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말리브란(Maria Malibran)
마리아 말리브란(Maria Malibran: 1808-1836)은 오페라의 황금시기에 모든 디바들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마리아 말리브란의 아버지는 유명한 테너 겸 음악선생인 마누엘 가르시아였다. 마리아 말리브란은 뛰어난 미모와 아름다운 음성, 그리고 놀랄만한 연기력으로 당대 최고의 오페라 성악가로서 군림하였다. 하지만 28세라는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마리아 말리브란
죽음과 사랑
제목이 거창할지 모르지만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말리브란이 로시니의 오텔로에서 데스데모나를 맡아 공연하던 밤이었다. 아버지 가르시아는 오텔로를 맡았다. 가르시아는 딸 말리브란에게 무대에서 한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되며 실제와 같다고 생각하고 연기를 하라고 누차 강조하였다. 말리브란은 이 때문에 오히려 더 신경이 쓰여서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오텔로가 데스데모나를 의심하여 바야흐로 걷잡을수 없이 광폭하게 되기 직전의 장면이었다. 오텔로 가르시아는 데스데모나 말리브란을 정말로 죽일 것처럼 대들었다. 말리브란은 가르시아의 모습이 정말로 무서워서 '사람 살려줘요! 날 죽이려해요!'라고 외치면서 무대 구석으로 도망갔다. 하지만 오텔로 가르시아가 바로 잡을 듯이 쫓아왔다. 말리브란은 죽어라고 또 다시 몸을 피하다가 그만 오케스트라 피트로 떨어졌다. 마침 운 좋게 악장인 샤를르 드 베리오(Charles de Beriot)가 얼떨결에 팔을 뻗쳐 말리브란을 안았다. 나중에 말리브란의 남편이 되었다.
'세미라미데'에서의 마리아 말리브란
말리브란의 욕심
1835년, 말리브란이 세상을 떠나기 전해의 일이었다. 말리브란은 런던에서 어떤 이탈리아 출신의 가난한 음악교수가 주관하는 콘서트에 출연키로 했다. 음악교수는 당대의 말리브란을 초청하여 음악회를 가져 수익금으로 하고 싶었던 연구를 계속하고 생활에도 보탬이 되고자 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날따라 많은 사람들이 입장하지 않았다. 낭패였다. 콘서트가 끝나자 음악교수가 말리브란에게 다가와서 '저, 출연료는 20기니로 정했지만 오늘 밤에 통 표가 팔리지 않아서...혹시 좀 감해 주실수 없으신지요'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말리브란은 약속한대로 20기니를 다 받아야 겠다고 나섰다. 음악교수는 '아, 어쩌면 이렇게 욕심이 많으실까?'라면서 어쩔수 없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급히 돈을 빌려서 20기니를 채워서 말리브란에게 주었다. 말리브란은 음악교수의 부인과 아이들이 돈이 없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지낸다는 얘기를 들은바가 있다. 20기니라는 거금을 모두 받은 말리브란은 그 돈을 그대로 음악교수의 손에 쥐어 주며 '내가 출연료를 조금만 받으면 선생님에게 작은 액수밖에 되돌려 줄수 없기 때문에 억지를 부려서 모두 달라고 그런거예요. 어서 집에 가서 부인과 아이들을 위해 맛있는 것좀 사주세요'라고 말했다. 음악교수의 눈에 안개가 서렸다.
마리아 말리브란. 오텔로에서 데스데모나
마리아 말리브란과 윌렴 발프의 우정
어떤 작곡가들은 평생동안 자기와 같은 시대에 활동하고 있는 오페라 성악가들과 특별한 인연을 맺으며 지내는 경우가 있다. 윌렴 발프는 그 중의 하나이다. 발프는 '청교도'의 4인조라고 하는 줄리아 그리시, 조반니 루비니, 안토니오 탐부리니, 루이지 라블라케와 친밀하게 지내며 함께 활동했다. 잘 아는대로 '보헤미아 소녀'(The Bohemian Girl)로서 유명한 영국의 윌렴 발프는 작곡가로서 이름을 떨치기 전에 이탈리아의 밀라노와 베니스에서 오페라 테너로서 많은 활동을 했다. 이 때에 발프는 메조소프라노 마리아 말리브란과 각별한 우정을 쌓으며 지냈다. 발프는 로시니의 '오텔로', '세빌리아의 이발사', 그리고 벨리니의 '몽유병자'에서 말리브란과 함께 출연하여 찬사를 받았다. 말리브란은 발프에게 작곡 재능이 있는 것을 알고 작곡가로서의 길을 걷도록 적극 권면했다. 그리고는 그에게'영국의 로시니'라는 별명까지 지어 주었다. 이탈리아에서 런던으로 돌아온 발프는 첫 오페라를 작곡했다. '로첼르 공성'(The siege of Rochelle)라는 것이었다. 대성공이었다. 이어 두번째 오페라를 내놓았다. '아르투아의 처녀'(The Maid of Artois)라는 것이었다. 특별히 말리브란을 염두에 두고 작곡한 오페라였다. 1836년 5월 27일에 초연을 가졌다. 발프도 특별 출연했다. 말리브란과 발프의 듀엣은 대인기를 끌었다. 안타깝게도 '아르투아의 처녀'는 말리브란의 마지막 출연작품이 되었다. 말리브란은 이듬해인 1837년 9월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때 말리브란의 나이는 28세였다. 발프는 말리브란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말리브란을 위해 Sempre pensoso e trobido라는 칸타타를 완성할수 있어서 다행으로 생각했다. 번뇌하는 연인을 위한 아리아가 놀랄만큼 감동을 주는 칸타타였다.
마리아 말리브란
말리브란의 관용
말리브란과 헨리에트 손타그가 파리에서 조인트 콘서트를 가졌을 때의 일이다. 연주회가 끝나고 두 사람이 무대 앞에 나와 인사를 하자 청중들은 노도와 같이 앞으로 몰려 나와 꽃을 던지며 환호하였다. 말리브란이 자기 발 앞에 던져진 꽃을 주으려하자 손타그가 '잠깐! 그 꽃은 나에게 보낸거니 만지지 말아요!'라고 말했다. 아니, 자기에게 보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보통 사람 같았으면 '언니! 무슨 웃기는 소리를 그렇게 해! 내 발 앞에 떨어졌는데 어째서 언니 것이야!'라며 한대 먹였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리브란은 꽃을 집으면서 '손타그님의 발 앞에 놓으려고 주웠던 것입니다'라고 공손히 말하였다. 손타그는 아무 말도 못하였다. 이렇게 성악가 중에는 의외로 쪼잔한 일에 신경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사람에게는 그저 관용이 약이었다.
헨리에트 손타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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