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오페라 성악가 일화

오페라 황금시대의 디바들

정준극 2010. 10. 28. 21:08

오페라 황금시대의 디바들

 

다 아는 얘기이겠지만 페리, 또는 몬테베르디에 의해 오페라라는 것이 처음 등장할 즈음에는 오페라 전용극장이라는 것이 없었다. 오페라는 왕족이나 귀족들, 고위 성직자, 또는 부호들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에 왕궁의 정원에서, 귀족들의 살롱에서 공연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임시가설무대가 설치되는 경우도 많았다. 오페라가 극장무대로 옮겨간 것은 19세기 중반부터였다. 오페라가 극장으로 옮겨가면서부터 진정한 의미에서의 오페라, 즉 종합예술로서의 오페라가 본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오페라의 극장화가 이루오지기 전에는 사람들의 관심사항이 무엇이었을까? 고작 카스트라토가 얼마나 멋있는 소리를 내는가, 라모의 오페라 무대 뒤편은 어떤 모습일까, 저기에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저 음흉한 신사양반은 누구일까 등등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극장이 생기고 카스트라토를 대신하는 위대한 소프라노와 테너가 등장하였으며 오페라 전용의 극장들이 생기게 되자 오페라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디바들이 등장은 오페라의 판도를 바꾸어 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페라의 역사는 디바들이 쓰는 역사였다. 사람들의 관심은 디바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집중되어 있었다. 디바들의 등장은 바야흐로 오페라의 황금시대를 예견하는 것이었다.

 

19세기 중반, 오페라의 역사를 새롭게 쓰게 한 수많은 디바들 중에서 대표적으로 일곱 명을 꼽으라고 하면 다음과 같다. 필자가 임의로 선정한 것이 아니라 외국서적에서 본 내용이다. 즉, 주디타 파스타, 빌헬미네 슈뢰더-드브리앙, 헨리에트 손타그, 줄리아 그리시, 폴린 비아도르, 제니 린드, 테레세 티티옌스이다. 파스타(Giuditta Pasta)는 노르마, 아미나, 안나 볼레나의 이미지를 창조했고 슈뢰더-드브리앙(Wilhelmine Schroeder-Devrient)은 리엔치에서 아드리아노, 센타, 비너스의 이미지를 창조했다. 손타그(Henriette Sontag)는 오이리안테와 알레비의 미란다 초연에서 타이틀 롤을 맡았으며 그리시(Giulia Grisi)는 노르마의 아달지사, 청교도의 엘비라, 노리나의 초연에서 각각의 이미지를 창조했다. 그리고 비아르도(Pauline Viadort)는 마이에르베르의 휘데(Fides)와 구노의 사포(Sapho)에서, 린드(Jenny Lind)는 베르디의 해적(I Masnadieri)에서 아말리아를 맡았다. 그러나 보라! 그동안 줄곧 유럽 오페라계의 판도를 장악하였던 이탈리아 오페라는 이제 3개의 기둥 중에서 하나로서만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즉, 유럽의 오페라는 이탈리아표 오페라가 압도하고 있었지만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나름대로의 오페라를 개발하여 무대에 올린 것이다. 그리하여 유럽의 오페라 무대에는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의 세 기둥이 공존하게 되었다. 오페라 디바들의 경우에도 처음에는 이탈리아 출신의 소프라노들이 판을 쳤지만 오페라의 황금시기에 주름잡았던 일곱명의 대표적인 디바들을 살펴보면 그 중에서 두명만이 이탈리아 출신(파스타와 그리시)이며 나머지 다섯 명은 프랑스와 독일 출신이었다. 이것만 보아도 이제 유럽의 오페라는 이탈리아의 독과점 시대를 초월했다고 볼수 있다. 하지만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의 세 학파가 서로의 특성만을 내세운 것이 아니었다. 물론, 이탈리아는 음성을, 독일은 오케스트라를, 프랑스는 극장적인 요소를 강조하였지만 결국 이 세가지가 융합되는 양상으로 발전하였다. 

 

제니가 가르시아를 위해 노래하다

1844년 청운의 뜻을 품은 제니 린드(1820-1887)가 파리에 도착했다. 제니는 당대의 성악교사 마누엘 가르시아를 찾아가 가르침을 간청했다. 가르시아는 귀찮기는 하였지만 멀리 스웨덴에서 일부러 성악을 공부하러 왔다고 하니까 제니에게 한번 노래를 불러 보라고 허락했다. 제니가 노래를 다 부르고 나자 가르시아는 '여보게 아가씨, 아가씨는 소리가 없어!'라고 말했다. 제니는 당황했다. 물론 아무런 경력도 없는 신인이었지만 소리가 없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라며 궁금해 했다. 가르시아는 제니의 당황한 모습을 보자 '아니, 아마 전에는 소리를 가지고 있었겠지. 지금은 그것마저 잃을것 같다네. 아마 그동안 노래를 너무 많이 불렀거나 그렇지 않으면 너무 일찍부터 불렀던것 같아! 그래서 아가씨의 악기가 벌써 낡아버렸지. 그런 아가씨에게 나로서는 지금 어떤 레슨도 하기가 어렵다네. 재능은 있는것 같은데...아무튼 석달동안 아무런 노래도 하지말고 가만히 있다가 그 다음에 다시한번 찾아오게나'라고 설명해주었다. 불쌍한 제니는 낯선 나라에서 아는 사람도 없이 낙심 중에 3개월을 기다렸다. 제니는 나중에 이 기간을 회상하면서 '나는요 눈물로서 지냈어요. 속상하기도 하고...고향생각이 얼마나 나던지...'라고 말했다. 제니는 고향생각을 잊으려면 바쁘게 지내는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프랑스말과 이탈리아말을 죽어라고 공부했다. 석달이 지났다. 제니는 가르시아를 찾아갔다. 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가르시아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자, 우리 이제부터 시작하자!'고 말했다.

 

제니 린드

 

제니가 에릭슨을 감동시키다

제니 린드는 오페라에 데뷔하기 전에 마담 에릭슨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처음 데뷔할때의 역할은 '마탄의 사수'에서 아가테였다. 제니는 스승인 에릭슨에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놀라게 해주고 싶었다. 공연이 끝나자 제니는 에릭슨에게 달려갔다. 어떠했는지 듣고 싶어서였다. 에릭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기만 했다. 제니는 '내가 너무 못했나? 형편없었나?'라며 몹시 궁금해 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에릭슨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에릭슨은 '우리 제니야! 난 더 이상 네게 가르칠 것이 없다. 이제 세상으로 나가라! 나가서 네가 가지고 있는 하늘로부터 받은 재능을 펼쳐 보여라!'라고 말했다.

 

제니 린드 초상화

 

제니가 왜 은퇴하려는지 설명하다

제니는 모든 사람들이 경악하는 가운데 가장 정상의 시기에 은퇴하겠다고 발표했다. 상당기간동안 제니와 함께 활동했던 유명한 서커스 사업가 바넘(P.T. Barnum)까지도 놀랬다. 어떤 친구가 제니에게 왜 은퇴하려는지 물어보았다. 간단히 말해서 '헛되고 헛되고 헛되도다'라는 생각이 들어서라는 설명이었다. 이제 기쁜일 슬픈일 모두 겪어 보았는데 더 이상 무엇을 할수 있겠느냐는 얘기였다. 무릇 사람은 가장 많은 박수를 받을 때에 물러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일이라는 생각이었다.

 

1851년 독일에서 만든 제니 린드 도자기 인형

 

제니 린드의 미국 첫 콘서트 

아래 그림은 1850년 미국에서 제니 린드 콘서트의 선전 활동을 보여주는 것이다. 뉴욕 브로드웨이 289번지에 있었던  P.T. 버넘의 박물관 앞이다. 그 때 제니 린드는 버넘 흥행단과 계약하여 콘서트를 가졌었다. 버넘은 제니 린드의 콘서트를 최대로 선전하여 돈을 벌고자 했다. 그래서 마치 서커스 선전과 같은 행동을 했다. 버넘은 자기의 '믿거나 말거나' 스타일의 박물관에 제니 린드의 콘서트 장소를 마련했다. 입구에는 First Concert of JENNY LIND 라고 써 붙였다. 박물관 안에 들어서면 표파는 곳이 있고 그 옆에는 버넘 자신이 서 있다. 사람들이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지켜보자는 것이다. 포스터 앞에는 사탄처럼 생긴 사람이 북을 치고 있다. 건물 한쪽에는 제니 린드의 모습을 그린 대형 현수막을 걸어 놓았다. 한 손에는 부채를 들었고 다른 손에는 나이팅게일을 들었다. 나이팅게일은 제니 린드가 '스웨덴의 나이팅게일'이라고 불리는 것을 표현했다. 건물 앞의 가설무대에는 위에 반은 흑인이고 반은 백인인 어릿광대 같은 사람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그 앞에는 서커스 사회자 처럼 생긴 사람이 제니 린드의 콘서트가 열리니 오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고 다른 사람은 선전물을 뿌리고 있다. 가설무대의 아래에는 나팔과 북을 부는 사람들이 연주하고 있다. 나팔에는 뉴욕의 주요 신문들, 예를 들면 Tribune, Herald, Express, Courier and Enquirer 등의 글이 적혀 있다. 이런 신문사들이 후원하고 있다는 표시이다. 제니 린드의 미국 첫 콘서트는 1850년 9월 11일 뉴욕에서 열렸다. 윌리엄 샤우스(William Schaus)라는 사람이 그린 이 선전그림(Panorama of Humbug)은 현재 워싱턴의 의회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미국에서 제니 린드 독창회 선전

 

플로레스탄에게 버터를?


빌헬미네 슈뢰더-드브리앙은 당대의 휘델리오였다. 휘델리오는 플로레스탄의 부인으로서 남자로 변장한후의 이름이다. 역대의 휘델리오 중에서 슈뢰더-드브리앙만한 소프라노가 없었다. 무대를 압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대위의 출연자들도 압도하였다. 오페라 '휘델리오'에서는 휘델리오가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플로레스탄에게 빵을 배급하는 장면이 있다. 슈뢰더-드브리앙이 플로레스탄에게 빵을 건네 주었는데도 플로레스탄은 대뜸 받지 않고 일부러인지 천천히 받았다. 이를 본 슈뢰더-드브리앙은 플로레스탄에게 '어서 받아 먹어요! 뭘 기다리는 거예요. 버터요? 여기 버터같은 것은 없으니 꿈도 꾸지 말아요!'라고 속삭였다. 그랬더니 플로레스탄이 빵을 속히 받아 먹더란다.

 

관련 이미지

빌헬미네 슈뢰더-드브리앙 

 

과연 손타그


어떤 손타그 극성팬이 사람들 앞에서 손타그야 말로 모든 이탈리아 소프라노들보다 더 뛰어나다고 입에 거품을 물다시피하며 얘기했다. 이말을 들은 어떤 이탈리아 반대론자가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면서 분연히 대들었다. 그런데 그 이탈리아 반대론자는 손타그의 노래를 한번도 들어본 일이 없었다. 손타그의 극성팬은  이탈리아 반대론자에게 직접 손타그의 노래를 들어보고 흑백을 가리자고 제안했다. 두 사람은 마침 그 도시에서 공연되고 있는 손타그 출연의 오페라가 있어서 함께 보러 갔다. 손타그가 등장하여 아리아를 불렀다. 그러자 이탈리아 반대론자가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고 했다. 극성팬은 '아니, 지금 당장 가면 어쩌란 말이요? 단 한번의 노래를 듣고 판단하려면 안되지요. 다시 한번 기회를 주어 보시오'라고 간청했다. 극성팬은 반대론자가 손타그의 노래를 형편없다고 생각하고 그냥 떠나는줄 알았다. 그랬더니 반대론자는 '알아요. 그래서 내가 지금 가려는 것이란 말이오'라고 대답했다.

 

헨리에트 손타그

 

그리세트와 마리오네트

줄리아 그리시(Giulia Grisi: 1811-1869)는 벨리니 시대의 뛰어난 벨칸토 테너인 마리오(1810-1883) 남작과 결혼했다. 마리오의 원래 이름은 조반니 마테오이다. 두 사람은 런던의 이탈리아 대사관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리셉션을 주관한 대사가 그리시에게 '어린 그리세트(Grisette)는 잘 있나요?'라고 물었다. 그리세트는 그리시의 애칭이기도 하지만 여직공, 특히 의상실의 여공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리시는 '그리세트라니요, 밀로드(Milord)! 아, 마리오네트(Marionette)를 말씀하시는 군요!'라고 대답했다. 밀로드는 My Lord를 이탈리아식으로 그냥 대충 부른 것으로 약간 핀잔하는 표현이며 마리오네트는 마리오의 애칭이기도 하지만 연극할 때 쓰는 인형을 말한다.

 

주디타 그리시(왼쪽)와 줄리아 그리시(오른쪽) 자매. 모두 뛰어난 오페라 성악가였다.

 

파스타와 최후의 만찬


주디타 파스타는 1850년 런던 컴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평론가들은 파스타의 음성이 '이미 포기 상태이다.'라고 말하며 파스타의 시대가 지나갔음을 얘기하였다. 어떤 사람은 한술 더떠서 '파스타는 음성뿐만 아니라 모습도 한물 갔다'고까지 혹평하였다. 파스타가 여왕폐하극장의 무대에 서는 날, 비아도르가 시간을 내어 참석하였다. 파스타의 음성은 마치 관절이 삐걱거리는 듯한 소리였다. 많은 사람들이 시선을 돌릴 정도였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파스타는 노르마의 이미지를 창조할 정도로 위대하지 않았던가? 사람들은 듣고 웃었지만 비아도르는 성실하게 들었다. 그리고 '파스타는 밀라노에 있는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Cenacolo)과 같다. 비록 손상되었지만 그 그림은 세계적인 위대한 작품이다'라고 말했다.

 

주디타 파스타. 오텔로에서 데스데모나. 1821년.  

 

티에티엔스 마지막 루크레지아


암으로 고통받고 있던 테레스 티에티엔스(Therese Tietjens: 1831-1877)는 1877년 봄에 마지막 수단으로 수술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여왕폐하극장에서 이미 예정되어 있는 루크레지아 보르지아는 약속대로 출연하겠다고 결심했다. 의사는 말기암이므로 오페라 공연이 무리라고 극구 만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사람들은 설마 티에티엔스가 다시 무대에 서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과연, 티에티엔스는 위대한 소프라노일뿐만 아니라 위대한 배우였다. 비탄에 젖어 노래를 부를 때에는 모두들 숨을 멈출 정도였다. 어느 누구도 그가 통증으로 인하여 더욱 비통하게 노래부르는 것이라고는 생각치 않았다. 티에티엔스는 하나의 장면이 끝날 때마다 몹시 지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래도 무대를 떠나지 않았다. 티에티엔스는 걸음을 옮기지 못할 정도로 통증이 심하였지만 혼신을 다하여 무대 위로 걸어 나갔다. 이제 오페라도 거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렀다. 루크레지아가 이들의 시체를 보고 극도의 슬픔과 공포를 이기지 못하여 비명을 지르는 장면이었다. 티에티엔스는 정말로 실감있게 비명을 지른후 실신하여 그 자리에 쓰러졌다. 청중들은 모두 일어서서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막이 내려졌다. 하지만 티에티엔스는 정말로 정신을 잃고 쓰러진채 일어나지 못했다. 빈 막만이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지기를 반복하였지만 티에티엔스는 커튼 콜에 나타날수 없었다. 며칠후 티에티엔스는 마지막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후 세상을 떠났다. 향년 46세였다.


 테레스 티에티엔스

 

콜브란과 말리브란

로시니는 오페라의 황금시대를 살아온 사람이었다. 수많은 디바들을 만났고 그들의 데뷔를 인도하였다. 어느날 어떤 평론가가 로시니에게 물었다. '누가 가장 위대한 소프라노라고 생각하시느냐?'는 질문이었다. 로시니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사벨라 콜브란(isabella Colbran: 1785-1845)이라고 대답했다. 이사벨라 콜브란은 나폴리왕과 산 카를로 극장 매니저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로시니와 결혼한 당대의 소프라노였다. 콜브란은 로시니의 영국여왕 엘리사베타, 오텔로, 아르미다, 호수의 여인, 모세, 세미라미데, 그리고 마오메토2세의 초연에서 콜로라투라 메조의 역할을 창조한 인물이었다. 그 정도면 로시니의 생각에 당대의 가장 위대한 디바라고 볼수 있다. 더구나 로시니의 첫번째 부인이 아닌가? 그런데 로시니는 잠시 생각하더니 '위대하기는 콜브란이지만 뛰어나기는 말리브란'이라고 덧붙여 말했다. 콜브란과 말리브란의 차이였다. [마리아 말리브란(1808-1836)은 유명한 테너 겸 작곡가 겸 최초의 본격 성악교사인 마누엘 가르시아의 딸로서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오페라 성악가로 평가받고 있는 인물이다. 도니제티의 마리아 스투아르다의 초연에서 타이틀 롤의 이미지 등을 창조했다.] 

 

 이사벨라 콜브란 '막베스'에서 레이디 막베스

 


마리아 말리브란. 로시니의 오텔로 중에서 데스데모나 역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