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20구 브리기테나우

[참고자료] 랍비 메나헴 슈니어손

정준극 2010. 9. 9. 08:39

[참고자료]

랍비 메나헴 슈니어손

Rabbi Menachem Mendel Schneerson (1902-1995)

정통유태교의 지도자, 토라의 진정한 해석자

  

레베, 랍비 메나헴 멘델 슈니어손 

 

유태인들에게 있어서 랍비라는 호칭을 가진 사람은 왕보다도 더 존중받는 사람이다. 랍비라는 말은 원래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랍비라고 높이 존경하여 부른 경우가 많이 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26장 49절에 보면 가롯 유다가 예수를 팔아 넘길 때에 예수께 나와서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하고 입을 맞추었다는 기록이 있다. 가롯 유다도 예수를 메시아로 믿지 않고 랍비라고 믿었던 것이다. 또 요한복음 20장 16절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를 처음 만났을 때 처음에는 동산지기인줄 알았다가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니 그때야 알아보고 하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것은 랍비, 즉 선생님이라는 말이었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랍비로 생각할 정도였으니 랍비의 존재가 얼마나 귀중한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오늘날 정통 유태교에서 랍비라는 호칭을 가진 사람은 유태인들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대단한 추앙을 받고 있다. 특히 샤바드 루바비치(Chabad-Lubavitch)의 지도자로서 랍비는 세계적인 존경을 받고 있다. 랍비의 말 한마디 한 마디가 곧 율법이었다.

 

레베: 랍비 메나헴 멘델 슈니어손

 

19세기 후반에 러시아에 와서 살던 유태인들 사이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더 잘 모시지 못해서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더 이해하고 그분의 지혜의 말씀을 더 잘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알아야한다'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유태인들이 세속에 물들어 가고 있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전통적인 사상이 희박해 지는 것을 몹시 걱정했다. 이들은 경건생활이야말로 하나님과 가깝게 지낼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순수 유태적인 전통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면 기도할 때에 머리와 팔에 매는 테필린을 반드시 착용한다든지 하는 것이다. 이 운동은 당시 백러시아의 루바비치라는 마을에 살고 있는 유태인들이 주도했다. 때문에 이 운동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을 샤바드-루바비치 왕조의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샤바드라는 단어는 지혜, 지식, 이해라는 뜻이다. 이 운동을 이끄는 랍비를 루바비치 레베(Lubavitscher Rebbe)라고 불렀다. 이디쉬어로 랍비를 레베라고 불렀던 모양이었다. '루바비치 레베'라는 타이틀은 샤바드-루바비치 운동이 처음 시작된 때로부터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여러 레베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레베가 있다. 너무 유명해서 그냥 '레베'라고만 부른다. 메나헴 멘델 슈니어손이다. 모세5경(토라)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뛰어난 해석으로 유명했다. 그는 또한 기억력이 출중하여서 토라의 모든 내용들을 분명하게 기억하였다. 루바비치 레베인 랍비 메나헴 슈니어손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가? 

 

어린아이를 축복하고 있는 랍비 메나헴 슈니어손

 

레베는 유태력 5662년 니산달 11일에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니콜라에브(Nikolaev: Mykolaiv)에서 태어났다. 유태력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신 창세기로부터 계산하는 것으로 서기 1902년에 해당한다. 그의 이름인 메나헴 멘델은 제3대 레베였던 증조할아버지의 이름을 이어 받은 것이다. 레베는 증조할아버지와 성격등 여러 면에서 가장 닮았다고 한다. 레베의 아버지는 역시 유명한 탈무드 학자이며 유태교 지도자 랍비인 레비 이체하크(Levi Yitzehak)이며 어머니는 역시 유명한 랍비의 딸인 샤나 슈니어손(Chana Schneerson)이었다. 어머니는 레베친(Rebbetzin)이라는 호칭을 들었다. 레베의 부인이라는 의미이다. 유태인 사회에서는 랍비의 부인도 대단한 존경을 받았다. 어머니 레베친은 토라와 탈무드에 대하여 대단히 박식하기도 했지만 모든 사람에게 친절했고 특별히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으로 유명했다.

 

레베 메나헴 슈니어손이 태어난 집. 우크라이나의 니톨라에브에 있다.

 

레베의 어머니 레베친(샤나 슈니어손)의 용기와 현명함은 구약시대의 에스더 왕비나 나오미에 손색이 없었다. 예를 들어 남편이 당국의 박해를 받아 저 멀리 아시아쪽 러시아로 유배되어 갔을 때 어머니인 레베친은 들에 나가 약초를 찾아 그것으로 잉크를 만드는 노동을 했다. 일반적으로 레베친이라는 호칭을 받는 여인이 들에 나가서 힘든 노동을 하는 것은 관례적으로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 레베친이 잉크를 만든 것은 남편인 라비 레비 이체하크가 그 잉크를 사용하여 유태교 신비주의 내용인 카발라, 또는 토라를 해석하여 적어 놓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약 세살 때의 레베 메나헴 슈니어손 

 

레베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의 전생애가 어떠했는지 알수 있는 노릇이다. 레베가 아홉살 때에 어떤 아이가 정박해 있는 어떤 배에서 흑해에 떨어져 허우적 거리는 것을 보고 용감하게 뛰어들어 그 어린아이의 목숨을 구해내었다. 위험에 처해 있는 생명을 구한다는 것은 그의 양심의 발로였다. 이는 그가 평생을 핍박을 받고 있는 유태인들, 강제수용소에 끌려간 유태인들, 유태인이라서 무시당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돕는 일에 헌신하게된 배경이었다. 레베는 어린 시절부터 놀라운 기억력을 보여주었다. 그가 성년식(Bar Mitzvah)을 치룰 즈음에는 토라의 거의 모든 내용을 암기할 정도였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토라의 신동'(Torah prodigy)라고 불렀다. 레베는 십대의 청소년 시절에 오로지 토라의 연구를 위해서 진력하였다.

 

레베의 어머니인 레베친 샤나 슈니어손. 그의 생애를 그린 책들이 여러권 출판되었다.

                             

레베 메나헴 슈니어손은 1929년 27세 때에 봐르샤바에서 샤야 무슈카(Shaya Mushka)라는 여인과 결혼하였다. 샤야 무슈카는 제6대 레베의 딸이었다. 사야 무슈카는 레베인 메나헴 슈니어손과 결혼하였기 때문에 레베친이라는 호칭을 갖게 되었다. 레베친인 샤야 무슈카는 레베 메나헴 슈니어손보다 한살 연상이었다. 레베친은 결혼생활 60년 동안 레베의 훌륭한 동반자였다. 레베친은 1988년에 세상을 떠났다. 레베는 결혼후 베를린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이어 파리의 소르본느에서 공부했다. 레베는 이 기간에 수학과 과학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쌓을수 있었다.

 

레베는 레베친과 함게 히브리력 5701년 시반달 28일 월요일에 미국에 도착하였다. 1941년 6월 23일이었다. 그의 미국행은 그야말로 기적적이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이나 다름 없을 정도로 위험을 무릅쓴 비빌 작전에 의해 미국으로 가는 배를 탈수 있었다. 모두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나치의 무시무시한 홀로코스트에서 피난할수 있었다고 믿었다. 레베가 미국으로 오자 미국은 물론 전세계의 정통 유태교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 들었다. 레베는 샤바드 루바비치의 주장을 펼칠수 있는 세가지 사업을 전개하였다. 교육, 출판, 사회봉사였다. 레베는 이들 사업을 통하여 하나님께 대한 경건함을 더욱 고양시킬수 있으며 토라의 사상을 더욱 널리 전파할수 있다고 믿었다. 레베는 미국에 도착한 후부터 유태교의 신비주의적 내용과 토라의 해석을 총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레베의 장인이 적극 권고하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신비주의적 내용이라는 것은 창세기의 여러 사항들, 그리고 에스겔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것이 주류를 이루는 것이다. 이를 카발라(Kabbalah)라고 부르는데 이는 에덴동산의 '생명의 나무'를 뜻하기도 한다. 아무튼 레베가 토라와 탈무드에 대한 해석책을 펴내자 전세계의 유태인들은 레베에 대하여 무한한 존경심을 금치 못하였다.

 

 

폴란드의 정통유태교 소년들.  

 

레베는 1950년에 장인인 랍비 요셉프 이챠크 슈니어손이 세상을 떠나자 마지못해 루바비치 운동의 지도자로서의 지위에 올랐다. 현재 루바비치 운동 본부는 뉴욕 브루클린의 이스턴 파크웨이에 있다. 레베가 루바비치 운동의 새로운 지도자로 오르자 루바비치 조직과 사업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특히 샤바드-루바비치 운동을 소개하는 책자가 여러 나라 말로 번역출판되었다. 그리고 세계의 여러 도시에 루바비치 센터와 샤바드의 집이 문을 열었다. 특히 세계의 유수한 대학 캠퍼스에 샤바드 루바비치 운동의 물결이 흘러 넘치게 되었다.

 

토라를 강론하고 있는 레베

 

레베 메나헴 슈니어손은 1992년 3월 2일 월요일 오후에 장인의 묘소에 가서 기도를 하는 중에 심장마비를 일으켜 쓰러졌다. 이로 인하여 그는 반신불수가 되었고 무엇보다도 애석한 것은 말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2년 3개월 후인 1994년 6월 12일, 히브리력으로 5754년 탐무츠 달 3일에 브루클린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정통유태교의 신비주의를 국제화, 대중화하기 위해 노력한 위대한 랍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