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오페라 작곡가 일화

자코모 푸치니

정준극 2010. 8. 12. 17:39

자코모 푸치니에 대한 일화

Giacomo Puccini

 

또 다른 마농?

1700년대와 1800년대의 초반에 걸쳐서 나온 오페라들은 같은 주제를 가지고 작곡된 것이 많았다. 예를 들면 오르페오 이야기, 알체스테의 이야기, 리날도의 이야기 등이었다. 물론 이런 주제들은 실제로 내용은 같지만 세팅을 다르게 한 경우가 많다. 1800년대 후반에 가서 그런 관습은 타파되었다. 만일 다른 사람이 이미 작곡한 스토리를 가지고 또 다른 작품을 만든다면 비난을 받았다. 마농에 대한 이야기는 1856년에 다니엘 오버가 오페라로 만들었고 이어 쥘르 마스네가 오페라로 만들었다. 만일 또 다른 사람이 마농을 소재로 하여 오페라로 만든다면 음악계의 핀잔을 받았다. 그런데 푸치니가 똑 같은 마농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새로운 오페라를 만들었다. 푸치니는 '어째서 마농에 대한 오페라가 또 다시 나오면 안되는가? 마농과 같은 여자는 적어도 두 명 이상의 애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푸치니의 '마농 레스꼬'의 한 장면

 

레온카발로와 '라 보엠'

푸치니가 '마농 레스코'의 작곡을 시작하였을 때 레온카발로는 자기의 첫 히트작인 '팔리아치'의 스코어를 완성해 가고 있었다. 레온카발로는 밀라노의 날씨가 너무 더워서 도저히 정신을 집중할수 없어서 북부 이탈리아 티롤지방의 바칼로(Vacallo)라는 곳에 별장을 얻어 지내면서 작곡을 진행하였다. 레온카발로는 푸치니에게도 선선한 바칼로에 와서 지내라고 권유하였고 심지어 숙소도 주선해 주었다. 그리하여 푸치니는 레온카발로의 호의에 때라 바칼로에 가서 지내게 되었다. 레온카발로와 푸치니가 지내게 된 집은 서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다. 레온카발로는 푸치니를 환영한답시고 창문에 팔리아초(어릿광대) 그림을 그려서 볼수 있게하였다. 이에 맞서서 푸치니는 창문에 손이 그려져 있는 타올을 창문에 걸어놓았다. 손은 이탈리아어로 마노(Mano)라고 한다. 푸치니는 손을 그려서 마농(Manon)을 작곡하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코자 했다고 한다.

 

'팔리아치'의 한 장면. LA 오페라

 

두 사람은 친구로서 다정하게 지냈다. 이들의 점잖은 우정은 레온카발로가 다음번 작품으로 파리에 살고 있는 가난한 예술가들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내용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할 때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레온카발로가 발굴한 스토리는 참으로 흥미있는 것이었다. 코믹한 에피소드도 들어있고 폭풍과 같은 격정도 있으며 누구도 말릴수 없는 변덕까지 혼합된 스토리였다. 게다가 통상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두 커플의 사랑 이야기가 전편을 누비고 있는 특별한 내용이었다. 레온카발로는 새로운 스토리로서 오페라를 만들면 팔리아치보다 더 히트할 것으로 생각하고 음악의 구상에 들어갔다. 만일 레온카발로가 자기의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하여 푸치니에게 얘기만 해주지 않았더라면 레온카발로가 작곡을 시작한 새로운 오페라는 아마 세계적인 인기를 끄는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레온카발로로부터 새로운 스토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푸치니는 그 스토리가 너무 흥미로워서 자기 자신이 오페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똑 같은 스토리를 가지고 두 사람의 작곡가가 서로 작곡을 시작한 것이다. 푸치니의 작품은 레온카발로의 것보다 1년이나 앞서서 나왔다. '라 보엠'이었다. 그리고 푸치니의 '라 보엠'은 오페라 역사에 남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레온카발로의 '라 보엠'은 어찌 되었는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신세가 되었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에서 산뚜짜를 위로하고 있는 마마 루치아

 

투란도트의 초연에서 토스카니니는 정확히 무엇이라고 말했나?

푸치니와 토스카니니는 평소 티격태격하는 사이이지만 평생을 친구로서 지냈다. 토스카니니는 푸치니를 진정으로 존경하였으며 푸치니는 토스카니니 이외의 어떤 사람도 자기의 작품을 그토록 완벽하게 해석할수 없다고 믿었다. 푸치니가 후두암 수술을 받기 위해 브뤼셀로 떠났을 때 토스카니니는 밀라노 기차역까지 나가서 푸치니를 배웅했다.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이었다. 푸치니는 기차를 타기 전에 토스카니니에게 '여보게, 나의 사랑하는 공주님을 잘 보살펴 주게나! 투란도 말이야!'라고 당부했다. 오페라 '투란도트'는 아직 미완성이었다. 푸치니는 '투란도트'가 자기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이 될 것으로 믿었다. (푸치니를 비롯하여 그의 동료들은 Turandot를 '투란도'라고 발음하였다.)

 

얼마후, 토스카니니는 라 스칼라에서 '투란도트'의 완성된 부분만을 가지고 리허설을 하고 있었다. 그때 레나토 시모니와 함께 투란도트'의 대본을 쓴 주세페 아다미(Giuseppe Adami)가 느닷없이 연습장소에 문을 열고 들어와 지휘를 하고 있는 토스카니니에게 다가왔다. 통상적으로 어느 누구도 리허설 중에 지휘자를 성가시게 할수는 없는 일이므로 아무리 대본가인 아다미라고 해도 토스카니니에게 무슨 말을 하기 위해 찾아 온 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토스카니니는 아다미에게 '죽으셨나요?'(Dead?)라고 짧게 물었다. '죽으셨어요!'(Dead!)라고 아다미가 역시 짧게 대답했다. 토스카니니는 바톤을 내던진후 아무런 말도 없이 자기 방으로 돌아가 소파에 몸을 파묻고 흐느껴 울었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1908년

 

밀라노 대성당(두오모)에서 열린 푸치니의 장례식에서 라 스칼라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사람은 말할 필요도 없이 토스카니니였다. 푸치니의 첫 오페라인 Le Villi(빌리)에서 '안나의 장송곡'을 지휘했다. 이제 토스카니니에게 맡겨진 임무는 '투란도트'를 최선을 다하여 완성하고 무대에 올리는 일이었다. 누군가는 '투란도트'의 미완성 부분을 완성해야 했다. 토스카니니는 처음에 리카르도 찬도나이(Riccardo Zandonai)를 염두에 두었다. 유명한 악보 출판가인 리코르디도 찬도나이야 말로 푸치니의 후계자라고 생각했던 터였다. 마치 베르디의 후계자가 푸치니인 처럼! 하지만 당시 찬도나이는 이미 작곡가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던 때였다. 그러한 입장에서 아무런 빛도 나지 않는 남의 작품을 마무리하는 일을 맡아서 할 것인가? 결국 토스카니니는 그 일을 프랑코 알파노(Franco Alfano)에게 맡겼다. 현존하는 이탈리아 작곡가 중에서 푸치니의 스타일에 가장 합당한 사람이었다. 알파노의 첫 작품은 톨스토이 원작의 '부활'(Resurrection)을 오페라로 만든 Resurrezione였다. 사실 푸치니도 '부활'을 오페라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것을 알파노가 먼저 손을 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알파노의 '부활'에서 독창적인 멜로디가 부족하다는 의견이었다. 그러므로 '투란도트'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푸치니기 스케치 해놓은 멜로디를 잘 활용만 한다면 좋은 성과를 거둘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한편, 알파노는 La Leggenda di Sakuntala(사쿤탈라의 전설)에서 동양적인 타악기들을 사용한 경험이 있다. 푸치니도 '투란도트'에서 동양적인 타악기를 사용하였다. 그런 점에서 서로 공통점이 있다. 어쨋든 '투란도트'를 완성하는 임무는 알파노가 제격이었다. 일설에는 푸치니의 아들이 찬도나이와 사이가 나빠서 그에게 부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물색하던중 알파노가 후보자로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프랑코 알파노

 

그런데 토스카니니는 알파노가 완성한 부분에 대하여 만족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토스카니니는 푸치니적인 요소는 적고 알파노적인 것만 많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파노는 푸치니의 스케치를 기본으로 하여 자기의 아이디어는 되도록 적게 넣고 푸치니의 정신을 최대한으로 반영하였다. 그래서 나중에 사람들은 알파노를 '또 다른 푸치니' 즉, 푸치니아노(Pucciniano)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알파노는 만일 토스카니니가 푸치니 스타일로 다시 쓰라고 한다면 그건 결국 알파노 스타일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사람들은 '투란도트'를 기다렸다. 어서 공연이 되기만을 고대했다. 토스카니니는 알파노가 마지막 부분을 손질한 악보를 가지고 리허설을 시작했다. 그리고 우선 급한대로 리코르디에게 완성된 악보를 출판토록 했다. 토스카니니는 우선 공연을 하고 나중에 필요하면 스코어를 수정해도 늦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아무튼 '사랑하는 공주님'은 어서 무대에 올라서야 했다.

 

류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장면. 푸치니는 이 장면까지 작곡을 완성했다.

 

캐스팅은 어려운 작업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위대한 작품의 세계초연에 참가하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토스카니니는 고민에 싸였다. 마리아 예리차? 토스카니니는 '토스카'의 비엔나 공연에서 마리아 예리차를 높이 평가한바 있다. 그러므로 마리아 예리차 만한 소프라노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사람들은 칼리프 왕자 역을 테너 자코모 라우리-볼피(Giacomo Lauri-Volpi)가 맡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푸치니가 그를 생각하여 고음 파트를 작곡했다는 얘기도 나돌았기 때문이었다. 류(Liu)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길다 달라 리짜(Gilda dalla Rizza)가 맡길 것으로 생각 되었다. 류는 도리아 역할이었다. 도리아는 푸치니 집의 하녀로서 푸치니의 부인 엘비라의 질투 때문에 그만 불쌍하게 자살한 여자였다. 더구나 길다는 '황금서부의 아가씨'에서 주역인 미니로서 감동을 주었기 때문에 푸치니는 버릇처럼 'cara dolce Gilda'(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길다)라고 말했었다.

 

베이징의 국가대극원에서 공연된 '투란도트'. 중국의 신예작곡가인 하오 웨이야가 프랑코 알파노의 마무리 부분 대신에 중국적인 스타일의 음악을 만들어 붙였고 이 버전을 2008년에 국가대극원(NCPA)이 처음 공연했다.

                                              

하지만 토스카니니의 생각은 달랐다. 투란도트는 폴란드 출신의 로사 라이사(Rosa Raisa)에게 돌아갔고 칼리프는 미구엘 플레타(Miguel Fleta)에게 돌아갔다. 당시 토스카니니는 테너 자코모 라우리-볼피와 원수같은 사이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캐스팅되기가 어려웠다. 류는 마리아 참보니(Maria Zamboni)가 맡았다. '투란도트'의 초연에 대한 기대감이 신문마다 대서특필되었다. 거장의 유작이라는 이유가 크게 작용했다. 게다가 토스카니니는 '투란도트'야 말로 푸치니 선생의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온 밀라노가 '투란도트'를 기다렸다. 다만, 알파노만이 아무런 영광이 없었다. 어느날 리허설이 끝나고 나서 알파노는 토스카니니와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알파노는 토스카니니에게 자기가 완성한 '투란도트'의 끝 부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토스카니니는 '푸치니 선생이 무대 뒤에서 걸어나와 나를 손바닥으로 철석 한 대 치는 기분이다'라고 대답했다.

 

     

투란도트의 이미지를 창조한 로사 라이사와 칼라프의 이미지를 창조한 미구엘 플레타

 

드디어 1926년 4월 25일 밤, '투란도트'는 초연의 커튼을 올렸다. 온 세계가 주목하는 기념비적인 밤이었다. 토스카니니는 지휘를 하던 중 류가 죽는 장면이 나오자 바톤을 놓고 연주를 중단하였다. 이후 부분은 알파노가 푸치니의 스케치를 기본으로 재건한 것이었다. 토스카니니가 무어라고 짧게 말하자 청중들은 아무말도 없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떠났다. 토스카니니는 정확히 무어라고 말했는가? 흥미롭게도 여러 버전이 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여기에서 마에스트로가 펜을 놓았습니다'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라 스칼라의 콘서트마스터였던 엔리코 미네티(Enrico Minetti)는 바로 토스카니니로부터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Qui finisce l'opera, rimasta incompiuta per la norte del Maestro'라고 했다는 것이다. 번역하면  '작곡자께서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에  오페라는 미완성으로 남게 되어 여기에서 끝납니다.'이다.

 

투란도트의 무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콜론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