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오페라 작곡가 일화

리하르트 바그너

정준극 2010. 8. 11. 16:50

리하르트 바그너에 대한 일화

Richard Wagner

 

리하르트 바그너

 

처음이자 마지막 연극 출연

바그너의 계부(생부인지도 모름)인 루드비히 가이어(Ludwig Geyer)는 연극배우들의 매니저 겸 극단장이었다. 루드비히 가이어는 어린 리하르트 바그너에게 연극에 대한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 연극무대에 출연토록 했다. 바그너가 네살 때였다. 맡은 역은 쉴러의 '빌헬름 텔'에서 텔의 막내 아들이었다. 무대에서 바그너가 맡은 대사는 '엄마하고 같이 있을거예요'라는 짧은 한마디 뿐이었다. 텔이 집을 떠나면서 두 아들과 부인과 작별하는 장면에 나오는 대사였다. 이 한마디를 위해 바그너는 집에서 무던히도 연습했다. 텔의 큰 아들 역할은 바그너의 누나인 클라라였다. 작별의 장면에서 바그너가 보니까 누나 클라라가 무대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바그너는 당연히 말해야 했던 대사는 말하지 않고 아무런 생각도 없이 '누나야 같이 가자'고 소리치면서 쫓아나갔다. 이후 바그너의 아버지는 바그너를 다시는 연극무대에 세우지 않았다.

 

메트로폴리탄의 '윌리엄 텔'. 아들의 이름은 예미(Jemmy)이다.


은전 한닢의 소절

바그너의 리엔치(Rienzi)가 드레스덴에서의 초연을 위해 연습에 들어갔을 때 바그너와 첫 부인인 민나는 돈이 없어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존심이 있어서 내색은 하지 않았다. 리엔치에서 타이틀 롤을 맡은 요셉 티하체크(Joseph Tichatschek)는 3막에 나오는 아리아인 Jungfrauen weinet, thir Weiber klaget라는 아리아를 부른 후에 자기 자신이 너무나 감동하여서 은전 한닢(Silver Groschen)을 내놓고 기념으로 통에  넣어 두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훌륭한 아리아를 들은 사람들은 누구든지 기념으로 은전 한닢 씩을 기부하도록 합시다'라고 제안하였다. 그로부터 3막의 그 소절이 나오면 사람들은 의례적으로 지갑에서 은전 한 닢 씩을 내놓았으며 그 소절을 '은전 한 닢의 소절'이라고 불렀다. 아드리아노 역을 맡은 소프라노 빌헬미네 슈뢰더-드브리앙은 지갑을 찾아 여는데 시간이 걸렸다. 빌헬미네는 '이거야 원, 이 아리아만 나오면 은전 한 닢 씩을 내놓아야 하니 이러다가는 파산하겠네'라며 불평을 털어 놓았다. 이후 은전 한 닢씩을 기부하는 관례는 사라졌다. 사람들은 그후 모아 놓은 은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잊어버렸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바그너가 그 돈을 가져다가 생활비에 보태 썼다고 한다. 리엔치의 아리아가 바그너와 민나 부부의 빵을 해결해 준 셈이었다.


'리엔치'의 한 장면. 현대적 연출. 프랑스 툴루스의 테아트르 뒤 캬피톨(Theatre du Capitole)

 

작소니의 대통령?

1848년 드레스덴의 반란 이후 바그너는 정치적 이유로 스위스로 망명을 떠났다. 얼마후 저널리스트인 헨리 콜리(Henry Chorley)가 드레스덴을 방문하여 바그너 추종자들에게 일부러 들으라는 듯 '바그너같은 배신자는 없을 것이다. 작소니의 루드비히 왕은 그에게 궁정음악감독의 자리를 주었고 리엔치의 초연까지도 궁정극장에서 공연하도록 지원해 주었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국왕에게 반기를 들다니 말이나 되는가?'라고 비난하였다. 그러자 어떤 바그너 추종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무슨 소리입니까? 바그너는 국왕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아마 공화국 대통령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누가 피아노의 거장인가?

바그너는 피아노를 잘 치지 못하였다. 사람들이 그런 바그너를 놀리면 바그너는 이렇게 대꾸하였다. '그래도 나는 베를리오즈보다는 잘 칩니다'. 베를리오즈는 피아노를 전혀 치지 못했다.

 

볼로냐에서의 리엔치

바그너의 작품을 처음으로 받아 들인 이탈리아의 도시는 볼로냐였다. 볼로냐에서 리엔치가 공연되었을 때 바그너도 참석하였다. 휴게시간에 볼로냐의 시장이 바그나의 좌석으로 찾아와서 인사를 하며 '죄송합니다마는 급한 용무가 있어서 지금 좀 떠나야 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바그너는 '시장님은 참 행운아입니다. 저는 5막이 끝날 때까지 이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바그너와 에른스트 폰 슈흐

바그너는 에른스트 폰 슈흐(Ernst von Schuch)가 드레스덴에서 '리엔치'를 지휘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내 발을 옥죄지 않는 유일한 신발'이라고 말했다. 바바리아 지방 사투리로 신발은 슈흐였다.

 

또 다른 리엔치 스토리

1872년에 비엔나궁정오페라(현재의 슈타츠오퍼)는 '리엔치'를 무대에 올리기로 했다. 비엔나궁정오페라의 총지배인인 요한 폰 허베크가 직접 지휘를 맡았다. 그는 '리엔치'의 공연을 위해 예산을 아끼지 않고 웅대한 무대를 준비했다. 드디어 공연의 날이 되었다. 마침 바그너도 비엔나에 있었기 때문에 궁정오페라의 공연에 참석하였다. 1막이 끝나자 요한 폰 허베크는 일부러 바그너의 좌석을 찾아와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어보았다. 실은 자기의 공적과 재능에 대하여 칭찬을 받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바그너는 폰 허베크에게 '리엔치의 역할을 맡은 저 친구 말입니다. 내가 어째서 저 친구를 내 가방을 들고 다니는 시종으로 채용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네요'라고 말했다. '아무리 무대장치가 좋으면 무엇하느냐, 성악가의 실력이 형편없는데'라는 뜻이었다.

 

바그너와 로시니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보고 있던 바그너는 옆에 있는 친구에게 귀속말로 '정말로 로시니의 음악은 대단해! 내가 얼마나 로시니를 사랑하는지는 아무도 모를꺼야. 그런데 내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얘기를 절대로 하지 말아주게!'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 알면 나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테니까'라고 덧붙였다.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한 장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아버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아버지인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뮌헨궁정오케스트라의 혼 주자였다. 그는 모차르트를 대단히 존경했지만 바그너는 정말로 싫어하였다. 뮌헨궁정오케스트라는 바그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조의를 표하였지만 프란츠 슈트라우스만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만 보아도 알수 있는 일이었다. 그 전에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바이로이트축제극장에서 제발 자기들의 오케스트라에 합류하여 달라고 간청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뮌헨에서 바그너의 작품을 연주할 때는 혼주자로서 열심히 연주했다. 바그너가 슈트라우스에게 '선생은 어째서 바이로이트에서는 연주를 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뮌헨에서는 하십니까?'라고 물었더나 '나는 공무원이올시다. 그러므로 바그너를 연주하지 않을수 없지요'라고 대답했다.

 

누가 감히 '파르지팔'에서 브라보를 외쳤는가

파르지팔은 하나의 성스러운 예술이었다. 마치 교회에서 공연하는 것처럼 너무나 성스럽기 때문에 중간에 박수를 치지 않는 것이 관례로 되었다. 바이로이트에서 다시 파르지팔을 공연할 때였다. 플라워 메이든들의 노래가 끝나자 어떤 사람이 그 노래에 너무나 감동하여서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브라보'를 외쳤다. 극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브라보를 외친 그 사람을 쳐다보며 못마땅한 눈길을 보냈지만 더 이상 핀잔은 주지 않았다. 그 사람은 다름아닌 바그너 자신이었다.


'파르지팔'의 한 장면. 현대적 연출. 꽃처녀들과 함께 있는 파르지팔

 

용서가 아니라 이해를

바그너는 못된 짓만 골라하는 악동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사람들은 그의 천재적인 재능을 사랑하여서 그저 잘못을 저질러도 관용으로서 용서를 하는 경향이었다. 그중에서도 한스 폰 뷜로브는 용서의 대명사였다. 한스 폰 뷜로브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역사적인 초연을 지휘한 사람이다. 그는 당대의 피아니스트인 프란츠 리스트의 딸 코지마와 결혼하였다. 두 딸까지 두었다. 그는 코지마의 놀라운 지성과 뛰어난 감성을 존경하였다. 그런 코지마인데 어느 순간부터 바그너의 연인이 되어 얼마후에는 바그너의 아이까지 갖게 되었다. 그런데도 사람 좋은 폰 뷜로브는 코지마에 대해서는 물론, 바그너에게도 한마디 하지 않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를 너무나 존경하였기 때문이었다. 폰 뷜로브는 코지마가 바그너와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을 운명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바그너의 예술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라고 믿었다. 마침내 폰 뷜로브는 코지마에게 '세상의 모든 비난이 있더라도 나는 당신을 용서하오'라고 말했다. 코지마는 울면서 '용서를 하면 안됩니다. 이해를 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파르지팔과 그레텔

'파르지팔'의 초연을 준비하고 있던 바그너는 성배의 장면에서 무대 장치를 다음 장면으로 전환하는데 너무나 시간이 부족한 것을 깨달았다. 음악은 이미 성배의 전당을 묘사하고 있는데 무대 장치는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그너는 장면의 순조로운 전환을 위해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이를 위해 약간의 음악을 더 붙이기로 했다. 그러면서 엥겔버트 훔퍼딩크에게 '도대체 누가 내 음악이 너무 길다고 말하는지 모르겠네. 보게나, 너무 짧이서 덧붙여야 하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나중에 '헨젤과 그레텔'을 작곡한 훔퍼딩크는 당시 학생으로서 바이로이트 극장에서 알바를 하고 있었다. 훔퍼딩크는 자기가 추가음악을 만들어보겠다고 나섰다. 훔퍼딩크를 기특하게 생각하고 있던 바그너가 그 제안을 수락했다. 그리하여 역사적인 '파르지팔'의 초연에서 성배의 장면으로 전환될 때에는 어쨋든 훔퍼딩크의 음악도 한 몫을 했다. 그러나 나중에 '파르지팔'의 스코어가 출판되었을 때에는 훔퍼딩크가 작곡한 추가부분이 삭제되어 있었다. 그리고 무대장치의 기계화가 이루어지자 당연히 장면의 변환이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그로부터 훔퍼딩크의 추가 음악은 연주되지 않았다.


훔퍼딩크의 '헨젤과 그레텔'의 한 장면

 

마지막 작품

'파르지팔'의 출현은 바그너 열성팬들이 오랜만에 맛보는 대단히 고무적이고 감동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너무나 열광하고 감동했기에 탈진상태에 빠지게 만든 것이기도 했다. 바그너로서도 '파르지팔'을 완성함으로서 기력이 쇠약해진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당대의 평론가인 에두아르드 한슬리크는 가장 결정적인 바그너 음악의 반대론자였으나 '파르지팔'을 보고나서는 깊은 감동을 받아 태도가 바꾸었다. 어느날 한슬리크는 비엔나의 임프레사리오(오페라 흥행가) 겸 테너인 안젤로 노이만, 피아노제작자인 아우구스트 회르스터와 함께 저녁을 먹게 되었다. 회르스터가 만든 피아노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도 회르스터 피아노를 가지고 있었으며 푸치니는 대부분 오페라를 회르스터 피아노로 작곡했다. 그건 그렇고, 식사 도중에 자연히 '파르지팔'에 대한 얘기가 나오게 되었다. 갑자기 회르스터가 '바그너는 아마 오래 살지 못할꺼야'라고 말했다. 너무나 충격적인 얘기여서 모두들 말문을 잃고 있었다. 잠시동안의 정적을 깨트리고 노이만이 놀란듯이 '아니,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시오?'라고 물었다. 회르스터는 '파르지팔과 같은 놀라운 작품을 완성한 사람은 하늘에서도 그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지. 그래서 바그너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할수 있는 활동도 끝났다고 말한 것이야'라고 대답했다. 과연, 바그너는 몇 달 후에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 오페라 작곡가 일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쥘르 마스네  (0) 2010.08.12
주세페 베르디  (0) 2010.08.11
자코모 마이에르베르  (0) 2010.08.11
조아키노 로시니  (0) 2010.08.11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0) 2010.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