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단공원 역사문화탐방
안개 걷힌 장충단공원의 밝은 모습 - 항일 기념비를 찾아서
장충단공원의 인공폭포와 생태하천
근자에 장충단공원이 1년 몇 개월의 공사 끝에 새 단장을 마치고 밝은 모습이 되었다. 얼마전 신문에서 장충단공원의 신장개업에 대한 기사를 읽고 미상불 한번 견학코자 하던중 마침 동국대에 갈 일이 있어서 갔다가 시간을 내어 나름대로 개인적인 장충단공원 역사문화탐방을 실시하였다. 역사문화탐방이라는 거창한 구호를 내건 것은 이곳이 실로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의미가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장충단공원 신규조성 사업은 서울시가 2009년 2월부터 시작하여 2010년 5월에 마무리한 것으로 총 50억원의 막대한 세금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전에 비하여 무엇이 달라졌는가? 가장 눈에 띠는 것은 관리사무소를 한옥으로 품위있게 지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관리사무소의 옆에는 그럴듯한 모습의 한옥 식당이 새로 생겼다. '다담에뜰' 식당이라고 했다. 무슨 뜻일까? 주로 전통차를 팔지만 산채비빔밥과 같은 메뉴도 들어 있는 식당이다. 관리사무실, 한식당, 화장실 등의 건물들이 남산한옥마을은 저리가라고 할 정도로 좋은 위치에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다. 아마 장충단공원 구내에서도 가장 명당일 것이다. 관리사무소의 뒤편에는 인공폭포가 시원한 물을 쏟아내고 있으며 앞에는 기화요초가 지천인 가운데 맑은 개천이 흐르고 있다. 말하자면 생태공원이다. 요즘은 휘딱하면 생태라는 말을 붙여서 환경조성을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야 예산집행이 쉬운 모양이다. 장충단공원 관리사무소에 근무하는 서울시 공무원들이야 말로 참으로 특과에 배당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이면 날마다 훌륭한 역사문화공원에서 여유작작 지낼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장충단공원은 서울의 다른 어느 공원에 비하여 역사적인 유래가 다수 담겨 있고 민족적인 기념물이 다대한 곳이어서 공부가 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항일역사!
새로 문을 연 다담에뜰 식당 겸 다원. 관리사무소 옆에 있다. 외국손님들을 모시고 와도 좋을 것 같다.
장충단이란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하여 공원은 조성되었는지를 알아보는 일은 인터넷에 잘 나와 있기 때문에 생략할 생각이었으나 기왕 신장개업의 장충단공원을 소개하는 김에 풍운의 한말역사에 대한 복습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서 만인의 애국의식을 새롭게 함도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들어서 몇자 부연한다. 간단히 말해서 장충단공원은 장충단이 있던 장소를 공원으로 만든 곳이다. 장충단은 한말의 을미사변 및 임오군란과 관계가 깊다. 혹자는 6.25 사변 때 조국을 위해 북한 인민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사람들의 영령을 추모하고 위로하기 위한 곳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아니다. 일본의 건달 들에 의해 나중에 명성황후라고 불리게 된 민비가 무참하게 목숨을 잃은 을미사변과 관계가 있으며 민초 군인들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반일본적 폭동인 임오군란과도 관계가 있다. 그리고 근자에는 항일운동과 관련된 기념물들을 주섬주섬 간직하게 되었다. 아무튼 어차피 시작한 장충단 설명인지라 조금 더 내용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장충단비. 비문은 순종이 황태자로 있을 때에 썼다고 한다. 뒤면의 비문은 육군대장 민영환이 썼다고 한다. 장충단비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1호이다. 원래 장충단비는 남소영 자리에 세웠다가 일제가 한일합방 이후 철거한 것을 해방된 후인 1945년 신라호텔 자리로 옮겨 설치했으며 신라호텔이 들어서자 1969년 현 위치로 옮겼다.
1895년 10월 8일,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 梧樓)가 주동이 된 일단의 일본 낭인들이 경복궁 안의 건청궁을 습격하여 우리의 국모인 민비를 무참하게 살해하고 시신은 뒷 동산(녹산)에서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세계 역사에 유례가 없는 일본 깡패집단의 외국 국모살해사건이었다. 이것이 우리 민족에게 말할수 없는 치욕인 을미사변이었다. 그나마 이때에 일본 깡패(낭인)들을 저지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 있었다. 훈련대(시위대) 연대장인 홍계훈, 궁내부 대신 이경직 등이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900년, 고종황제는 그때 순사(殉死)한 홍계훈, 이경직 등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옛날 남소영(南小營) 자리에 사당을 세우고 그 자리를 장충단이라고 불렀다. 남소영은 남영에 속한 작은 군영을 말한다. 남영은 영조 시대에 서울의 남쪽을 방어하기 위해 세운 군영을 말한다. 남영동이라는 말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는 물어보나 마나이다. 장충단을 조성함에 즈음하여 을미사변도 을미사변이지만 그보다 3년전인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 때에 세상을 떠난 영의정 이최응 및 조선 병졸들의 혼령도 함께 위로하기로 했다. 결국 모두 일본이 저지를 사건으로 희생된 무고한 백성들이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잠시 한마디! 민비를 명성황후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민비가 세상을 떠난지 2년 후인 1897년부터이다. 고종은 1897년에 심기일전하여 국호를 대한제국이라고 고치고 본인은 황제가 되었으며 세상을 떠난 민비에게는 명성황후라는 호칭을 주었다. 하지만 민비가 비록 대한제국 이전의 인물이지만 경과조치에 의해 명성황후라고 부르는 것도 문제가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대한제국은 1907년, 나라를 잃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것이 원래 청계천에 있었던 수표교이다. 진작에 이곳으로 옮겨와서 장충단공원을 장식하고 있다. 수표교는 은행에서 발행하는 수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비가 얼마나 왔는지를 체크하는 기둥이기에 수표라는 이름이 붙었을 뿐이다.
사당건립 후 매년 이곳에서 봄ㆍ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하지만 10년도 가지 못했다. 장충단에서 제사를 지내는 일은 일제강점 이후인 1910년부터 폐지되었다. 이어 일제는 1920년대 후반에 이곳 일대를 '장충단공원'이라고 개칭하고 벚꽃을 많이 심어 공원으로 만들었다. 하기야 사변후 한동안 장충단공원은 별로 갈곳도 없고 할일도 없었던 서울시민들이 봄철에 벚꽃을 구경하러 몰려왔던 대표적인 장소였다. 그만큼 장충단공원의 벚꽃은 창경원 다음으로 유명했다. 한편, 일제는 이곳에 상해사변 때 일본군 결사대로 억지로 참가하여 전사한 한국인 육탄삼용사(肉彈三勇士)의 동상과 안중근 의사에 의해 살해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혼령을 달래기 위한 박문사(博文寺)를 세웠다. 물론 광복 후 육탄삼용사 동상과 박문사는 철거되었다. 그리고 6·25전쟁으로 장충단의 사당과 부속건물이 파괴되었지만 부서지지 않는 장충단비만은 남게 되었다. 장충단비의 글씨는 순종이 썼다고 하는데 확실치는 않다.
이준열사 기념비. 이 양반은 키가 조금 작으셨던 모양이다.
장충단공원의 유래에 대하여는 이만큼 설명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되므로 이제는 주변 탐방을 시작하도록 한다. 역사문화탐방이다. 장충단공원에는 이준 열사 기념상, 유관순 열사 기념상, 이한응 기념비,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그리고 외솔 최현배 선생 기념비가 있다. 또한 동국대학교 쪽 높은 곳에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싸운 사명대사의 기념상이 있다. 아무튼 일본과 관련이 있는 기념물들이 집합되어 있는 귀중한 곳이다. 하기야 일제는 을미사변 및 임오군란의 희생자들을 위로하기 위한 사당에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사를 세워 우리나라의 기를 죽이려고 했으니 우리가 박문사를 거두고 항일열사들의 기념상과 기념비들을 둔 것은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동국대 후문 쪽으로 들어가는 길의 산속에 외솔 최현배 선생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는 것은 몰랐던 일이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볼수 있으며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유관순 기념상은 국립극장 쪽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다. 천상 걸어서밖에 찾아가기 힘든 곳이었다. 그럴바에는 사람들이 쉽게 접할수 있는 시청앞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관순 기념상. 류관순 상이라고 적혀 있다.
장충단공원에 대한 소개는 지면상 이쯤 마치기로 하고 한가지만 덧 붙이자면 신광장로교회의 봉사활동이다. 공원의 한쪽에 '무료급식'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어서 들어가 보았더니 신광교회 교인들이 잔치국수를 만들어서 주로 노인들에게 제공하고 있었다. 신광교회는 인근 앰버싸도르 호텔 뒤편에 있는 교회이다. 별로 크다고 생각되는 교회는 아닌데 장충단공원의 일각에 자리 잡고 5월부터 10월까지 매주 한번 수요일에 아무에게나 시장한 사람들에게 점심을 무료로 재공하고 있다. 열심으로 봉사하는 교인들의 모습이 모두 훌륭하게 보였다. 그리고 잔치국수가 의외로 맛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삼성동 봉은사에서 제공하는 잔치국수보다 더 맛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충단공원이라고 하면 아직도 배호의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이라는 노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때 유행했던 노래였다. 예전에는 마땅히 놀러 갈 데가 없었던 서울시민들이 그나마 장충단공원에 와서 더운 여름을 나무그늘에 의지한채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 보따리를 든 술파는 아줌마 부대가 곳곳에서 출몰하여 선의로 야유(野遊)하고 있는 시민들의 정신건강을 위협하곤 했다. 다행하게도 그런 기색은 벌써 오래전부터 보이지 않게 되었다. 대신 집에 있자니 눈치보이고 답답하기만 한 노인들이 나와서 종일 시간을 보내는 장소가 되었으며 간혹 노숙자들이 이곳저곳에서 아예 신발을 벗고 드러누워 낮잠을 즐기는 장소가 되었다. 장충단공원을 가는 길은 지하철 3호선 동국대역에서 내리면 된다.
인근 신광교회가 봉사하는 사랑의 무료 급식 장소. 나무그늘에 벤치를 마련해 놓아서 앉아서 식사를 한다. 필자도 백수인지라 무료급식에 참여하였다. 잔치국수의 맛이 아주 관찮았다.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한국유립독립운동파리장서협회가 세웠다. 영어로는 Monument of Korean Confucian Scholars' Independent Movement by Long Letter to Paris 이다. 파리는 프랑스의 파리이며 장서는 긴 편지라는 뜻이다. 1919년 3.1 운동이후 한국의 유립은 한국독립을 간절히 호소하는 장문의 서한을 작성하여 파리에서 열리고 있는 만국강화회의에 제출하였다. 비록 커다란 성과는 거두지 못했지만 이 서한으로 인하여 일제의 불법적인 한국강점과 한국민의 독립열망을 세계에 알릴수 있었다.
한글학자이며 항일독립운동가였던 외솔 최현배선생 기념비
순국열사 이한흥선생 기념비. 이한흥(1874-1905)선생은 외교관으로서 런던주재 공사관의 대리공사를 지내던중 영국이 한국의 호소는 무시한채 일본의 편만 들어주자 이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자결하였다. 고종황제는 그의 시신을 런던으로부터 가져와 용인에 봉안하고 장충단에서 조재를 지내도록 했다.
사명대사 기념상. 사실상 동국대학교 경내에 있다. 하단에는 승병들이 왜군과 싸우는 장면이 조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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