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오페라 작곡가 일화

주세페 베르디

정준극 2010. 8. 11. 21:21

주세페 베르디에 대한 일화

Giuseppe Verdi

 

성미켈레 성당의 종

운명의 힘이 예술의 역사에 있어서 무시못할 역할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1814년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인 론콜레(Le Roncole)는 프랑스군을 몰아내려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다. 마을 사람들중 미처 계곡으로 도망가지 못한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은 마을에 있는 산 미켈레 아르칸젤로 성당(Chiesa di S. Michele Arcangelo)에 몸을 숨겼다. 얼마후 마을에 진격한 오스트리아-러시아군은 성당에 들어와 그곳에 숨어 있던 마을 사람들을 어린이나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살육하였다. 다만, 종탑에 올라가서 숨어 있었던 어떤 어머니와 남자아이는 요행히 발각되지 않아 죽음을 면했다. 바로 베르디와 베르디의 어머니였다. 만일 그때 베르디가 군인들에게 잡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저 훌륭한 오페라 '운명의 힘'을 들을수 없었을 것이다.

 

론콜레의 산 미켈레 아르칸젤로 성당(Chiesa di S. Michele Arcangelo). 어린 베르디가 구사일행으로 살아남은 곳이다.

 

평론가와의 대화

어떤 유명한 평론가가 베르디가 새로운 오페라를 작곡하고 있다고 하니까 어떤 것인지를 알기 위해 방문하였다. 베르디는 '일 트로바토레'를 거의 완성한 단계였다. 베르디는 평론가에게 피아노로 '대장간의 합창'(Anvil Chorus)을 들려주면서 어떠냐고 물어보았다. '쓰레기 같다'는 대답이었다. 그러면서 자기는 가장 좋은 음악만을 듣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베드리는 다시 미제레레(Miserere)를 들려주었다. '보잘것 없다'는 것이 코멘트였다. 그러면서 자기는 가장 심오한 예술만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베르디는 '그러면 마지막으로 이걸 들어보세요'라고 말하면서 테너 아리아인 '디 켈라 피라'(Di quella pira)를 연주하였다. '유치하고 저속하다'는 대답이었다. 그러면서 자기는 고상하지 않은 음악을 들으면 몸이 떨릴 지경이라고 덧붙였다. 그러자 베르디는 피아노에서 일어나 평론가에게 다가가서 마치 감사하다는 듯 포옹을 하였다. 평론가는 어리둥절하여 '아니, 이게 무슨 일이십니까?'라고 물었다. 베르디는 '존경하는 친구여, 나는 대중적인 오페라를 작곡하고 있었지요. 일반대중을 위한 오페라입니다. 지나치게 순수하고 고전적이며 엄숙하게 비평만 하는 그대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 작곡한 것은 아닙니다. 그대가 '일 트로바토에'의 음악들을 좋아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대가 싫어한다면 이 오페라는 성공할 것입니다. 앞으로 석달 안에 '일 트로바토레'의 멜로디는 온 이탈리아에서 불러지게 될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과연 그랬다.  

 

'일 트로바토레'의 한 장면. 메트로폴리탄.

 

'아이다'를 싫어한 사람의 이야기

프로세페로 베르타니라는 청년이 베르디의 '아이다'를 보기 위해 레지오(Reggio)에서 파르마(Parma)까지 갔었지만 '아이다'에 대하여 감동을 받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사람들이 '아이다'에 대하여 찬사를 퍼붓는 얘기를 듣고 자기의 인내심이 부족했다고 생각하여 며칠후 다시 한번 '아이다'를 보러 파르마로 갔다. 그러나 그는 또 다시 '아이다'에 대하여 약간의 실망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아이다'가 단순히 공허한 스펙타클일뿐이므로 얼마후면 일반대중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베르타니라는 사람은 집에서 생활비를 타서 쓰고 있는 형편이었다. 두번이나 '아이다'를 보러 갔기 때문에 생활비가 빠듯하게 되어서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걱정이 생겼다. 그는 베르디 선생에게 경비를 청구하면 보내주실 것으로 믿었다. 결국 베르디 선생 때문에 생활비를 축내지 않았던가? 베르타니는 베르디에게 경비를 보상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공평한 처사라고 믿었다.

 

베르디에게 온 청구서의 내역은 다음과 같았다.

기차요금      5.90 리라

극장입장권   8 리라

기차역에서 먹은 맛없는 저녁값 2 리라

이상 합계 15.90 리라이며 반복되었으므로 15.90 리라 x 2회 = 31.80 리라

 

베르디는 출판사에게 지시하여 베르타니라는 청년에게 청구서 내용대로 돈을 보내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한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이후로는 베르디의 어떠한 오페라도 관람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앞으로 오페라의 초연이 많을 텐데 그럴 때마다 엔조이 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경비를 청구하면 곤란하다는 생각에서였다.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베르디는 다른 경비는 모두 지불해 주되 기차역에서 사먹은 저녁 값만은 주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집에 가서 먹을수 있는데 왜 사먹었느냐는 이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아이다'의 환상적인 개선의 장면

                                 

베르디의 거절

1898년, 1년 동안 문을 닫았던 라 스칼라가 다시 문을 열었다. 책임자들도 새로 임명되었다. 극장장은 줄리오 가티-카사짜(Giulio Gatti-Casazza)였고 음악감독은 젊은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였다. 라 스칼라의 운영에 관계하고 있던 보이토는 재개관 기념으로 베르디의 성곡(聖曲)을 연주하자고 제안했다. 베르디의 교회음악은 참으로 경건한 걸작들이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베르디는 평소처럼 의례적으로 겸손하게 사양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적극적으로 거절하였다. 베르디는 보이토에게 '제발 라 스칼라에서는 나의 교회음악을 연주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할 정도였다. 왜그러냐고 물었더니 베르디는 '이제 내 이름으로 된 작품을 연주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는 피곤한 일이다. 나도 내 이름이 자꾸 얘기되는 것이 불편하다. 이제 좀 쉬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베르디는 그때부터 이미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것 같았다.


 밀라노의 라 스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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