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오페라 작곡가 일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정준극 2010. 8. 10. 12:49

모차르트에 대한 일화

 

신고할 것은 나의 재능뿐

유럽에서 여행을 다닐 때에는 국경마다 세관들 때문에 고생을 하는 경우가 많다. 어린 모차르트가 처음으로 비엔나를 방문하러 갔을 때에도 국경에서 세관의 검사를 받아야 했다. 당시 잘츠부르크는 오스트리아와는 별도의 통치권을 가진 영토였다. 세관 검사는 간혹 몇시간씩이나 걸리는 까다롭고 지루한 것이었다. 당시 여섯살의 어린 모차르트는 세관검사를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의 대열에서 빠져나와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모차르트 일행(아버지와 누이 등)은 어린 모차르트의 연주가 끝나자마자 세관을 무사통과했다. 세관원이 '신고할 것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모차르트는 '나의 재능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어린 모차르트. 1763년경

 

모차르트와 요셉2세

계몽군주인 요셉2세 황제는 오스트리아에도 독일어로 된 오페라가 있어야 된다고 주장했다. 요셉2세는 청년 모차르트에게 독일어 오페라의 작곡을 의뢰했다. 그렇게 하여 나온 것이 '후궁에서의 도주'였다. 처음 공연되는 날에는 요셉2세 황제가 직접 참석하였다. 요셉2세 황제는 '후궁에서의 도주'가 환상적이기는 하지만 조금 지루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막이 내린후 무대에 올라와서 모차르트를 칭찬하면서 '그런데 뭐랄까? 음표가 너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조금 지루하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모차르트는 '폐하, 아니올시다. 꼭 있을 만큼의 음표만이 있을뿐입니다'라고 대답하여 황제를 어색하게 만들었다.

 

요셉2세 황제

 

어느 때 모차르트는 요십 2세 황제를 위해 피아노협주곡을 작곡하고 있었다. 연주회 날이 가까워 오고 있었지만 모차르트는 그저 생각난 듯 조금조금씩 악보를 건네주어 오케스트라의 연습에 지장을 주었다. 그래서 오케스트라는 하루 종일 모차르트의 다음 악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가 악보가 도착하면 얼른 나누어가지고 연습을 하는 처지였다. 오케스트라 연습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한 요셉 2세 황제가 잠시 나타나서 보니 사정이 그러했다. 모차르트는 황제가 연습장에 나타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연습장으로 달려왔다. 황제가 모차르트에게 '다음 파트의 악보는 어디에 있소?'라고 묻자 모차르트는 손으로 자기의 머리를 가리키며 '폐하, 이 안에 있사오니 아무 걱정하지 마옵소서. 잃어버리거나 불에 탈 염려가 하나도 없사옵니다'라고 대답했다.

 

'더 이상 날지 못하리'

테스피안(배우들)들은 만일 드레스 리허설이 엉망이면 실제 공연은 대성공이라는 믿음이 있다. 하지만 모차르트의 경우에는 테스피안의 이론이 적용되지 않았다. '휘가로의 결혼'의 리허설은 대단했지만 실제 공연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1786년 4월말, '휘가로의 결혼'의 역사적인 초연을 앞두고 모든 출연진이 참가하는 드레스 리허설이 있었다. 모차르트가 직접 지휘하였으며 휘가로는 바리톤 프란체스코 베누치(Francesco Benucci: 1745-1824)가 맡았다. 베누치가 행진곡 풍으로 끝나는 Non piu andrai를 힘차게 부르자 모든 사람들은 너무나 감동하여서 '브라보'를 소리 높이 외쳤다. 성악가들은 물론이고 오케스트라 단원들, 그리고 드레스 리허설을 참관하던 극장측 사람들은 베누치의 훌륭한 노래 솜씨에도 감동하였지만 그보다도 그러한 곡을 작곡한 모차르트를 향하여 더 큰 소리로 '브라보 일 마에스트로'(Bravo, il maestro)라고 소리 높이 외쳤다. 그러면서 모두들 지휘하고 있던 모차르트를 바라보았다. 바질리오와 쿠르지오(판사)역을 맡았던 마이클 켈리(Michael Kelly)는 너무나 감동하여서 '모차르트를 바라보니 그의 천재성을 나타내주는 듯한 햇빛과 같은 밝은 광채가 얼굴에 가득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옆에 있는 베누치에게 '아니, 당신은 왜 한마디도 하지 않는것이요?'라고 물었다. 베누치는 '햇빛을 그림으로 그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요. 마찬가지로 햇빛과 같이 밝은 그의 모습이 어떻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요'라고 대답했다.

 

프란치스코 베누치

 

라이발은 마르틴 이 솔러?

모차르트가 비엔나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시절에 비엔나에서 활동하던 작곡가들 중에서 특히 발렌시아 출신의 빈센테 마르틴 이 솔러(Vincente Martin y soler: 1784-1806)가 가장 인기를 끌었다. 심지어 사람들은 마르틴을 '발렌시아의 모차르트'라고 불렀다. 두 사람은 나이도 서로 비슷했다. 모차르트는 사람들이 마르틴을 자기와 동등하게 취급하는 것이 약간 싫었다. 그래서 누가 마르틴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아, 그 사람의 작품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아름답다기 보다는 아주 예쁩니다. 하지만 앞으로 10년만 지나도 그 사람의 음악을 주목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것 입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속으로 마르틴을 높이 평가하였고 그의 멜로디를 사랑하였다. 그 예로서 모차르트가 오페라 '돈 조반니'의 만찬 장면에서 사용한 멜로디는 마르틴이 작곡한 오페라 '우나 코사 라라'(별난 사건: Una Cosa Rara)의 멜로디를 빌려온 것이었다. '우나 코사 라라'는 '돈 조반니'와 거의 같은 시기에 공연되어 열광적인 인기를 끌었던 오페라였다.

 

 

마르틴 이 솔러

 

고기는 씹을수록 맛을 안다

프라하에서의 '돈 조반니' 초연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모차르트의 그와 콤비인 대본가 로렌조 다 폰테가 '돈 조반니'를 비엔나에 선보였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요셉 2세 황제도 '돈 조반니'를 보았다. 궁정시인이기도 했던 다 폰테는 황제를 자주 만날수 있었기 때문에 '돈 조반니'에 대한 황제의 생각이 궁금했다. 요셉 2세 황제는 음악에도 아주 소질이 많은 인물이었다. 황제는 '그 오페라는 참으로 하늘이 주신 선물과 같다'고 말하며 찬사를 보냈다. 황제는 '돈 조반니'가 '휘가로의 결혼'보다 더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치켜세웠다. 그러나 '돈 조반니의 음악은 나의 비엔나 치아(Teeth)에 맞지 않는 고기(Meat)이다'라고 덧 붙였다. 결국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나중에 다 폰테로부터 황제의 말을 전해 들은 모차르트는 '참 별 사람도 다 있네. 고기는 계속 씹어야 제맛이 난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네'라고 중얼거렸다.


'돈 조반니'의 한 장면

 

로시니의 의견

어떤 사람이 로시니에게 음악가 중에서 누가 가장 위대한 인물이냐고 물었다. '베토벤'이라는 대답이 나왔다. '모차르트는 어떻습니까?'라고 다시 물었다. '오, 모차르트는 위대한 음악가니 무어라고 말할수 없지요. 모차르트는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존재이니까요'라고 대답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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