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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너 마리오(Mario)

정준극 2010. 10. 29. 20:54

테너 마리오(Mario)

 

테너 마리오

 

예명이 마리오(Mario)인 돈 조반니 마테오 데 칸디아(Don Giovanni Matteo De Candia)는 19세기에 가장 유명한 테너이다. 1810년 사르디니아의 칼리아리(Cagliari)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에서 볼수 있듯이 귀족가문이다. 실제로 그의 친척은 토리노 왕실의 일원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사르디니아 육군의 장군이었다. 그런 그가 귀족가문으로서의 모든 영예와 의무를 벗어던지고 낮은 직업인 음악가로의 길을 걷기로 했다. 그래서 귀족이라는 인상을 던져 버리기 위해 평범한 마리오라는 이름을 택하였다. 20세 때의 일이었다. 어떤 때는 프로그램에 조반니 마리오라고도 쓰지만 그보다는 마리오라는 한마디의 이름을 더 선호하였다. 음악가가 되려고 결심한 것은 어찌보면 순전히 우연한 사고때문이었다. 그는 원래 사르디니아 국왕의 근위병 장교였다. 어느때 상관에 대한 작은 실수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얼마후 감옥에서 석방된 그는 장교복을 벗어던지고 어떤 발레리나와 함께 파리로 가출하였다. 그리고 파리에서 성악가가 되기 위해 성악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타고난 훌륭한 음성으로 인정을 받아 곧 파리 오페라와 계약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38년, 28세 때에 마이에르베르의 Robert le Diable(악마 로베르)로서 데뷔하였다. 대단한 미성이었다. 파리 오페라의 스타가 되었다.

 

마리오가 태어난 사르디니아의 칼리아리

 

하지만 그는 파리 오페라극장에 머물지 않고 이탈리아극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이곳에서 마리아 말리브란, 헨리에트 손타그, 패니 타키나르디 페르시아니, 줄리아 그리시, 조반니 바티스타 루비니, 안토니오 탐부리니, 루이지 라블라셰와 같은 정상의 성악가들과 함께 오페라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극장에서의 첫 역할은 '사랑의 묘약'에서 네모리노였다. 대단한 찬사를 받았다. 파리 오페라(갸르니에 오페라)보다도 훨씬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그해에 그는 런던에서도 모습을 보였다. 역시 대성공이었다. 그후로 유럽의 오페라 전역에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미성에 우아한 모습 때문이었다. 핸섬하게 생긴 그는 리릭 테너였다. 체격도 아름다웠다. 간혹 미끈한 다리를 슬쩍 보여주는 바람에 여인들의 탄성을 받는 일도 있었다. 물론 비르투오소 테너인 조반니 바티스타 루비니에 비하여 찬란한 면은 부족하였고 엔리코 탐벌리크(Enrico Tamberlik)에 비하여 강력한 점도 부족하였지만 마리오의 음성은 비로도처럼 부드러워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도 남았다. 조지 버나드 쇼는 마리오에 대하여 '기막히게 아름다운 비브라토를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마리오의 부인인 드라마틱 소프라노 줄리아 그리시. 노르마의 타이틀 롤. 1844년.

 

마리오는 여러 오페라의 초연에서 주인공의 이미지를 창조했다. 대표적인 것은 '돈 파스쿠알레'에서 에르네스토였다. 하지만 가장 사랑받는 역할은 로시니의 '오텔로'에서 타이틀 롤, '루크레지아 보르지아'에서 제나로, '세빌리아의 이발사'에서 알마비바 백작, '라 화보리타'에서 페르난도, '리골레토'에서 공작, '일 트로바토레'에서 만리코 등이었다. 마리오는 어쩌면 파리에서보다 런던에서 다 자주 공연을 했고 더 많은 갈채를 받았다. 마리오는 오페라 출연 이외에도 콘서트를 자주 가졌다. 영국의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순회연주회도 가졌다. 그러다가 플로렌스에 저택을 마련하여 본거지로 삼았다. 수많은 예술가, 정치인 들이 그의 저택에 있는 살론에 드나들었다. 마리오는 당대의 소프라노 줄리아 그리시와 런던에서 결혼했다. 줄리아 그리시도 사르디니아 귀족가문 출신이었다. 딸 다섯과 아들 하나를 두었다. 작가로 유명한 세실리아 마리아 데 칸디아는 이들의 딸이었다.

 

한창시절의 마리오

 

마리오는 1871년, 61세 때에 무대에서 은퇴하였다. 몇해전 아내인 그리시가 러시아 공연을 마치고 런던으로 돌아오던중 베를린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심적타격이 커서 그 여파로 은퇴를 결심했던 것이다. 마리오의 마지막 은퇴 공연은 생페터스부르크 마리인스키 극장에서였다. 그후 이탈리아로 돌아가 여생을 작곡과 저술활동을 하면서 보냈다. 그렇지만 아내를 잃은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으며 더구나 방탕한 생활로 인하여 재산을 낭비하여 생활이 어려웠다. 마리오는 결국 1883년 로마에서 73세로 가난한 중에 세상을 떠났다. 마리오는 시가를 너무 많이 피웠다. 입에서 시가가 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목욕을 하면서도 시가를 피웠다. 그래서 폐암으로 죽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마리오가 아직 생존하여 있을 때 빈곤해졌다는 것이 알려져 런던에서는 모금음악회까지 열렸다. 그만큼 사랑을 받은 테너였다. 하지만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