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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프리트 예루살렘(Siegfried Jerusalem)

정준극 2013. 5. 28. 20:16

지그프리트 예루살렘(Siegfried Jerusalem)

이 시대의 진정한 바그너 테너

 

헬덴테너인 지그프리트 예루살렘

             

바그너 테너(헬덴테너)인 지그프리트 예루살렘(Siegfried Jerusalem: 1940-)은 이제 나이가 들어서(2013년으로 73세) 더 이상 무대에 서지는 않고 후진들의 양성에만 정성을 기울이고 있지만 그의 이름은 바그너의 오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아직도 훈훈하게 남아 있다. 말 안해도 아는 사항이지만 우선 그의 이름부터가 특이하다. 지그프리트는 바그너의 오페라 '지그프리트'의 주인공이다. '링 사이클'의 스토리에 의하면, 지그프리트는 남매간인 지그문트와 지글린데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 예루살렘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지인 그 예루살렘이라는 명칭을 어떻게 이름으로 사용하게 되었는가? 잘 모르겠다. 나중에 더 조사해서 설명코자 한다. 지그프리트 예루살렘은 독일이 낳은 위대한 오페라 테너이다. 그는 바그너 역할에 적합한 헬덴테너(Hendentenor)이다. 그는 지그프리트, 지그문트, 로엔그린, 파르지팔, 트리스탄 등 바그너 오페라의 주역들을 놀라운 능력으로 불렀다. 그런가하면 리더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가 특별히 선호하는 리더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구스타브 말러, 로베르트 슈만의 예술가곡들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지그프리트 예루살렘

 

지그프리트 예루살렘은 독일 서부, 루르지방에 있는 오버하우젠(Oberhausen)에서 태어났다. 오버하우젠이라고하면 축구의 결과를 알아 맞춘다는 문어 파울(Paul the Octopus)이 살고 있는 도시이다. 지그프리트 예루살렘은 에센의 폴크봥슐레(Volkwangschule)에서 피아노, 바이올린, 바순(파곳)을 공부했다. 하나만 공부하기도 어려운데 세가지 악기를 공부했다. 그러다가 결국 바순을 선택하여 1961년부터 바순니스트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71년부터 77년까지는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남부독일라디오방송 오케스트라의 바순주자로서 활동했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가 그렇듯이 운명은 이상하게 돌아가는 법인 모양이다. 1975년에 35세의 청년인 지그프리트 예루살렘은 텔리비전 공연할 예정인 요한 슈트라우스의 '집시 남작'(Der Zigeunerbaron)에서 오케스트라 멤버로서 앉아 있다가 타이틀 롤을 맡은 테너 프랑코 보니솔리(Franco Bonisolli)라는 사람이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마지막 순간에 출연하지 못하게 되자 사람들이 지그프리트 예루살렘을 보고 '자네 한번 해보게! 죽이되든 밥이되든 말이야!'라고 적극 권장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집시남작의 역할을 맡아 하게되었는데 참으로 대단히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하였던 것이다. 오페라의 역사에 있어서 바순을 불던 사람이 갑자기 오페라 테너로서 데뷔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지그프리트 예루살렘이 처음일 것이다. 그런데 실은 지그프리트 예루살렘은 벌써부터 슈투트가르트에서 성악레슨도 받아 왔었다.

 

파르지팔에서의 지그프리트 예루살렘

 

아무튼 '집시남작'으로부터 지그프리트 예루살렘은 오페라 테너로서 새로운 경력을 시작했다. 1975년의 '집시남작'은 갑자기 대타로서 나갔던 것이고 실제로 정식 데뷔는 이듬해인 1976년 '로엔그린'으로였다. 대단한 미성의 리릭 테너로서 지그프리트 예루살렘의 이름은 삽시간에 독일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지그프리트 예루살렘은 다름슈타트, 아헨, 함부르크, 그리고 취리히 페스티발에서 모습을 보였다. 그후에는 뮌헨과 뉴욕으로도 진출하였다. 바이로이트 입성은 1977년이었다. 그는 계속하여 바이로이트에서 프로(라인의 황금), 젊은 선원(트리스탄과 이졸데)과 같은 단역을 거쳐 마침내 '로엔그린' '파르지팔'을 맡게 되었다. 리릭에서 드라마틱으로, 이어서 바그너의 헬덴테너로 발전한 그는 비엔나와 드레스덴에서 '발퀴레'의 지그문트를 맡아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다. 함께 출연한 성악가들은 제시 노만, 테오 아담, 이본느 민튼 등 기라성과 같은 세계의 정상 성악가들이었다. 그는 1978년부터는 베를린의 독일 오페라의 정규 멤버로서 출연하기 시작했고 아울러 슈투트가르트, 취리히, 뮌헨, 비엔나에서도 객원출연하였다. 그는 이제 국제적인 테너로서 높은 명성을 얻었다. 바이로이트를 비롯한 독일은 나름대로 진정한 헬덴테너를 갖게 되었다면서 크게 자랑하였다.

 

메트로폴리탄에서 지그프리트의 지그프리트 예루살렘

                             

지그프리트 예루살렘의 바이로이트 경력은 계속되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에는 지그프리트를 맡았고 1989년에는 '신들의 황혼'에 등장했다. 메트로폴리탄에서의 정식 데뷔는 1990년 제임스 르바인의 지휘로 '발퀴레'와 '지그프리트'에서 지그프리트를 맡았다. 메트로폴리탄에서는 어렵다는 로게(Loge)의 역할도 맡아했다. 1992년도 바이로이트의 지그프리트는 DVD로 나와 있어서 그의 모습을 볼수 있다. 그레이엄 클라크(Graham Clark), 앤느 에반스(Anne Evans), 존 톰린슨(John Tomlinson)과 함께 공연한 것이다. 1993년에는 바이로이트에서 드디어 '트리스탄'에 데뷔하였다. 이후로 그는 유럽의 여러 극장에서 트리스탄을 맡아 박수를 받았다. 그의 바이로이트 마지막 공연은 1999년에 트리스탄으로였다. 그리고 오페라 무대에서 은퇴하였다. 그는 현재 뉘른베르크의 음악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학생들도 여러명이나 그에게서 레슨을 받았다.

 

지그프리트 예루살렘의 근황

 

지그프리트 예루살렘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바그너의 오페라만을 집중적으로 취입하였다. 메트로폴리탄에서 제임스 르바인 지휘의 바그너 음반을 비롯해서 다니엘 바렌보임과 피에르 불레즈의 지휘로 바이로이트에서의 공연을 음반으로 만든 것들도 있다. 그는 1997년 10월 9일 한글날에 독일 정부로부터 독일연방 공로십자훈장을 받았다. 대단한 영광이었다. 지그프리트 예루살렘은 크로스오버 음악도 시도하였다. 두개의 앨범이 나왔다. The Glory of Love(사랑의 영광: 1996)과 Avalon(아발론: 2002)이다.

 

파르지팔에서의 지그프리트 예루살렘