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19구 되블링

[참고자료] 토마스 코샤트(Thomas Koschat)

정준극 2010. 9. 4. 11:46

[참고자료]

토마스 코샤트(Thomas Koschat)

오스트리아 남성합창단의 대부, 위대한 캐른트너의 민요작곡가 

 토마스 코샤트 

  

오스트리아는 전통적으로 남성합창단의 활동이 활발하다. 비엔나소년합창단도 따지고 보면 남성들의 합창단이다. 오스트리아의 남성합창단을 얘기할 때에 토마스 코샤트를 언급하지 않을수 없다. 오스트리아 남성합창의 발전을 위해 지대한 기여를 한 인물이다. 코샤트는 어떤 사람인가? 코샤트는 1845년 8월 8일 오스트로-헝가리제국 시절에 오스트리아 남쪽 끝, 이탈리아 북부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곳의 클라겐푸르트 인근 비크트링(Viktring)에서 태어났다. 코샤트는 캐른트너 민속노래를 작곡하여 세상에 알리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코샤트남성합창단의 창립 90주년 기념 공연. 클라겐푸르트 시민회관

 

토마스 코샤트의 아버지는 염색장인으로서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직물기업가인 모로(Moro)가문의 공장에서 일했다. 모로 가문은 요셉 2세 치하에서 치스터시움(Cistercium: Zisterziens) 수도원을 설립할 만큼 유력한 인사였다. 한편, 토마스 코샤트의 아버지의 이름도 토마스 코샤트였다. 코샤트의 아버지는 61세 때에 30년 연하의 젊은 여인과 결혼하였다. 그래서 태어난 아이가 토마스 코샤트였다. 코샤트의 아버지는 어린 코샤트를 직물공장의 염색전문가로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의 음악적 재능은 어찌할수 없었다. 모로 집안은 어린 코샤트를 기특하게 여겨서 학비를 대주며 노래공부를 하도록 했다. 특히 모로집안 주인의 여동생인 요세피네는 코샤트를 비트링 교회 성가대에 들어갈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코샤트는 훌륭한 베이스여서 자주 솔로를 맡았다. 음악을 더 공부하고 싶은 코샤트는 클라겐푸르트의 베네딕트수도회가 운영하는 김나지움에 들어갔다. 그후에는 주인 어른의 요망과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 비엔나에 가서 화학을 공부했다. 코샤트는 비엔나에서 합창단의 베이스로서 많은 활동을 했다. 뷔드너남성합창단(Wiedner Mannerchor), 비엔나남성합창회(Wiener Mannergesang-Verein), 아카데미합창단(Akademie Gesangverein)에 속하여 있으면서 하라는 화학공부는 제쳐놓고 노래부르는데에만 집중했다.

 

비크트링 초등학교의 현재 모습. 코샤트는 이 학교를 다녔다.

 

코샤트는 1867년 궁정오페라의 단역으로 출연함으로서 무대에 발을 들여 놓았다가 몇년후에는 궁정오페라의 합창지휘를 맡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코샤트 5중주단'을 조직했다. 5중주단은 오스트리아의 노래, 구체적으로 말해서 캐른트너 지방의 노래를 레퍼토리로하여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전역을 순회연주하였으며 그 어려운 시기에 미국까지 가서 연주회를 가졌다. 코샤트는 음악에 대한 기여로 인하여 여러 표창을 받았다. 대표적인 것은 독일의 빌헬름2세 황제로부터 '붉은 독수리 훈장'(Rote Adler-Orden)을 받은 것이다. 코샤트는 1912년, 67세 때에 은퇴를 선언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고향에서 뵈르터제(Worthersee) 징슈필을 위해 작곡활동을 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코샤트는 1914년 5월 19일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지만 고향인 클라겐푸르트의 안장되었다. 비트링의 안나비흘(Annabichl)공동묘지에서 장례식을 거행할 때에는 622명이나 되는 대합창단이 조가를 불렀다. 그리고 조객들은 수천명이나 되었다.

 

클라겐푸르트의 안나비흘 공동묘지에 있는 토마스 코샤트 묘지

 

클라겐푸르트는 비크트링거 링(Viktringer Ring) 17번지에 '토마스-코샤트 기념관'(Thomas-Koschat Museum)을 마련하였다. 코샤트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볼수 있는 기념관이다. 클라겐푸르트에는 Koscahtpark(코샤트공원)와 Koschatstrasse(코샤트슈트라쎄)가 있다. 코샤트는 뵈르터 제의 명예시민으로 추대되었다. 뵈르터 제에는 그를 기념하여 Koschatpromenade(코샤트프로메나데)라는 거리가 있다. 1919년 비엔나의 19구 되블링은 그를 기념하여 Kooschatgasse(코샤트가쎄)라는 거리이름을 만들었다. 그가 남긴 작품 중 대표적인 것은 Am Worthersee(뵈르터제에서), Die Rusenthaler Nachtigall(루젠탈의 나이팅게일), Der Burgermeister von St Anna(성안나의 시장) 등이다.

 

클라겐푸르트의 중심지역, 앞에 보이는 건물이 시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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