의 내력부터 살펴보자. 진관사는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고 국력을 수호한 고려 8대 현종이 1011년 당대의 고승 진관대사를 위해 창건한 사찰이다. 그러므로 2011년이면 1천세의 생일을 맞이하게 되는 고찰이다. 하기야 전국에는 신라시대로부터의 고찰들이 많기 때문에 진관사가 고참사찰로서의 명함을 내밀 형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력(寺歷) 1천년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수 없다. 진관사가 실은 신라시대에 설립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신라시대의 원효대사가 고려시대의 진관대사와 함께 진관사를 설립했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진관사는 무리없이 고찰의 명단에 들어갈수 있다. 하지만 신라의 원효대사와 고려의 진관대사가 합심하여 진관사를 지었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무리가 있어 보인다. 아무튼 진관사는 1천년이라는 유구한 역사를 견디면서 지내오다가 그놈의 김일성이가 일으킨 6.25전쟁 때에 폭격으로 거의 모든 건물들이 잿더미가 되는 불운을 겪었으며 근년에 이르러 대웅전 등을 복구하였고 아직도 일부 건물, 즉 독성전, 삼성각 등은 계속 완성코자 노력하고 있는 사찰이다.

 

대웅전과 석탑. 대웅전의 단청이 참으로 화려하다.

 

진관사는 북한산 기슭에 있다. 말이 삼각산진관사이지 실은 북한산 국립공원의 자락에 자리 잡고있다. 주소는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이다. 은평구에 있으므로 서울에서 진관사를 가려면 은평 뉴타운을 거쳐야 한다. 예전에는 숲이 꽤나 우거진 야산지대였으나 이를 모조리 밀어내고 아파트 군락이 들어선 것이 은평 뉴타운이다. 대단한 규모이지만 왜그런지 자연만 자꾸 훼손되는 것 같아서 걱정이다. 그리고 은평구청 공무원들의 부정부패가 생각나게 만드는 곳이다. 북한산 개발계획인지 무언지에 따라 진관사 초입부터 도로공사가 한창이다. 진관사 진입로가 대폭 정리되고 있는 것이다. 부르도자와 같은 중장비가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진관사 일대를 왕래하며 길을 닦고 다리를 놓고 있다. 2010년 6월 말이면 완성된다고 하는데 완성되면 공연히 수입자가용들만 뻔질나게 왕래할것 같아서 오히려 걱정이다.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식당들이 들어설 것인가? 그건 그렇고 이제 진관사에 얽힌 얘기에 대하여 일말이나마 알아보도록 하자.

 

공사중인 진관사 진입로. 2010년 5월 현재

  

전해 내려오는 연기설화(緣起說話)에 의하면 진관사에는 기막힌 내력이 있다. 이야기는 바야흐로 고려 제5대 경종(景宗: 975~981)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981년에 경종이 죽자 경종의 왕비인 헌애왕후(獻哀王后: 964~1029)는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올라 목종(穆宗)이 되었을 때 천추태후(千秋太后)가 되어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그런데 태후는 남편이 죽은 다음 잠시 김치양(金致陽)이라는 대단히 치근거리는 사람과 몰래 정을 통해 사생아를 낳았다. 사람의 욕심이란 한이 없어서 천추태후는 바로 그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고 하였다. 이런 정쟁 가운데 목종에게 아들이 없자 당국은 헌애왕후의 동생 헌정왕후(獻貞王后)와 태조(太祖)의 아들인 욱(郁, 安宗)의 사이에서 난 대량원군(大良院君) 순(詢)을 왕위 계승자로 봉한다.

 

진관사의 계곡. 여름철 비온 후에는 맑은 냇물이 철철

 

그러자 천추태후는 '기회는 이 때다'라면서 자신과 김치양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를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목종에게 참소하여 다음 왕위 계승자인 대량원군 순을 죽이려고 꾀한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대량원군을 다시 진관대사(津寬大師)가 혼자서 수도하는 삼각산(三角山)의 한 암자로 축출하였으니 그곳이 오늘날 진관사의 전신이다. 진관대사는 대량원군의 신변이 위험하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산문 밖에 망보는 사람을 배치하는가 하면 본존불을 안치한 수미단 밑에 땅굴을 파고 그 안에 12세인 대량원군을 피신시켜 자객으로부터 화를 면하게 하였다. 대량원군은 이곳에서 3년을 보냈다. 1009년 강조(康兆)가 군사를 일으켜 목종을 폐위하고 대량원군인 왕순을 왕위에 옹립하니 그가 고려 제8대 현종(顯宗)이다. 대량원군은 지옥에서 살아난 은덕에 대해 고개 숙여 감사하고 생명의 은인인 진관대사와 눈물로 작별하면서 자신이 거처하던 땅굴을 신혈(神穴)이라 하고 절 이름을 신혈사(神穴寺)로 바꾸기를 청했다.

 

일주문 지나서 나오는 초가의 보현다실. 은은한 다향이 감도는 듯.

 

그 후 현종은 진관대사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신혈사(神穴寺) 인근의 평탄한 터에 진관대사의 만년을 위해 크게 절을 세우게 하고, 진관대사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津寬寺)라 명하였고 주변의 마을 이름도 진관동이라 부르게 했다. 진관사의 창건 불사는 1011년 가을에 시작해 만 1년 동안 공사하여 1012년 가을에 준공을 보았다. 그러므로 2011년-2012년은 진관사 창설 1천주년을 기념하는 해가 된다. 아무튼 현종은 진관사에 최고의 정성을 모아 불사를 이룩하였다. 그리고 완공 그해 10월에 낙경법회(落慶法會)를 연 후 진관대사를 국사로까지 책봉하였다.

 

대웅전 뒤편의 장송. 진관사 경내에는 노송들이 많아 고찰임을 상징해주고 있다.

 

고려시대 이래로 역대 왕들의 왕래가 빈번했던 진관사는 조선시대에 수도를 서울로 옮기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수륙재(水陸齋)의 근본도량으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1397년(太祖 6) 정월에 태조는 내신 이득분(李得芬)과 조선(祖禪)스님에게 조상의 명복을 빌고 나라 일로 죽었으나 제사조차 받지 못하는 굶주린 영혼을 위해 수륙사(水陸社)를 설치할 것을 명한다. 이에 이득분 등은 바쁜 와중에서도 북한산과 도봉산을 답사한 결과 수륙재를 열기에 가장 적합 곳으로 진관사를 선정하게 된다. 수륙사 건립은 조선을 건국하면서 전쟁에서 죽어간 고려왕실의 영혼을 기리는 목적에서였으며, 내면적으로는불안정한 국민정서의 동요를 막고 조선왕실의 안정을 꾀할 목적도 겸하고 있었을 것이다.

 

칠성각에 보관되어 있는 태극기. 진관사는 2009년 5월 칠성각을 복원하기 위해 해체하였을 때 불단 안쪽 기둥 사이에서 백초월 스님이 3. 1 운동 당시에 사용하였던 태극기와 독립운동 사료들을 다수 발견하였다. 거의 90년동안 칠성각의 기둥 사이에 비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정부는 2010년 이 사료들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진관사 태극가는 2009년 가을에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특별 전시되어 많은 시민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태극기와 사료들의 발견으로 진관사가 경성지역 독립운동의 근거지 였다는 사실을 새롭게 확인하였다. 진관사는 백초월 스님의 항일 독립운동 정신을 기려서 기념관의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후 태조는 진관사에 수륙재(水陸齋)를 개설하도록 공사를 지시하고 절에도 행차하였으며, 1397년 9월 낙성식에도 참여하였다. 이에 고려시대 역대 왕들의 지원을 받던 진관사는 조선왕조의 국가적 수륙재(水陸齋)가 개설되는 사찰로서 다시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이후 불교를 배척하던 태종 역시 1413년(太宗 13)에 진관사에서 성녕대군(誠寧大君)을 위한 수륙재를 열고 향과 제교서(祭敎書)를 내렸으며 수륙재위전(水陸齋位田) 100 결을 하사하여 재를 계속하게 하였다. 따라서 진관사에서는 매년 1월 또는 2월 15일에 수륙재가 열려 조선왕실의 명실상부한 수륙도량으로서 인정받게 되었으며 국찰(國刹)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진관사는 오늘날에도 수륙도량으로서 명성을 얻고 있다. 수륙재라는 것은 물(바다, 호수, 강)과 뭍(산, 들, 골짜기, 언덕)에서 사정상 헤메고 다니는 외로운 영혼과 혼령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불법을 얘기해주고 음식을 마련해서 베풀어 주어 그들을 구제한다는 것을 말한다. 진관사에서는 매윤년 윤달에 수륙재를 크게 연다. 그래서 수륙도량이라는 호칭을 갖게 되었다.

 

칠성각과 독성전. 근자에 건축하여 목향이 그대로 배어 있다. 아직 단청을 입히지는 않아서 더욱 정갈스럽다.

 

세종 때에는 1421년(세종 3)에 태종 내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재를 올린 이후부터 왕실의 각종 재를 봉행하는 사찰로 국가에서 정례화시켰다. 그리고 세종은 1442년에 진관사에 집현전 학사들을 위한 독서당을세우고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등과 같은 선비들을 학업에 몰두하도록 하였다. 독서당 건립 후 진관사에서는학사들과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왕실과 사대부, 그리고 서민들까지 애용하는 전국민의 사찰로 확대되었다. 또 1452년(문종 2)에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이루어지는데, 1463년(세조 9)의 화재로 일부가람이 소실되어 피해를 입게 되었다. 그 후 1470년(성종 1)에 벽운(碧雲)스님이 다시 중건하고, 1854년(철종 5)과 1858년에 중수되었으며, 1879년(고종 16)에는 당두화상(堂頭和尙) 경운(慶雲)대선사가 큰방 34칸을 지어 국찰로서의 대가람을 형성하게 되었다.

 

나한전. 현판의 글씨는 누구의 글씨를 집자한 것 같은데 누굴까 생각하다가 삼성동 봉은사의 판전이라는 현판 글씨가 생각났다.

 

근대에는 1908년에 송암(松庵)선사가 경내에 오층석탑을 조성하였으며, 1910년에는 경운(慶雲 )선사에 의해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이루어졌다. 그는 대웅전 삼존상을 개금하고, 아울러 명부전의 지장보살상과 시왕상, 시왕탱화 등을 개금ㆍ보수하였다. 또한 독성전과 칠성각을 신축하고, 자신이 소유했던 토지를 사찰에 무상으로 돌려 '백련결사염불회' 의 자원으로 쓰게 함으로써 근대 진관사 중창주로서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근대기의 열성적인 노력으로 일신한 진관사는 1950년 6.25전쟁 때 나한전 등 3동만을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 이에 폐허만 있던 진관사는 1963년 현 회주인 비구니 최진관(崔眞觀)스님이 발원하여 건물을 차례로 재건함으로서 오늘에 이르게 된다.

 

나가원(那迦院)의 현판. 너무 잘 썼기 때문에 못 읽는 사람들이 많다. 그나저나 나가라는 뜻은 무얼까? 밖으로 나가라는 뜻은 아닐테고...찰나의 가람? 너무나 철학적이다.

 

진관(眞觀) 스님은 1965년에 현재의 대웅전을 신축하고, 1966년에 삼존불을 조성하였으며, 1967년에 후불탱(後佛幀) 및 신중탱(神衆幀) 을 조성하여 진관사 주법당(主法堂)을 여법(如法)하게 일신하였다. 또 1968년에는 명부전을 비롯하여 1969년에 지장보살과 시왕상을 조성하였으며, 1970년에는 일주문과 동별당을 신축하고, 1972년에 나가원(那迦院)을 신축, 1974년에 범종 조성, 1975년 동정각 신축 등 진관스님의 불사로 인하여 옛 가람의 자취를 찾는 여법한 사찰로 복원되었다.

 

진관사의 범종각은 동정각(動靜閣)이라고 부른다. 움직이는 중에도 고요한 누각이라는 뜻이렸다. 특이한 명칭이지만 멋있다.  

 

삼각산 진관사 일주문. 목하 진입로 확장 공사중(2010. 6 완성예정). 한글로 현판을 쓴 것도 특색이 있다.

 

삼각산 진관사 사적비. 사적비를 事蹟이라고 쓰지 않고 寺蹟이라고 써서 특이하다.   

진관사는 과연 북한산(삼각산)의 정기를 머금은듯 하다. 대웅전과 그 옆의 명부전. 그리고 약수

상당히 커다란 맷돌. 실제로 사용했던 것 같다. 지금은 전시용?

대웅전의 불화와 단청. 이 정도는 되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