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오페라 작곡가 일화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룩의 일화

정준극 2010. 8. 10. 10:06

글룩의 아네크도트(Anecdotes)

 

헨델의 요리사보다 못한 글룩

글룩은 얼마나 위대한 작곡가였을까? 대단히 위대한 작곡가라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이다. 옥스포드 오페라사전은 글룩을 '제2의 오페라 설립자'라고 말하였다. 어느때 누가 헨델에게 '선생님도 글룩이 그처럼 위대한 작곡가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어보았다. 헨델은 '글룩은 우리집 요리사보다 대위법을 더 잘 알지 못하지요'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헨델은 글룩의 새로운 오페라를 구경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글룩은 헨델보다 무려 32년을 더 살았다. 그러면서 개혁오페라를 내놓았다.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룩. 1775년. 비엔나미술사박물관 소장

 

커피하우스의 비평

글룩이 그의 개혁오페라를 비엔나의 무대에 올리게 되었을 때 당시 비엔나의 관중들은 '개혁'이라는 말을 '지루함'일뿐이라고 해석하였다. 1767년 글룩의 알체스테(Alceste)가 비엔나에서 초연될 때 일부 평론가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커피하우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극장은 9일동안 문을 닫고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10일 째에는 D-P(De Profundis)로 다시 문을 열었다.' * De Profundis는 '구렁텅이'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려는 절규'를 의미한다. 시편 130편을 인용한 것으로 D-P로 시작되는 구절을 말한다. 글룩은 당시의 오페라들이 침체되었고 쇠퇴하여 가고 있다고 보았다. 글룩은 오페라에 열정을 불어넣어 주었고 혼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것이 개혁이었다.


'알체스테'의 무대

 

글룩의 베이스

프랑스어를 말하는 성악가들은 습관적으로 노래를 부를때 콧소리(비음)를 내는 경향이 있다. 그중에서도 앙리 라리베(Henri Larrivee)의 비음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글룩은 두 편의 이피게니(Iphigenie)를 작곡하면서 중요한 베이스 아리아를 만들어 넣었다. 어떤 수다장이가 앙리 라리베의 이피게니에 나오는 베이스 아리아를 듣고 '어쩜 저렇게 코만 가지고도 노래를 부를수 있을까?'라고 감탄하듯 말했다.

 

글룩과 발레 마스터

프랑스에서 오페라를 공연할 때에는 발레가 빠질수 없다. 프랑스에서 발레 무용수들의 자만심은 상대적으로 컸다. 글룩이 새로운 프랑스어 버전의 오르페오를 공연코자 했을 때 발레 마스터인 게탕 베스트리(Gaetan Vestries)의 콧대는 높을대로 높아 있었다. 베스트리는 자기 자신을 '발레의 신(神)'이라면서 스타일을 부렸다. 글룩은 그에게 '만일 당신이 신이라면 내 오페라에서는 춤을 추지 말고 제발 천국에 가서 춤을 추시요.'라고 알아 들으라는 듯 말했다. 얼마후 베스트리는 글룩에게 샤콘느 무곡을 작곡하여 오르페오에 넣어 달라고 요청했다. 베스트리는 샤콘느를 우아하게 춘 후에 아라베스크와 플리에(Plies)로서 마지막을 멋있게 장식하여 대단한 커튼콜을 받으려는 속셈이었다. 글룩은 그의 요청이 가소로워서 거절하면서 '우린 고대 그리스 시대에 대한 오페라를 공연하는 것이요. 그때의 사람들이 샤콘느가 무언지 알기나 하겠소'라고 말했다. 베스트리는 '정말이요? 말도 안돼요. 샤콘트도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 참 불쌍한 사람들이네'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갈등속의 고요함

오페라에서 음악은 장면에 따라 격앙될수도 있고 마치 잔잔한 바다처럼 적막할수도 있다. 글룩의 오페라 '토리드의 이피제니'(Iphigenie en Tauride)를 리허설하는 중에 일어난 일이다. 오케스트라는 오리에테스의 장면에서 신들이 노도가 몰려오는 듯한 해안에 당도하는 장면에서 노도풍랑을 표현하기 위해 격렬하게 연주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 후에 오리에테스가 '나의 마음은 다시 정막함을 찾아노라'라고 독백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장면에서는 비올라 솔로가 나온다. 단원들은 비올라가 그지없는 정막함을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쉬고 있었다. 그런데 비올라 파트의 악보가 잘못되었는지 비올라 연주자는 마치 분노를 표출하는 듯 연주하였다. 단원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서 손을 놓고 있었다. 글룩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악보가 잘못된 것은 없어요. 생각해보세요. 오리에테스는 자기 어머니를 죽인 사람입니다. 자기의 마음이 다시 정막함을 찾았다고 독백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파트에서의 음악은 격렬해야 합니다'라고 설명하면서 단원들에게 어서 연주를 계속하라고 독촉하였다.


'터리드의 이피제니'. 메트로폴리탄.

 

글룩과 피치니

파리에서 글룩과 피치니의 전쟁은 오페라의 역사에서 잊지 못하는 사건이었다. 두 사람은 '터리드의 이피게니'를 놓고 각각 작곡하여 어떤 작품이 더 훌륭한지를 가리기로 했다. 글룩과 피치니는 서로 원수를 질 일도 없고 라이발로 삼을 일도 없었다. 실제로 두 사람은 친밀한 사이였다. '글룩-피치니 전쟁'은 두 사람의 추종자들이 공연히 벌인 소동이었다. 어느날 저녁, 글룩과 피치니는 마침 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다. 글룩은 피치니에게 와인을 권하면서 '여보게 피치니, 프랑스 사람들은 말야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사람들이야. 간단히 말해서 웃기는 사람들이지. 이 사람들은 노래를 작곡해 달라고 원하면서도 노래를 어떻게 부를지 모르는 사람들이야. 여보게, 피치니! 나는 비엔나로 돌아갈 생각이지만 당신은 파리에 남아서 이들과 함께 생활할 것으로 알고 있네. 이 사람들에게 좋은 음악을 주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저 돈이나 벌게. 그게 최상일세!'라고 자문해 주었다.

 

얼마후 글룩은 파리에서 '에코와 나르시스'(Echo et Narcisse)를 발표하였으나 대실패로 돌아갔다. 글룩은 곧바로 비엔나로 돌아갔다. 피치니는 계속 파리에 머물러 있었다. 돈도 벌었다. 하지만 프랑스혁명의 와중에서 그나마의 재산을 모두 잃었다. 피치니는 가까스로 나폴리로 돌아왔다. 어느날 피치니는 카롤리네 왕비의 모임에 참석하였다. 카롤리네 왕비는 프랑스의 루이16세의 왕비였던 마리 앙뚜아네트의 언니였다. 카롤리네는 파리에서 오래 지냈던 피치니에게 '어때요, 나도 내 동생을 많이 닮았지요?'라고 물어보었다. 자기도 마리 앙뚜아네트 만큼 아름답지 않느냐는 질문이었다. 피치니는 대단히 외교적인 인물이었다. '아무렴요 왕비마마, 혈통이 있는데 그걸 무시 할수는 없지요. 하지만 왕비마마는 동생분과 닮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유럽에서 합스부르크가문의 여인들이 못생겼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에 있는 글룩의 묘소. 하단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Hier ruht ein rechtschaffener deutscher Mann, ein eifriger Christ, ein treuer Gatte. Christoph Ritter Gluck. Der erhabenen Tonkunst grosser Meister. Er starb am 15.Nov.1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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